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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유 Oct 14. 2024

까다로운 상사를 만나셨다고요? 축하드립니다.


"아, 진짜 힘들어."

"왜? 무슨 일 있어?"


"우리 과장님, 장난 아니야. 오늘도 메일 하나 쓰는 것도 되게 뭐라고 하더라니까."

"와, 진짜?"


"응, 지난번에는 보고 자료에 들어갈 표 하나 만드는데도 항목의 표현을 바꿔라, 글자 크기를 줄여라 등등 하나하나 다 지적하더라고. 한두 번도 아니야. 정말 숨 막혀."

"…"



회사 탕비실 정수기에서 물을 뜨고 있던 중이었다. 구석에 놓인 소파자리에서 한숨 가득한 수다가 들려왔다. 발 끝을 들어 슬쩍 쳐다보니 올해 입사한 신입사원 두 명이 앉아 있다. 세상 다 무너진 표정들을 하고서... 아마도 그중 한 명이 상사 때문에 꽤 힘들어하고 있는 모양이다.






순간, 나의 주임 시절이 떠올랐다. 딱 그 신입사원들만 할 때였다. 당시 깐깐한 사수 때문에 매일이 갑갑했고, 동기들에게 사수의 흉도 꽤나 많이 봤. 그렇게라도 해야 속이 좀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사수 윤 과장님은 나에게 인사부서로 옮길 것을 제안한 분이었다. 힘든 상황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해 주신 분이라는 생각에 감사함이 한 스푼 얹어져서인지, 처음 뵈었을 때는 인상이 참 좋으셨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에서 푸근함까지 느껴졌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호탕한 성격의 톰아저씨 오버랩되어 보였다고나 할까.



그때는 몰랐다. 그 선한 외모 속에 숨겨진 바늘 침과도 같은 꼼꼼함 들을.


과장님과 함께 일하는 처음 한 두 달은 좋았다. 하루의 계획을 세우는 것부터 이 메일 쓰는 법, 폴더 정리 노하우까지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다. 입사 3년 차에 다시 신입사원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도 마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 마냥 '와~ 이런 방법도 있어요?, 감사해요.'와 같은 탄성을 질렀고, 그럼 과장님은 신이 나서 더욱 열심히, 자세히 가르쳐 주셨다.

어떠한 설명 없이 혼자 일을 쳐내야 했던 이전 부서에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안정감도 생겨났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 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온실 속에 놓인 듯 편안- 했다.


문제는 그 온실 안에서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세심하게 가꿔진다는 사실이었다. 날짜가 넘어갈수록 말로 표현 못할 갑갑함이 밀려왔다. 인사부서에서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정도의 일잘러에 완벽주의라는 소문을 듣고 난 이후로 더욱 그 강도가 심해졌다. 과장님과 일하며 쩔쩔매는 나를 다들 안쓰럽게 바라보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근무하며 만난 분들 중 꼼꼼함으로 1등인 분을 꼽으라면 두말없이 윤 과장님을 댈 것이다. 우주 최강 마이크로 매니저.


과장님에게 보고서를 검토받을 때면 긴장감에 식은땀부터 났다. 과장님은 안경 너머 보이는 작고 까만 눈으로 종이를 째려보고는 수정할 부분을 모조리, 깡그리 집어내셨다.


"음.. 김주임님, 이 글자 크기랑 저거랑 다르잖아요. 그리고 줄 간격을 좀 벌리는 게 가독성이 좋을 거예요. 표 안에 색깔은 연하게 바꿔주시고, 어! 여기 마침표는 빠졌네. 그리고... 이 문장에서는 너무 중복되는 단어가 많네요. 추상적인 표현도 쓰지 맙시다."

그 이름도 찬란한 빨간펜으로 주욱 주욱! 좌악! 그어대는 그 모습은 지금 떠올려도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쩝.


