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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유 Oct 16. 2024

성과평가, 일에서만 하고 있나요?


띠링. 아웃룩에 새 이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메일 제목이다.

'성과 평가 일정 안내 드립니다.'


제목만 봐도 명치끝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 또 반년이 지났어?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지. 뭐 했지?'라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반 자동적으로 노트북 폴더에서 매주 보고했던 업무계획 파일을 뒤지기 시작했다. 6개월 동안의 내 성과를 낱낱이 파헤치고 그럴싸하게 포장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성과 평가. 건강검진만큼이나 귀찮으면서도 중요한 시간이다. 아마 직원들이 온 정성을 기울여 참여하는 인사제도를 꼽으라면 이것 단 하나일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목표를 얼마나 잘 달성했는지 평가받고 결과는 연봉 인상률이나 보너스 비율을 정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 무엇보다 결과로 받게 되는 등급 한 글자가 하루 여덟 시간 이상 몸담아 온 1년의 질을 평가하니 나의 삶, 존재 자체가 저울질받는 기분이 든다 해도 무방할 테다.





이 성과 평가표를 열 번째 작성하던 어느 날이었다. 회사 인트라넷에 접속하여 올해 초 내 손으로 직접 적어 넣은 목표들을 살펴보았다. 여섯 가지 항목이 눈에 보였다.


'목표, 상세 계획, 가중치, 측정방법, 기한, 성과'


언제나 그렇듯 각 항목 옆에 있는 공란들을 필사적으로 적어 내려갔다. 회사 전략과 상사의 목표를 연구원 마냥 분석하고 수립한 나의 업무목표를 달성했는지 따져보았다. 노트북 화면에는 수어 개의 파일이 띄워졌고 마우스와 키보드 자판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그렇게 매의 눈으로 초 집중을 하며 빈칸을 채워가던 중, 순간 머릿속에 웅 하고 종이 올리는 듯하더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날카로운 질문과 함께.


'잠깐, 내가 10년 동안 이 행위를 매년 해 오고 있었단 말이야? 회사를 위해 이리도 정교하게 계획을 짜고 리뷰까지 하고 있는데, 나를 위해서는, 내 성장, 경력에 대해서는?


세상에. 마상에. 단 한 번도 없었다. 정작 '나'를 위해서는 이 모든 절차를 단 한 번도 행하지 않았던 거다. 빈칸들을 성과들로 채우며 위로 한껏 솟았던 어깨가 한순간에 아래로 힘 없이 떨궈졌다. 10년 전, 아니, 5년 전, 바로 작년부터라도 나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성과평가를 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매섭게 밀려왔다. 갑자기 수년간의 시간들이 허무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한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시간은 그때도 흘러가고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에 다시 힘을 쥐고는 혼잣말을 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제부터라도 나를 주제로 올려놓자. 나의 성장, 커리어를 위한 목표를 잡고, 계획을 세우자. 그리고 점검과 평가까지 하자.'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A4 용지 한 장을 펼쳤다. 연필을 들고 업무 목표 수립 양식을 그대로 그려 넣었다. 그리고 공란을 채우기 시작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회사는 내 상사의 목표를 일부 베껴서 적으면 그만이었다. 하나, 오롯이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 지 정확히 그려내야 하니 백지를 앞에 두고 멍하니 시간만 흘려보냈다.


문득 과거에 경력개발을 주제로 들었던 강의 내용이 떠올랐다. 목표를 세우려면 나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 내가 추구하는 가치, 강점과 약점까지 먼저 파악해 보기로 했다.  


가치의 사전적 의미는 값어치 또는 인간의 욕구나 관심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나를 행동하게 하는 기준.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나의 모든 행동과 선택에 영향을 주는 것들이다. 어쩌면 이미 이 가치를 갖고 있는데 무엇인 지 알아채지 못했을 뿐일지도 몰랐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일까... 단어를 여러 개 적어 보았다. 협업, 용기, 겸손, 즐거움, 신뢰, 존중, 공감, 혁신, 도전, 친절, 유머, 열정, 성과, 성장.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이 가치들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떠올렸다.


