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인사에 온 지도 2년. 나는 그 사이 대리로, 한 대리님은 과장으로 진급을 했다. 나는 인사기획파트의 대부분의 실무를 맡고, 한 대리님은 회사의 전략 프로젝트 TF로 파견되어 있는 상태.
어느 날, 과장님이 꽤나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김 대리님, 잠깐 얘기 좀..."
"네, 과장님."
뭐지, 뭔가 심각해 보인다.
자리로 가까이 다가가니 손에 업무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서류도, 수첩도.
그럼 일 얘기가 아니라는 건데, 도대체 무슨 용건이란 말인가.
"회의실로 들어갈까요?"
"아. 네."
양쪽 어깨가 바짝 굳어진다. 긴장된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입가에 억지스러운 미소를 띤 채 두 눈만 끔뻑이는 나. 손에 쥔 펜만 돌리며 가만히 앉아 계신 과장님. 몇 초의 정적이 흘렀을까. 과장님이 입을 여신다.
"그, 대리님. 이번 겨울에 파트장 승진 면접이 있는데."
"아, 예." (직무가 바뀐다는 얘긴가.)
"내가 상무님한테 김 대리를 면접 후보자로 추천했어요."
(예? 에?)
"상무님이 흔쾌히 좋다고 하셨어. 추천서는 이미 제출한 상태고. 이제 곧 안내 메일이 올 거예요. 다면평가나 면접 안내문 같은 거요. 준비 잘하시고,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시고, 오케이?"
하, 난 또 뭐 안 좋은 얘긴 줄 알았잖아요. 왜 그렇게 비장하게 말씀하셔요. 물론, 많이 놀라긴 했어요. 승진 면접이라니요. 인사에 온 지 2년밖에 안되었는데 제가 자격이 있을까요? 그래도 추천까지 해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일단 열심히 준비해 보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나의 대답은 '앗, 네.' 가 전부였다. 과장님은 오케이라는 말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셨고, 회의실 문을 여는 가 싶더니 뒤돌아 서서 다시 말씀하셨다.
"잘할 거야. 그리고 파트장 승진 되면, 이제 나랑은 안녕이다. 김 대리도 파트 하나 맡게 될 테니까."
"아.. 일단 면접부터 잘 준비해 보겠습니다!"
과장님에게 서운함이 함께했던 걸까. 그 각 잡힌 목소리에.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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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이번 파트장 면접 대상자로 추천 및 승인되어 안내 메일을 드립니다.
아래 일정과 내용을 참고하시어, 각 과정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 10월: 후보자 추천 및 심사 (완료)
- 11/1~10: 360 다면평가 (본인, 상사, 동료, 부하직원)
- 12/2~4: 면접, 총 1시간, 면접관 3명(팀장 이상급) *개별 상세 일정 추후 안내 예정
- 12/23: 결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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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평소와 같이 자리에 앉아 아무렇지 않은 듯 이메일을 읽었으나 심장은 터질 듯이 나댔다.
다면평가는 나를 둘러싼 여러 계층 익명의 분들이 나의 역량, 행동에 대한 평가를 하는 거다. 각 2명에서 5명씩 다양하게. 갑자기 주변의 모든 분들에게 친절해지고 싶어졌다. 그동안 의도치 않게 마상을 준 분은 없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야말로 회개의 시간... 쩝.
그래봤자 어쩔 수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이제 와서 비디오테이프 감듯 되돌릴 수도 없는 거고. 그냥 오늘부터 조금만 더 잘하자 다짐하고 면접 준비를 시작했다.
면접은 약 한 시간 동안 진행된다고 했다. 그것도 1대 3으로. 부장에서 이사급 분들 세 명이 한 시간 동안 나 하나를 두고 질문공세를 펼치는 상황이라. 으. 생각만 해도 손금 사이사이 땀방울이 맺힌다. 긴장 앞에선 연습만이 살길이다. 입사면접 준비하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면접 예상 질문을 펼쳐두고 답을 생각해 보고, 적고, 무한 연습 하는 것. 그래도 이건 승진면접이잖아. 뭔가 다르게 준비해야 할 게 있을거야. 어쩌지.
갈곳 잃은 눈빛으로 모니터만 바라보던 중, 구세주처럼 나타난 분이 계셨으니, 바로 나의 과장님.
"김 대리, 이거. 면접 예상질문 족보야. 인사팀이라서 따로 주는 건 아니고, 전사에 이미 다 퍼져있는 거예요. 나도 대리님의 사수이니 이 정도는 챙겨줘야지. 그리고, 대리님이 지금껏 한 일 중에 가장 잘 한 성과와 대리님의 기여는 무엇이었는지, 어떤 성취감이 있었는지, 어떤 점이 아쉬웠는지도 생각해 봐요. 아! 다면평가 결과표가 곧 나올 텐데, 김대리와 상대방의 평가점수 차이가 큰 항목들 위주로 봐요. 거기서 공격을 많이 받을 테니까."
오.... 과.. 장.. 님.... 저 눈물 좀 흘려도 될까요?
너무 감사했다. 츤데레처럼 별 일 아닌 듯 툭 던져놓고 가시는 커다란 뒤통수가 왜 그리 멋져 보이던지.
그날부터 나의 면접 준비는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다면평가 결과표도 받았고, 면접 예비 질문도 내 손안에 있다. 이제 연습만이 살길이다.
두 눈을 또렷하게, 입가에는 미소를 장착하고, 명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퇴근 후, 거울 속의 나와 수백, 수천 번의 대화를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