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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유 Oct 21. 2024

지금 잘하고 있다면 '티'를 내어 봅니다.


커다란 회의실 안에 흰색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직원 일곱 명이 빙 둘러앉아 있다. 어두운 조명만큼이나 이들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김 차장은 자신의 앞에 놓인 노트북만 바라보고 박 과장은 프린트해 온 종이를 들척거리기만 한다. 떻게 하면 팀장과 눈 마주치지 않을까 안간힘을 쓰는 듯하다.


벽면에 붙여진 화이트보드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다. 바로 팀의 리더, 팀장이다. 칠판에는 '조직문화 개선 방안'이라는 큰 글씨 아래 여러 개의 단어가 적혀있다. 아마도 팀원들과 함께 논의한 내용들인 듯하다.


팀장은 팀원들을 주욱 둘러보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 여기까지 하죠. 이 정도 의견이면 꽤 많이 나온 것 같아요. 예정했던 한 시간보다 더 지나기도 했고, 다들 말도 없어지는 걸 보니... 하하."


팀원들은 그제야 굳어있던 얼굴 근육을 한껏 풀며 노트북을 덮고 일어날 채비를 했다. 드디어 아이디어 감옥에서 풀려난 것이다. 팀장도 허한 마음을 뒤로한 채 칠판에 적힌 글자들을 지워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군가 손을 들더니 주변이 환해지는 게 아닌가. 1년여 전 입사한 김 주임이다. 김 주임은 자신에게 몰린 시선이 부담스러운 지 올렸던 손을 찬찬히 내리고는 팀장의 눈을 또렷이 응시하며 머뭇머뭇 입을 떼었다.


"저…. 그런데, 이건 어때요? 아까 박 과장님이 말씀하신 내용에서 조금 더 발전시키면 다른 방안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다른 회사 사례도 찾아봤는데요, 비슷한 키워드를 사용했더라고요. 프로그램들도 괜찮은 내용이 많고요. 제 지인이 마침 그 회사에 있어서 물어봤더니 직원들 반응도 좋다고 해요"


모두의 시선이 김 주임에게로 향했다. 팀장은 닫았던 마커펜 뚜껑을 다시 열고 김 주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생각을 막힘없이 말하는데, 심지어 의견이 기발하기까지 하다. 김 주임 앞을 보니 책상 위에 벤치마킹한 서류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회의 중 선배들의 이야기를 빼곡히 적어둔 노트도 눈에 띈다.


김 주임은 반짝이는 눈으로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였고 팀장은 보드마카를 열심히 굴렸다. 팀원들은 그런 둘을 영화 속 반전의 한 장면을 보듯 입을 헤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김 주임이 이토록 열정적으로 길게 말하는 모습은 입사 1년 이래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희귀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바로 얼마 전 우리 팀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김 주임 아이디어 내용도 뛰어났지만 내가 놀랐던 건 다름 아닌 태도였다.


김 주임은 사무실에 있어도 없는 사람 같았다. 출근할 때면 특유의 저음으로 '안녕하세요.(끝을 내리며)' 한 마디하고 자리에 앉아 점심시간까지 거의 말없이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에는 샐러드를 싸와 혼자 회의실에 들어가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다 한 번 직원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면 식판만 내려다보거나 사람들이 웃을 때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곤 했다. 하루 동안 김 주임 목소리 듣기란 회사 사장님을 마주치는 것만큼이나 뜸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김 주임이 일에 큰 애정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주어진 일은 성실하게 했으나 그 이상의 일을 시키기 주저하게 되는 아우라를 뿜어대기도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오해였단 말인가. 어쩌면 조용하고 정적인 것을 선호하는 김 주임의 성향이 그 열정을, 의지를 가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중, 오늘 팀 회의에서 자신의 숨겨왔던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무엇보다 모두가 그만두려 할 때 끝까지 답을 찾으려는 '끈기'를 보여 주었다. 신기한 건 이 단 한 번의 모습으로 내 생각, 시각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거다. 김 주임 옆에 한 문장이 추가되었다. '끈기 있는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 직장인에게 손꼽히는 역량 중 하나인 '신뢰'가 새겨진 것이다.





이후 더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다. 김주임의 모든 행동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뿌연 유리창을 뽀득하게 닦아내니 못 보던 것들이 선명하게 들어오는 것과 같다고 할까.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책상에 앉아 있을 때면 일에 온전히 몰입한 사람처럼 보였다. 화면을 바라보다 무언가 알아챘다는 듯 환한 표정을 짓더니 노트에 이것저것 신나게 적기도 했다. 자세히 보니 사람들과 소곤소곤 대화도 하고 때때로 웃음을 짓기도 했다. 걸음걸이 마저 자신 있어 보였다.


어느 날 아침엔 김 주임의 낯빛이 유독 창백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말을 건네니 돌아오는 답 또한 놀랄 노 자였다. '앗, 네. 내일 있을 교육 운영 준비가 덜 된 것 같아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밤을 새웠어요. 헤헤.'


갑자기 김 주임에게 미안해졌다. 가능하다면 그동안 오해한 점을 고개 숙여 사죄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 자신의 일에 욕심을 내고 완벽하게 해 내려는 사람을 못 알아보고 있었다니. 우리 팀에 숨겨진 보석이 여기 있다고, 빛을 보내고 있었는데 제대로 찾아내지도 못하고 있었다니. 한 팀의 리더, 구성원의 역량을 십분 활용해야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게 끝없이 부끄러워졌다.


김 주임은 나의 눈을 가리고 있는 어두운 색안경을 단 한 번의 모습으로 벗겨버렸다. 그런데 그때 그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김 주임의 끈기를 발견하는 데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까. 아니면 나와 함께 일하는 동안 영원히 그 빛을 비추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김 주임은 혼자서 나름의 방식으로 열심히 일하다가 인정과 칭찬을 받지 못한 채 오해 속에 시들어 버렸을 지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한 사람, 한 사람 더 세세히 바라보자. 선입견에 가려 의지와 마음까지 못 알아보진 말자. 김 주임에게 먼저 가서 얘기도 좀 더 많이 하고. 일도 좀 더 맡겨 봐야지.'




혹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내 자리에서 꿋꿋이 최선을 다 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상사가 인정해 주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한 적이 있나요? 언젠가 그래도 알아봐 줄 거라며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가요? 그럴 땐 일부러라도 티를 내어 보는 건 어떨까요? 용기 딱 한 스푼만 더해서요.

물론, 구성원들의 역량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평가하는 상사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사람인지라, 첫인상,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다른 동료들의 평판이 그들의 판단을 좌우하기도 하고요.

학창 시절 공부는 하루 열 시간 이상 자리에 앉아 외우고, 풀고를 반복해야만, 심지어 잠까지 줄여가면서 노력 해야지만 높은 점수라는 결과로 보이잖아요. 그런데 회사 일은 그에 비해 성과 내기가, 인정받기가 생각보다 수월합니다. 내가 맡은 일을 끝까지 해 내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그 모습을 슬쩍 드러내면 됩니다. 좀 낯 부끄러워도 말이죠. 보여주세요. 여러분이 그 누구보다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요.

물론 너무 대놓고 '나 잘났소.' 하면 당연히 비호감으로 비친다는 점도 잊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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