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HR KPI 실무를 할 차례
이제 실무를 할 차례다.
HR KPI에 대한 이론은 완벽히 이해했으니 실행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
대리님이 주신 파일 중 ‘작성용’ 폴더를 살펴보기로 한다. 따닥.
‘여기 두 가지 자료가 주임님이 작성할 보고서예요. HR KPI가 전략기획실에 전달될 자료이고, Appendix는 참고용인데요.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각 사업장 인사 담당자들에게 취합 요청 메일을 보내는 겁니다. 그분들로부터 받은 숫자와 정보들을 해당 양식에 정리하면 끝.
담당자들과 주고받았던 이메일도 폴더에 함께 넣어 두었거든요. 열어보면 이메일 내용은 물론이고 수신자, 참조자 리스트가 있으니 그대로만 하면 됩니다. 주임님 실력이면 이 정도야 뭐, 금방 할 수 있을 거예요~’
본인이 갖고 있는 폴더를 내 노트북에 통째로 옮겨주며 하셨던 말씀이다. 파일만 제대로 살펴봐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뉘앙스와 함께.
사실, 이곳에서 일하며 특이하게 여겼던 점 중 하나가 있다. 열 중에 여덟은 이메일로 소통한다는 사실. 물론 미팅이나 전화통화도 잦았지만 중요한 안건들은 대부분 이메일 속에서 다뤄졌다. 관련된 사람들을 수신자와 참조자 리스트에 모조리 넣어서. 이곳, 인사에서도 이메일 소통은 만만치 않게 빈번한 듯 보였다.
그래, 이메일이 답이겠구나. 열어보자.
수신: (현장 인사 담당자)
참조: (소속 팀장)
안녕하세요.
2분기 KPI 실적과 코멘트 작성을 요청드립니다.
각 항목의 담당자께서는 첨부를 참고하시어, 8/11(화)까지 전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퇴직률 : 김지영 대리
2. 공석율 : 현장 A 김지환 선임, 현장 B 최영순 과장, 본사 김영우 대리
3. 본사 Payroll (%) : 이현정 대리 (직원 만족도 조사 결과 참고자료로 취합받습니다)
관련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제게 문의하여 주시기 바라며,
기한 내 자료 제출을 다시 한번 요청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한승민 드림
좀 더 다듬을까 하다 말았다. 뭐 하나 걸리는 것 없이 잘 작성된 메일이었고, 처음 하는 일이니 기존 것 건드리지 말자라는 심사였던 거다. 취합 날짜와 발신자를 내 이름으로 바꿨다. 그리고 발송.
몇일 뒤, 날짜에 딱 맞춰서 보내주시는 분도, 혹은 기한을 넘겨서 제출하신 분도 있었다. 루틴처럼 쳐내던 별 것 아닌 일인 듯 그 어떤 질문도 의견도 없었다. 다행.
일단 정리만 하자 싶었다. 메인자료와 참조자료 두 양식의 빈 곳에 취합한 숫자와 코멘트를 그대로 붙여 넣자. 뭐야, 별로 어렵지 않네.
자료를 완성한 뒤 대리님께 들고 갔다.
“대리님, KPI 자료 취합 완료 되었습니다.”
“오, 이번엔 기한 맞춰서 다들 제출했나 봅니다.”
“넵.”
“그래요. 봅시다. 음… 일단 자료는 깔끔하게 잘 정리된 것 같고… 이번에 현장 쪽 퇴직률이 좀 높게 나왔네요? 혹시 특별한 사유가 있다고 하던가요?”
헉. 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재빨리 코멘트 란을 살펴보았다. 그 어디에도 사유는 적혀있지 않았다. 머뭇대는 모습을 보자 대리님은 담당자에게 얼른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인사기획팀 한승민 대리입니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KPI 자료를 보니 퇴직률이 좀 높게 나왔던데 이유가 있을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세부 자료 좀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얼굴이 벌게졌다. 나는 왜 숫자가 튀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을까. 의견이 적혀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겼던 걸까. 앞으로는 기계처럼 일하지 말자라고 다짐했건만. 또다시 시키는 일만 하는 수동적인 직장인이 되어버렸던 거다.