다음으로는, 남들에게 자신 있게 내어 놓을 수 있는 성과, 가장 잘하는 일이 무엇인 지 적었다. 제일 즐겁고 열정적으로 임했던 순간들과 함께. 생각보다 잘한 것들이 꽤 많이 나왔다. 혼자 적으니 마음껏 지자랑을 할 수 있었다. 손으로 적다 보니 진짜 내 강점을 판별해 낼 수도 있었다. 더불어 앞으로 더 잘하고 싶은 일들도 나열해 보았다. 그걸 하기 위해 조금 부족한 것이 무엇인 지, 아쉬웠던 점이 무엇인 지도 적어내었다.


이제, 경력개발계획을 세울 차례였다. 어랏. 나의 가치, 강점, 약점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나니 이전보다 내 생각이, 의지가 더 또렷이 보였다. 6개월, 2년, 5년 내로 기간을 쪼개어하고 싶은 일을 적었다. 현재 소속된 부서에서 영역을 넓혀갈 것인가, 다른 직무를 해 볼 것인가, 혹은 회사 일이 아닌 그 무언가를 할 것인가.


이 모든 걸 적어내는데 생각보다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세 시간 이상을 책상 앞에 꼬박 앉아 있었다. 삶의 일부분인 '일'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나의 이정표를 정하는 일이니 당연한 것일지도. 물론 목표와 계획이라는 게 한 번 정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그래도 우선 방향과 어느 정도의 명확한 목표지점은 정해 놓으니 미래가 명료해졌다.  


이후, 회사에서 성과점검 시즌이 되면 이루고 싶은 목표에 어느 정도 왔는지, 트랙을 벗어나지 않았는지 체크해 보았다. 내가 가치를 느끼고 있는 지도 자문했다. 부족한 부분은 어떻게 채워야 할지 세부계획도 세웠다. 이를테면 강의 스킬을 높이기 위해 책이나 유튜브를 찾아보고, 강의 기회를 일부러 더 갖는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 연말에는 성과평가뿐만이 아니라 내 경력에 대한 평가도 하고 등급도 매겨 보았다. 당시 들었던 생각과 다짐, 각오 등도 간단하게 메모해 두기도 했다.




어느덧 10년째, 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확실히 달라지는 게 느껴진다. 회사를 위해 주어진 일만 하는 일원이 아닌, 나를 위해, 내 가치를 높이며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는 주체적인 사람이 되는 것만 같다. 실제 그런 사람이 된 걸 지도. 물론, 때로는 귀차니즘에 형식적으로 대충 끄적이고 만 날도 있다. 하나, 적어도 되돌아보는 단 몇 분의 시간은 가지게 된다. 또한 기록으로 남기다 보니 스스로 대견하기도, 아쉽기도 한 감정을 갖는 것만으로도 제 몫을 단단히 한다.


곧 연말이다. 회사에서는 여느 때와 같이 성과 평가표를 제출하라는 메일이 올 거다. 그때 나의 경력 평가표를 함께 꺼내 들 거다.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으니.  



어쩌면 '회사에서 성과평가 하는 것도 번거로운데, 혼자서 경력 평가까지 챙겨야 한다고?'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회사에서 주어진 일을 하다 보면 인정도 받고 승진도 하면서 경력이 쌓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가치에 부합하는 일, 잘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 지 명확히 아는 사람, 즉, 자신이 최종적으로 도착해야 할 지점이 어디인 지 알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과 외부에서 쥐어준 대로 떠밀려서 가는 사람의 미래는 확연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니 한 번 해보세요. 나를 위한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이뤄낸 성과를 되돌아보며 평가까지 하다 보면요. 발전되는 것은 당연하고요. 무엇보다 주체적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감까지 쌓여 간답니다. 결국 '나'라는 사람의 경쟁력, 가치를 높이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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