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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 면접은 한마디로 망.했.다.

by 리유

드르륵. 자동 유리문을 지나 오른쪽 복도로 향했다. 들어서자마자 엄습하는 무거운 공기. 이곳은 독서실인가. 가뜩이나 긴장되는데 심장이 더 쪼여온다. 면접실로 배정받은 이곳은 다름 아닌 사장님 직속 임원 분들이 모여계시는 구역. 왜 하필 이쪽 회의실로 배정되었을까. 혹시 승진 면접을 맡고 있는 최 대리님이 나를 미워하는 건 아닐까.


"김지유 대리님."

"네!"


회의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이 주임님이 나를 부른다. 내가 들어갈 면접실의 운영을 맡으신 분.


"그.. 김 대리님, 면접이 조금씩 미뤄지고 있어서요. 한... 30분 정도 더 대기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세요?"

"아, 네. 그럼요. 여기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면 되는 거죠?"


문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면접 분위기에 익숙해질 겸, 긴장도 풀 겸,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그동안 수 백, 수 천 번 연습한 예상 답변을 한 번 더 복습해 보기로 하자.

가만있어보자, 그나저나 면접이 길어진다니. 예정된 한 시간보다 더 길어진다니. 면접관 세 명에 후보자 한 명이 들어가는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질문을 하고 있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질문폭격에 시달려야 한다는 말인가.


'주임님 들어갈 면접실 팀장님들 장난 아니라던데.'


엊그제 한 과장님의 장난스러운 말이 돌덩이가 되어 양 어깨를 턱 하고 짓누른다. 후보자와 같은 부서를 피해 면접관을 배치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압박면접의 대가들이 있는 곳에 배치되었다는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 대리님이 날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 그동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쩝.




드디어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잘하고 오세요.'라는 이 주임님의 응원에 '네에.. 헤헤..'라고 대답했다. 큰일이다. 벌써부터 염소 목소리가 나온다. 면접은 기세라고 했는데 그놈에 기가 자꾸만 어디론가 숨어든다.


똑똑.

면접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한쪽 면에 의자 하나 덜렁 놓여 있었다. 반대편 마주 보는 곳에 면접관 세 분이 앉아 계신다. 매우 근엄한 표정으로. 각 테이블 위에는 종이 몇 장과 연필 등 필기도구들이 보인다. 그래, 저 평가표에 핵심가치와 밸류가 적혀 있다는 얘기지. 거기에 부합하는 인재인지 평가할 테고. 나는 이제부터 회사와 일체화되는 거다. 가치와 밸류가 온몸 구석구석에 박혀있는 거다. 빙의를 시작하자.


면접관과 눈이 마주쳤다. 한번, 씩 웃어 보였다.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린다. 아, 보였을까. 민망하다.

괜찮다. 배에 힘 팍 주고, 힘차게 인사하자.


"안녕하십니까. 인사팀 김지유 대리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일단 면접에 초대된 것 축하드려요. 조금 긴장한 것 같은데, 평소 미팅에서 대화하듯이 편하게 참여하시면 됩니다. 자, 면접관 소개부터 할게요. 저는..."


세 분이 차례대로 소속과 성함을 말씀하신 후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하셨다. 모두 잘 뵙지 못하던 분들이다. 여러 개 층을 사용하고 있다 보니, 엘리베이터나 직원 식당에서 잠시 스쳤을지 모르겠으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뵌 건 처음인 듯했다. 에라. 차라리 잘됐다. 아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더 떨리는 법.


"먼저 자기소개부터 해주시겠어요? 경험 위주로요."


휴. 예상했던 질문이다. 당당한 자세를 취하면 긴장감이 덜어진다는 말은 또 어디서 들었던 터. 기에 눌려 앞으로 수그러진 어깨를 슈퍼맨 자세로 편 후 입을 떼었다. 외웠지만 외우지 않은 척, 수십 번 연습했지만 머릿속에서 막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는 척, 하며.


다행히 첫 질문에 대한 답은 무난하게 마쳤다. 손금 사이는 땀으로 여전히 축축했지만 입가의 근육은 좀 풀린 듯하다. 이후에도 질문들이 이어졌다.


'본인이 한 업무 중에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인지 사례와 함께 얘기해 보세요. 짧은 근무 기간 내에 여러 성과들을 내었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우리 회사 퇴직률이 얼마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요? 이번에 제출한 과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세요. 다면평가에서 본인이 낮게 평가한 항목이 있는데 이유가 무엇인가요? 파트 하나를 맡으면 어떤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등...


말로만 듣던 압박질문도 이어졌다. 왜 그랬는지, 그럼 거기서 무얼 느꼈는지, 다른 생각은 안 해봤는지, 어떻게 극복할 건지 등등등..


분명히 배웠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못을 하나 박고 그걸 향해 말을 이어가라고. 수도 없이 연습도 했다. 즉흥적인 질문에 조리 있게 답하는 연습을. 하지만 왜, 도대체 왜 때문에 내 말은 이리저리 갈길을 잃었던 걸까. 말을 하면서도 뭔 얘길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었다. 머리와 입과 귀가 각각 다른 사람의 것이 된 듯했다.




면접은, 한 마디로 망.했.다.

인사팀인데 불합격하면 이게 웬 망신인가. 이번 승진과정을 맡은 최 대리님 얼굴도 매일 마주칠 텐데 얼마나 민망할까. 수많은 생각에 그야말로 기가 팍 죽어버렸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끝났다.

자리로 돌아와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앉아 있노라니 누군가의 눈빛이 강하게 느껴진다. 한 과장님이다. 내 쪽으로 걸어오시는 듯하다. 이어서 볼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더니 한 마디 던지신다.


"대리님, 왜, 잘 안 됐어?"

"휴.. 네... 완전 압박 면접이었어요. 제가 너무 긴장도 했고..."


"그래? 어떤 질문을 받았길래?"

"준비한 것도 있었는데, 아닌 것도 많았어요. 특히 퇴직률 대안 생각해 봤냐고 하셨을 땐 완전 횡설수설..."


그렇게 한참 동안 면접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고 나니 기분이 좀 풀렸다. 생각해 보니 아주 못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의 하소연을 다 받으신 과장님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음... 잘 답변한 것도 많네. 괜찮아. 다 긴장해. 모든 질문에 완벽하면 그게 어디 파트장 후보자인가. 바로 임원 달지. 고만 축 쳐져 있고, 어제 내가 보내달라고 한 자료 있지? 그거 오늘까지다. 알지?"

"네..."



과장님 나름의 위로 방식이었을까.

이후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업무를 지시하셨다. 매일 쏟아지는 일들에 치여 쳐져있을 겨를 도 없었다. 그렇게 하루, 하루가 지나자 에너지도 점점 차올랐다. 한 번씩 스치는 면접 장면들로 움츠려 들었지만 금세 잊히곤 했다.



3주 뒤, 팀장님이 회의실로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김 대리님, 축하해. 이번 파트장 면접 합격했어요. 추진력, 커뮤니케이션 스킬 영역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 네트워킹은 개선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면접 결과표는 따로 메일로 보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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