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유 Oct 17. 2024

일, 적어도 쪽팔리지 않게.


인사 업무를 맡은 지 2년 정도 될 때였다. '김 주임'이라고 불리던 시절.


사수인 윤 과장님이 팀장님께 보고를 마치고 돌아오는 모습이 영 시원치 않았다.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미간을 힘껏 찌푸리고 있는 게 보고가 잘 안 되었나 보다. 왼손에 들린 종이를 보니 빨간펜이 군데군데 보인다. 터덜터덜 걸어와 내 옆 테이블에 앉으시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리셨다.


"아, 쪽 팔리지만 않게 하자는 게 내 신조인데, 이런 걸 놓치다니. 으, 쪽 팔려."


건네받은 자료에는 빨간 펜이 평소보다 많이 그어져 있었다. 순간 내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확 달아올랐다. 대부분 내가 작성한 부분이었다. 굵고 움푹 파인 볼펜 자국에서 팀장님의 성난 목소리가 음성 지원되는 듯했다. '이런 것도 챙기지 못했어?!'


올해 직원 퇴직률을 정리한 표였는데 작년 대비 비교 수치가 없었던 거다. 퇴직률 상승으로 인해 관리와 대비가 필요하다는 주제의 보고서였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군데군데 오타도 눈에 띄었다. '심각해지고 이씀, 제도의 마련이 필료함.' 이런 것들이었다. 아, 정말 쪽팔려... 전체적인 기획안의 목적과 구성은 탄탄했으나 내용을 뒷받침하는 수치의 누락과 오타로 오점을 남긴 것이었다.


자리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과장님에게 다가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웅얼거렸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다음부터 제대로 챙기겠습니다..."


과장님은 고개를 돌려 멀뚱하게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더니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이미 보고는 됐고, 지난 걸로 마음 쓰지는 말자. 최종 보고자인 내가 챙기지 못한 거야. 앞으로 나도 좀 더 잘 볼게요."


나를 혼내지도,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죄송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배가 되어 돌아왔다. 얼굴이 벌게져서는 자리로 걸어와 앉아 보고서 문서를 열고 수정하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었다. 똑바로 하자, 제대로 하자.라는 다짐과 함께.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의 신조가 된 일의 기준. '쪽 팔리지 않게 일하자.'



처음에는 문서의 오타, 문장구성 등과 같이 단순한 것들에 집중했다. 보고서를 출력해서 틀린 곳이 있는지 훑어보고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은 고치고 또 고쳤다. 이메일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 잘 읽히는지, 누락된 내용은 없는지 다시 확인했다.

회의 전에는 말할 내용을 미리 수첩에 메모하고 연습까지 하고 들어갔다. 회의 안건과 관련된 정보는 미리 알아가기도 했다. 내 일인데 '알아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하기가 싫었다. 누가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자신 있게 답하고 싶었다.


스스로에게 쪽 팔리지 않고 싶었던 이유가 컸던 거였다. '조금만 더 꼼꼼히 봤다면, 다른 것도 생각했었더라면...'과 같은 아쉬움은 결국 나를 자책하게 만들었고 자신감도 낮아졌다. 반대로, 맡은 일의 과정 하나하나에 최선을 기울였을 때, 그래서 좋은 결과를 냈을 때 그 뿌듯함은 배가 되어 나에게 돌아왔었다.  




그때로부터 15년이 훌쩍 지난 지금, 팀장이 되어서도 쪽 팔리지 않 위해 매일매일 애쓰고 있다. 물론 항상 모든 일에 완벽함을 기하지는 못한다. 때로는 나태해지기도, 힘듦에 투덜대기도 한다. 그래도 스스로에게 수시로 묻는다.


'이 일을 남에게 보여주기에 자신 있나? 완벽하다고 자부할 수 있나?'


그 과정이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 냈을 때 자신감이,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자신감이 곧 매일의 작은 성공으로 이어지고, 작은 성공이 모여 한 사람의 성과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작은 일을 맡겨도 완벽하게 해 내는 모습은 단연 눈에 띄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일 잘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일의 기획부터 마무리 단계까지 어찌나 꼼꼼하게 처리하는지 허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일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매 순간 직원을 평가하는 위치인 팀장의 눈에는 이런 일잘러들의 눈빛과 태도가 더욱 잘 보입니다. 결과뿐 아니라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의 태도나 의지가 남다르다는 것도 고스란히 느끼고요. 그럼, 팀장들은 생각합니다.

'중요한 일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맡겨봐야겠다. 업무 영역을 조금 더 넓혀줘야지.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나도 신경을 더 써서 잘 성장시키고 싶다.' 하고 말이죠.

일단 해보세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 집요하게 끝까지 완벽하게요. 나 스스로에게 쪽 팔리지 않게 제대로요. 그럼 어느새 일의 자존감이 올라가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최고를 바라지 마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의 최선의 것, 내가 아는 한의 최선의 것을 실행하고 또한 언제나 그러한 상태를 지속시키려고 한다. - 링컨 -
이전 06화 설마, 일이 항상 재미있을리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