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 프로젝트 실무
프로젝트 멤버는 수월하게 모아졌다. 인사부문 대리 이상의 직원들은 프로젝트 한 개 이상에 참여해야 한다는 상무님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안 비밀. 소속 팀장이 멤버로 들어오라는 반 강요가 있었다는 것도 안 비밀.
이제는 프로젝트의 수장인 리더들이 행동을 개시할 차례다. 그리고 나는 그 분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이드를 드려야 한다. 먼저 작년 이맘때쯤 대리님이 보냈던 메일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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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드디어! 프로젝트 멤버가 모두 모집되었습니다.
적극 지원해 주신 멤버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각 리더분께서는 프로젝트 브리프(Project Brief) 초안을 작성하신 후, 멤버분들과의 킥오프(Kick-off) 미팅을 통해 조율 및 최종 확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작성 양식은 첨부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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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ck-off 미팅이라, Project Brief라..
정식 프로젝트를 수행해 본 적이 없는 나에겐 모든 단어가 생소했다. 인터넷 검색부터 시작.
Project Kick-off 미팅이란
프로젝트를 공식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이해관계자들이 모여 방향과 기준을 맞추는 첫 공식 회의임
Project Brief 란
프로젝트의 목적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요약 문서로, 아래의 내용들이 포함됨
- 프로젝트 도입 배경, 현재(As-is)와 변화(To-be)하고자 하는 모습
- 프로젝트가 사업에 주는 재무적 또는 비재무적 이익과 산출물
- 수행할 범위에 해당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 전제조건 및 리스크
- 참여 멤버와 이해관계자
- 진행 일정, 비용
- KPI
- 프로젝트 평가 그룹
메일에 첨부된 파일을 열어보니 인터넷에서 본 항목들이 모두 담겨있다. 한 해 동안의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이 정도로 체계적으로 준비하는구나.
Project Brief 내용도 찬찬히 읽어보았다. 핵심인재 양성, 직무스킬 향상, 업무단순화, 급여경쟁력 강화까지... 한 해 동안 인사에서 진행한 모든 업무들이 뺴곡히 담겨있다.
아직은 인사 경험이 짧은 터, 백 퍼센트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대략적인 흐름은 감이 잡혔다. 이제 취합 요청 메일의 발송 버튼을 누르자.
이후 각 프로젝트 리더 분들이 바빠졌다. 특히 처음 미션을 맡은 팀장님들이 더욱 그러했다.
'이전에 비슷한 프로젝트 자료가 있냐, 이 항목에는 뭘 작성해야 하냐. 이해관계자는 어디까지 해당되냐' 등 질문을 쏟아내셨고 덩달아 나도 분주해졌다. '아, 저도 잘 몰라요. 저도 처음이라서요.'라고 답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대리님이 건네주셨던 '프로젝트 관리' 책자와 인터넷을 연신 뒤졌고, 도움이 되는 내용을 전달드렸다. 예전 자료도 함께 공유하면서.
회의실 곳곳에는 멤버들이 삼삼오오 모여 논의하는 모습이 보였다. 리더가 작성한프로젝트 브리프를 두고 논의하는 중일 거다. 그들이 한 해 동안 꾸려갈 활동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문서이니. 이제 이 계획에 따라 움직이게 될 테다.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3개월. 이제 분기별 리뷰를 해야 할 시기다.
취합 요청 메일을 받은 각 리더는 그간 쌓아온 성과를 제공된 양식에 빼곡히 담아 보내주셨다. 프로젝트들의 진행현황, 각 성과의 증빙자료(evidence), 잘한 점과 부족한 점, 그리고 다음 분기 활동 계획까지.
이제 나는 이 정보들을 보고용으로 잘 정리만 하면 된다.
1년 동안 해온 취합업무인데 까짓것 금방 하지. 가벼운 마음으로 자료를 살펴보는데 난감함이 밀려왔다. 팀장님들이 작성한 자료에는 크고 작은 성과들이 죄다 모여있었다. 어떻게든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고심의 흔적들과 함께. 아, 이 많은 내용들을 한 페이지에 어찌 담지. 막막해 하던 차, 대리님이 다가오셨다.
"뭐가 잘 안 돼요?"
"아, 네... 팀장님들이 자료를 보내주시긴 했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아, 그렇죠? 팀장님들은 무엇을 했는지 최대한 보여줘야 하니까... 아마 작은 내용까지 싹싹 긁어서 보내셨을 거예요. 그럴 땐, 각 프로젝트 브리프에 작성된 활동목표와 계획에 해당되는 성과를 메인 페이지에 반영하고, 나머지는 참조자료, Appendix에 따로 빼면 돼요. 어차피 각 성과의 증빙자료도 첨부해야 하니까 그거랑 같이 묶어서요."
"아, 네... 그러면 되겠네요... 참, 그리고, 대리님. 팀장님들이 너무 길게 작성해 주셨는데, 이것도 다시 요약해야 하는 거죠?"
"그렇죠. 작년 자료들 참고해서 주임님이 먼저 작성해 보세요. 이후 분기별로 계속 해야 하고, 프로젝트 최종 클로징 보고서는 더 세밀하게 작성할 수 있어야 하니, 지금부터 연습한다 생각해 두면 좋겠네요~."
"아... 네.... 알겠습니다."
다행히 프로젝트 브리프가 워낙 잘 작성되어 있어서 그에 맞는 성과를 매칭시키는 건 금세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정해진 페이지에 간결한 문장들로 요약하는 것. 대리님이 작성한 자료를 보니 딱 한 문장을 읽기만 어떤 활동에 무슨 성과가 있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나도 그렇게 작성할 수 있을까?
이전 자료들을 모조리 출력했다. 비슷한 성격의 성과가 정리된 문장을 형관펜으로 표시했다. 유사한 결로 따라 하기 위해. 하지만 아무리 썼다 지워도 내가 작성한 문장은 어딘가 모르게 부족해 보였다. 조금 더 축약된 고급스러운 단어나 표현이 있을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 있니? 국문학과를 나왔어야 했나...
수 날 동안 자료와 낑낑대는 씨름이 이어졌다. 그리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정이 다가온 날, 나름의 노력을 쥐어짠 자료를 들고 대리님께 향했다.
"대리님, 1차 자료 작성했습니다."
"오, 벌써요? 수고했어요. 전체적으로 보고 피드백할게요."
결과는 어땠을까.
각 페이지마다 빨간펜이 한가득이었다.
처음엔 꽤나 속이 상했다. 최선을 다한 건데 이렇게 난도질을 당하다니.
프로젝트 목표에 부합하는 성과들은 잘 구분했다고 하셨다. 그러나 단어와 문장을 꽤나 많이 보완해야 한다고. 솔직히 이해만 잘되면 그만이지, 언론사도 아니고 이게 뭐가 그리 중한가 싶은 마음도 튀어나왔다.
하지만 문서로 첫 보고가 이뤄지는 업무인만큼 무시하지 못할 영역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회사 일이란 원래 이런 것인가. 예상치도 않았던 곳에서 나의 부족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
인사팀에 온 지도 1년 반.
이제 웬만한 일은 다 할 수 있겠다 자만했었다. 프로세스와 방법은 완벽히 알고 있었으니.
그러나 이 생각이 얼마나 성급했었는지 깨닫는 순간을 마주한 것이다.
내공을 더 쌓아야 한다.
조금 더 겸손해 지자.
그리고, 더 배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