자존감 지수는 밑도 끝도 없이 떨어졌다. 내려가도 내려가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이 단번에 통과되는 경우가 가뭄에 콩 나듯이 했으니 말이다. 빨간펜만 그어진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을게다. 어찌나 날카로운 질문들을 하시는지, 꼭 애매한데 그냥 넘겼거나 준비하지 않은 것만 물어 대셨다.


허나, 그렇게 맨날 당할 내가 아니었다. 나의 전투심리가 매우 강하게 발동한 것이다.

내가 만든 보고서를 출력해서 과장님과 똑같이 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빨간펜을 들고 혼자 고치고 또 고쳤다. '어떤 질문을 해도 다 받아쳐 주겠다!'라는 심정으로 보고에 들어갔다. 필요한 정보들도 미리 찾거나 메모해 두었다. 더 이상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그때는 몰랐다. 그게 다 지금 그렇게나 강조하는 '자기 주도적 성장'이었다는 것을.






다행히도 이런 갑갑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적과 질문은 점점 줄어들었고, 일의 주도권도 점차 넘겨주셨다. 어떤 날은 팀장님이 지시한 업무를 혼자 해보라고 던지더니 나 몰라라 하시는 게 아닌가. 검토를 요청드렸으나, 한 번 쓱 훑어보기만 한 뒤 바로 직접 보고 드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횟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따뜻하다 못해 후텁지근했던 온실의 문이 점차 열리고 습도 제로의 살랑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과장님이 갑자기 3주 간의 휴가를 가겠다고 선언한 날이 있었다. 그것도 전략 수립이 한창인 11월 말이었다. ' 자료 취합은 물론 보고자료 작성, 미팅 참석까지 테트리스처럼 짜이는 시기인데 휴가를요?'라고 두 눈 동그래져 물어봐도 그저 특유의 푸근한 미소만 짓고 계실 뿐이었다.

모든 일을 혼자 맡아야 했다. 그 어떤 지시도 하지 않으신 채 과장님은 떠나셨다. 여태 해 왔던 일인데 뭐 그리 어렵게 생각하냐고, 할 수 있다는 말만 남기신 채.


사실이었다.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물론 부담으로 어깨의 근육은 돌덩이처럼 굳어갔지만, 내 실력 또한 그에 못지않게 단단해지고 있었다. 과장님의 마이크로 매니징과 하드 트레이닝, 그리고 나의 전투심리가 만나 나만의 튼튼한 보호막, 안정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책상 앞에 앉아 황당한 얼굴로 앉아있는 나에게 믿음의 눈빛만 날린 채 구름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휴가를 떠나던 모습을. 그는 진정 후배 양성조차 완벽하게 해내는 승리자였던 것이다.





여러분 중에서도 분명 이런 상사들을 만나게 되거나 이미 만나셨을 것입니다. 힘들고 괴롭기까지 할 겁니다. 그런데 깐깐한 잔소리들이 결국 내가 일을 잘할 수 있는 양분이 된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진심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사실 주변을 보면 본인 일 챙기느라, 혹은 귀찮아서 남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는 사람도 찾기 어렵거든요.

만약, 일 못하는 상사를 만났다고 해볼게요. 그분은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떤 것을 가르쳐야 하는지도 모를 겁니다. 혹은 그냥 귀찮아서 가르쳐 주지 않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작성해 온 보고서를 자신이 다 수정해 놓고는 공유도 해주지 않는 상사도 있을 테고요. 이런 분들과 일은 참 편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끝나니까요. 그런데 홀로 남겨졌을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업무를 잘하니까 지적도 하고 가르쳐 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잔소리하는 상사가 있다면 최대한 많이 배우세요. 그래, 너 잘 만났다. 하고 제대로 뽑아 먹으세요.

단, 여기서의 잔소리가 상사의 까다로움인지 나를 위한 가르침인지 잘 판단해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진심 어린 피드백인 지 구별해 내야 하는 거죠. 건설적인 내용은 마음껏 흡수하고 그렇지 않은 건 버리는 걸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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