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R Project 업무의 시작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간다. 인사라는 세계에 발을 내디딘 지.
나의 사수, 대리님과 한 팀이 되어 업무의 대부분을 지원하고 있다. 내가 전면에 나서서 도맡는 일들도 여럿 생겼다. 하지만 아직까지 ‘참조자’ 로만 자리하는 일이 딱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인사 프로젝트. 업무 내용은 익히 알고 있다. 올해 초에 설명은 들었으니.
‘인사 프로젝트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 이메일은 계속 공유할게요. 우선, 본문 내용부터 자세히 읽어보고 첨부되어 있는 자료도 차곡차곡 모아둬요. 1년 동안 수립부터 운영, 클로징까지 챙겨야 하는 업무라 흐름을 잘 봐야 하거든. 우리 파트에서 스폰서인 상무님과 리더들 사이에서 중간 다리 역할이 중요하기도 하고.'
그렇게 달력 열두 장이 넘어갈 때까지 내 이름은 늘 '수신' 아랫줄에 위치한'참조' 란에 들어가 있었다. 전달되는 메일은 유심히 읽어보고 자료도 하나의 폴더에 잘 모아두었다. 그리고 들었던 생각. 정말 많은 일들을 하는구나, 이렇게 양 쪽의 상황을 잘 살피면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다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구나.
현재까지 파악한 우리 파트의 역할은 다음과 같았다.
매해 초 새로운 프로젝트 수립을 위한 자료 분석과 임원 보고
프로젝트 리더 선발과 멤버 모집
프로젝트 브리프(Project Brief) 취합, 임원 보고
분기별 진행현황 취합, 임원 보고 (Progress Update)
최종 리뷰 취합, 임원 보고 (Closing)
이것만 봐서는 에이, 뭐야. 취합과 보고의 연속이잖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취합’이라는 일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지난 KPI 보고 때 겪어봤지 않았는가. 취합하는 사람은 실제 자료를 작성하는 사람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완벽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대리님은 리더들에게 프로젝트에 대한 피드백을 정기적으로 공유했다. 인사 최고 임원인 상무님을 비롯한 경영진이 지적한 의견들이었다. 내용의 경중에 따라 방법은 달랐다. 때로는 미팅을 통해, 때로는 이메일로.
이는 인사 전체의 업무를 속속들이 파악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각 프로젝트들이 잘하고 있는 점과 미진한 사항, 개선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피드백을 상세히 적어야 했으니. 나는 내용을 읽고도 모르는 부분이 많았던 터,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 여겼다. 게다가 프로젝트 리더는 대부분 높디높은 팀장님들. 그분들께 주임 나부랭이가 이거 더 잘 봐달라, 저거 좀 더 수정해 달라 요구하는 건 도리가 아닌 듯싶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대리님이 자리로 오시더니 흠흠 거리신다.
뭔가 업무를 더 줄 때 하시는 제스처인데, 뭐지?
“흠흠. 김 주임님?”
“네!”
“인사 프로젝트는 이제 주임님이 해도 되겠는데요?”
“네, 제가요? (이걸요? 왜요? 까지 말하려다 간신히 참았다.)
“인사 업무도 어느 정도 익혔고, 이메일도 곧잘 쓰고, 미팅 회의록 작성도 수준급이고.”
“아…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제가 상무님의 피드백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요? 팀장님들께 이 자료, 저 자료 작성해 달라 해야 하고… 또...”
“그 부분은 걱정 말아요. 상무님 보고에 같이 들어가고, 메일 본문도 검토해 줄게요. 그리고 이메일 보낼 때 저를 참조로 넣고요. 혹시 늦게 보내는 분 있으면 얘기하시고. 내가 바로 쫓아갈 테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대리님은 이때다 싶은지 자료를 불쑥 내밀며 말씀하셨다.
“자, 그럼 바로 시작해 볼까요?”
“네… 예?”
“지금 12월이잖아요. 프로젝트 제안부터 시작해야지.”
“아… 네…”
“자, 여기 작년에 작성했던 자료인데요. 우선 사내, 사외 정보들을 종합해 봐야 해요. 인사 정책들이 회사 전략과 성장을 얼마나 잘 지원하고 있는지, 내 외부 상황을 고려해서 더 필요한 건 무엇인 지 파악할 수 있거든요.
올해 프로젝트 성과는 정리되어 있고... 주임님은 나머지 숫자들을 좀 알아봐 주세요. 통계청이나 언론기사들을 검색해 보면 될 거예요. 아, 그리고 인사 관련 항목들도요."
대리님이 건넨 종이를 살펴보았다. 분명 예전에 메일로 받았던 문서인데 왜 이리 새로워 보이는 걸까. 당시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쭉 읽어 내려가던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직접 작성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기니 완전히 달라 보이는 거다. 이리도 다양한 항목들이 있었나, 몇 개 안 되는 것 같았는데... 다시 한번 살펴보자.
외부: 경제 성장률, 달러와 오일 가격, 금리, 소비현황, 실업률, 퇴직률, 노동법 시행 현황, 동종업계 급여현황, 성장률
내부: 우리 사 매출, 이익, 성장전망치, 신규 사업 계획, 퇴직률, 공석율, 직원만족도 조사결과 등 KPI 실적, 핵심인재 승진율, 교육 현황 등
자료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나를 보고는 대리님이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항목들이 꽤 많죠? 검색해 보다가 잘 찾아지지 않는다거나, 작성하는 방법을 모르겠으면 언제든지 얘기하세요. 처음이니 시간이 좀 오래 걸릴 수도 있겠지만, 다 할 수 있을 거예요. 작년 자료를 보면 각 항목들이 프로젝트와 어떻게 연계되었는지 알 수 있으니 먼저 잘 살펴보시고. 아직 2주 정도 시간이 있으니 이번 주에 1차 확인하고, 다음 주에 보완하는 걸로 합시다."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은 했지만 어깨가 아래로 축 처지는 건 숨길 수 없었다. 새로운 일은 언제든지 반기리라 다짐했건만 이번엔 좀 달랐다. 어려워 보였다.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다가왔다.
무엇보다 업무량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사실 작성해야 할 양은 딱 두 페이지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걸 위해 일주일은 꼬박 야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푸념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 한시라도 빨리 시작해야 한다.
뭐부터 할까. 아, 데이터부터 받아두자. 메일함을 열였다. '편지 쓰기'클릭.
'안녕하세요, 대리님. 인사팀 김지유입니다.
인사프로젝트 수립을 위해 인사 항목 몇 가지를 작성하고 있는데요....
...'
메일을 보내고 난 뒤 잠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참조자로 머물던 1년에서 이제는 업무의 선두에 서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두렵지만, 부담되지만, 어려울 테지만, 또 다른 경험을 쌓게 되는 것일 테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내 앞에 놓인 일들을 해 나가며 천천히 한 계단씩 오르는 중이리라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