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내가 인사팀에서 일을 하다니. 엘리트만 모여있다는 그런 곳 아닌가. 나에게 어떤 대단한 일들이 주어질까. 다른 부서에 있는 사람들은 모르는 그런 기밀 정보도 접할 수 있으려나. '
마케팅 팀에서 인사팀으로 자리를 옮기던 날, 머릿속을 몇 번이나 스쳤던 생각들이다.
솔직히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갔다. 전배 제의를 받았을 때 마케팅팀에 더 있고 싶었다는 대답이 무색하게도.
그렇게 한껏 부푼 마음으로 업무를 배워나갔고, 한 달쯤 되던 날 드디어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었다.
"김 주임님. 이제 직원 만족도 조사 준비 해야죠."
"아, 네!"
자리로 가니 동그란 테이블 위에 설문지로 보이는 자료가 잔뜩 쌓여있다.
"이거, 전국에 있는 사업장으로 발송을 해야 하는데, 우리가 박스에 포장해서 보내야 해요. 현장에는 인트라넷 아이디가 없는 분들이 많아서 직접 종이로 설문조사를 받거든요. 온라인으로 하면 대리 응답하는 경우도 종종 있고, 또 대충 하는 케이스도 있어서... 좀 번거롭지만 이렇게 하고 있어요."
에... 예? 직접이요? 우리가요? 아니, 제가요??
시선을 테이블 위로 옮기니 설문지 수백 장이 쌓여있다. 그 외 다른 것도 보이네. 저건 뭐지. 아주 예전, 학창 시절 시험 볼 때 썼던 그 OMR 카드 아닌가?! 그리고 컴퓨터용 사인펜까지!
이걸 각 설문조사 대상자 인원수에 맞게 하나하나 세서 하나하나 넣어서 하나하나 테이핑을 하고 문서수발실로 보내야 한다. 그럼 문서수발실에서 각 현장에 발송을 한다는 것.
아뿔싸. 나의 대단한 일은 어디로 간 거지. 그래도 이 황당함을 티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알겠습니다.' 하고 자료를 받아 들었다. 무려 백여 개 사업장 리스트와 각각의 수량들이 적혀있는 종이를.
그때부터 나의 단순 노동은 시작되었다.
동그란 테이블 앞에 앉아 하나하나 세고 넣고를 반복했다. 오다가다 지나가던 분들이 안쓰러운 눈빛을 날리는 듯했다. 상무님의 비서분이 오셔서 아주 잠깐 도와주고 가시기도 했다. 저기요. 도와주실 거면 끝까지 좀...
한 이틀 정도 걸린 것 같다. 자료를 세고 넣는 기계가 된 지.
손 여기저기에는 베인 자국이 가득했다. 거칠어진 나의 손을 볼 때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게다가 하루 종일 단순반복 작업을 하다 보니 머리까지 멍해지는 듯했다. 노동요라도 들었으면 덜 지루했을 텐데, 사무실이라 틀 수도 없고. 쩝.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설문조사를 모두 마친 사업장에서는 응답한 OMR 카드를 다시 파우치로 봉해 나에게 보내주었다. 스테이플러와 테이프로 봉해진 서류봉투를 하나하나 뜯어 한 곳에 모으기를 또다시 단순 반복.
허나, 이 메마른 사막에서도 오아시스 같은 한 줄기 따스한 빛이 있었으니. 바로 감사한 마음이 담긴 메모와 간식거리들이었다. 서류 봉투를 쫙 뜯어 OMR 카드를 털어내다 보면 나오는 선물들.. '주임님, 파이팅!, '레모나 드시고 힘내세요.', '졸릴 땐 맥심이 최고죠!.'
이제 이 OMR 카드에 적힌 응답 결과를 모아야 한다. 서.. 설마, 이것도 눈으로 보고 하나하나 적는 거 아니겠지. 하는 순간, 대리님이 뭔가 손에 들고 나타나셨다. 그건 바로 기다란 CD 케이스 만한 플라스틱 상자. 대리님은 이 OMR 카드의 전원을 켠 후, 노트북과 연결하셨다. 이후 적정량의 OMR카드를 잘 정렬하여 리딩 기계에 장착 후 스타트.
다닥닥닥 소리와 함께 한 장 한 장 스캐닝 된 OMR 카드는 아래로 떨어졌고, 모두 읽힌 데이터는 엑셀파일로 저장되었다. 오. 신기방기한 것... 선생님들도 우리 시험 결과를 이렇게 채점하셨구나. 싶다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어서 천여 장의 OMR 카드를 이 기계에 넣고 돌려야 한다. 대리님은 딱 한번 나에게 시범을 보이신 후 자리로 가셨다.
때는 저녁 일곱 시. 몇 명만 남겨진 고요한 사무실에 OMR 기계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다악 다악 닥닥.
다음 날, 키보드에 앉아 두 손을 쥐었다 폈다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OMR카드 뒷면에 적힌 주관식 내용을 하나하나 입력해야 하기 때문. 아마도 이때 나의 키보드 실력이 폭발했으리라.
직원들이 직접 손으로 남긴 의견들을 눈으로 보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그들의 생각이 더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했다. 한 직무를 너무 오래 해서 이동을 희망하는데 팀장님이 보내주지 않는다, 일은 자꾸만 늘어나는데 충원이 되지 않아 힘들다, 부서 간 업무 조율이 어려워 결정이 늦다. 등의 의견을 적을 때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반면, '함께 하는 동료들 덕분에 신나게 일하고 있어요.', '회사와 함께 성장하고 있어서 만족합니다.', '우리 모두 파이팅!'과 같은 문장과 함께 혼자 웃음을 짓기도 했다.
드디어 모든 작업이 끝났다. (이건 작업이라고 표현해야 맞다)
어떻게 하루하루가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움직였다. 나의 눈과 손을.
인사팀에 오면 뭔가 고오급지고 그럴싸한 일들을 많이 할 거라 기대했다.
오산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이런 단순 반복의 업무들을 하고 있었다. 인사카드 입력, 데이터 정리, 명찰 작성 등... 물론 그중 내가 맡은 업무는 극한 단순 업무이긴 했지만. 흠.
좀 열이 올라오긴 했다. 이러려고 여기 왔나 하는 생각이 수십 번 밀려왔다. 그래도 어찌하리. 이것만 계속하는 건 아닐 테니. 꿋꿋하게 견디자. 라며 부정적인 생각을 억눌렀던 것 같다.
그때는 몰랐다.
OMR 카드와 설문지를 붙들고 있던 시간이야말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라는 인사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순간이라는 걸.
지금 돌아보면 그 단순한 노동이 나를 인사라는 세계로 데려온 첫 관문이지 않았을까.
입사 1년 차, 인사팀으로 전배온 후 처음 맡게 된 업무가 직원 만족도 조사였어요.
이번에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인사 정보를 얻기보다는, 인사 업무의 숨겨진 이면, 리얼함을 함께 아실 수 있도록 적어 보았습니다^^
다음 화에는 김 주임이 파트장으로 승진하게 되는 스토리가 찾아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