이날 이후, KPI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
자료를 종합해서 보고한다는 건, 그 일이 곧 ‘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했다. 아무리 남이 작성해서 보내왔다 하더라도. 담당자가 보내온 숫자와 의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공란에 입력만 하는 게 아니라, 전후 숫자들과 비교하여 특이사항이 있는지 확인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수치들은 두 눈 딱 감고 담당자에게 물어봤다. 이렇게…
“대리님, 안녕하세요. 인사기획팀 김지유입니다. 저... 오전에 보내주신 KPI 퇴직률 관련해서 궁금한 점이 있어서요. 지난번보다 재직자 수가 줄었던데 TO 가 축소된 걸까요? 퇴직률에 영향을 준 것 같아서요. 아, 네네. 이번에 제가 처음 맡게 되어서 종종 여쭤볼 것 같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좀 없어 보이긴 했지만, 나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솔직히 드러내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래야 완벽히 소화될 때 까지 물어볼 수 있기에. 뭐가 잘되었고 안되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기에.
사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긴 했었다. 자료를 작성한 지 두 번째 즈음이었던가. 대리님이 나더러 상무님 보고를 직접 하라고 지시하신 것이다. 물론 본인은 같이 배석할 테니 안심하라는 멘트와 함께. 쩝.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불만도 꿈틀거렸다. 하지만 욕심도 났다. 제대로 하고 싶었다. 내 입으로 보고를 직접 해야 한다니, 자료를 더 속속들이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다짐도 품었다.
대리님의 고도화된 전략이었을까. 보고서가 차츰 풍부해지기 시작했다. 담당자가 보내온 수치 외에 그 안에서 찾은 인사이트나 사유 등을 파악했고, 정보들을 더하게 된 것이다.
직원 만족도 조사 문항에서 ‘성장 지원’ 관련 문항이 낮게 나오면 교육 담당자를 찾아갔다. 교육 형태별 진행 실적을 알아봤고 승진자 양성과정 횟수가 축소된 점을 자료에 언급했다. 본사 팀장 포지션에 공석이 발생했을 때엔 자리의 중요도나 전사에 미치는 영향, 충원 예상 완료일까지 알아봤다. 공석률과 누가 나간 자리인 지만 간단히 기입되어 있던 보고서가 더 세밀해진 것이다. 자료만 보더라도 전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임원 보고를 직접 할 때의 장점이 또 한 가지 있었다. 상사의 의중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된 것.
상무님이 던지시는 질문이나 의견을 직접 듣고 답을 하다 보니, 무엇을 더 준비해야 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 메모해 두었다가 다음번 보고 때 해당 내용을 미리 준비했다.
예를 들면, 분기 별 수치만 보고해 오던 중, '월별 추세가 어떻게 되나요' 리고 질문하시면 얼른 수치를 전달함과 동시에, 다음번 참고자료에 추가하는 식이다. “정규직은 한 명 퇴직할 때 퇴직률이 얼마나 높아지는 거예요?”라고 질문하면 ‘퇴직률 Impact : 정규직 1명 퇴직 시 0.2%, 비정규직 1명 퇴직 시 0.05%’를 보고서에 미리 입력해 두기도 했다.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쪽 팔려서 인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주임 나부랭이가 존심은 또 강했던 게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보고서와 함께 내 실력도 함께 우상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사의 주요 성과지표들을 숫자로 확인하고 그 배경과 영향까지 종합적으로 파헤치다 보니 시야가 넓어지고 있었다. 우리 회사의 인사 현황이 한눈에 들어온 것은 물론, 조직의 규모나 구성, 각 부서의 업무들까지 자연스레 파악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거다.
사실, 인사 실무 능력을 높이게 된 뿌듯함도 있었지만, 내가 한 일을 직접 보고하고 인정받고 있다는 기쁨이 더 컸던 것 같기도 하다.
책을 눈으로만 읽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천지 차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일도 마찬가지다. 이론이나 정보로만 듣는 것과 실제 해보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제 자리에 머무느냐, 앞으로 더 발전하는 것이냐에 대한 차이인 거다.
기회가 있으면 일단 해보자 다짐해본다. 물론 긴장되고 부담되겠지만, 모든 실력은 해 봐야 느는 것이니.
그나저나 이제 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제 뭐든 잘 할 수 있을꺼라는 자신감이 조금씩 생겨난다.
인사 일이 나한테 좀 맞는 것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