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발령 업무에서 배운 키보드 빨리치기, 말 빨리하기, 문서수정 빨리하기
'인사기획파트 김지유 대리, 인사팀 인사운영 파트장 승진.'
입사 후 인트라넷에 내 이름이 두 번째로 올랐다. 인사팀으로 전배 했을 때 한 번, 그리고 지금.
얼떨떨했다. 3개월 전, 팀장님으로부터 책임 면접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교육에 입과했다.
세 번의 연수원 교육, 팀장님과의 주별 1:1 코칭, 이러닝 수강 등으로 중간관리자로서의 기본을 쌓았다. 일에 대한 전문성은 물론, 팀장과 파트원 사이에서 발휘해야 하는 적절한 리더십 스킬에 대해서도 배웠다. 또한, 면접과 다면평가에서 나타난 나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 지, 어떻게 개발해야 할 지도 깨우쳤다.
그렇게 책임이라는 직책을 수행하기 위한 (나름의) 만발의 준비를 마치고 공식적으로 승진 발령을 받은 것이다.
"과장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인트라넷에 이름이 올려진 직후 짐을 쌌고 멀지 않은 곳으로 이동하기 전, 나의 인사 첫 사수인 한 과장님께 진심 어린 인사를 올.렸.다. 과장님은 들었는데도 못 들은 척 하는 걸까. 한 동안 널따란 등짝만 보인 채 키보드만 두드리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래, 김 대리. 그동안 수고 많았다. 바로 옆 팀으로 가는 건데도 좀 서운하구먼. 그나저나 나랑 같이 일했다는 거 욕되지 않게 잘해야 한다. 알았지?"
과장님은 말끝을 흐리시더니 조용히 내 책상 위에 올려진 책꽂이와 파일들을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내가 옮겨줄게.'라는 말과 함께.
인사팀.
이름과 부합하게 'HR'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대부분의 업무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채용, 발령, 승진, 인사제도, 퇴직, 성과평가, 인재관리까지. 그중 내가 맡게 된 인사운영 파트는 발령, 승진, 퇴직, 인사제도 등 상당한 범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 가지, 아니, 두 가지 걱정스러운 점이 있었으니, 바로 새로 모시게 될 팀장님 또한 이번에 승진한 분이라는 것, 그리고 나와 함께 일할 파트원, 박 주임님이 나보다 세 살이나 많은 분이라는 점이었다. 회사에서는 연배보다 실력이 우선이라 하지만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으아. 어쩌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이 걱정들은 순식간에 잊혀 버렸으니...
바로 엄청난 이메일과 전화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
책상 정리를 마친 후 노트를 펼치자마자 전화가 시끄럽게 울려댔다. 아웃룩에 새 메일함의 숫자는 초 단위로 바뀌었다.
승진자 과정에서 배운 대로 파트원과 면담하면서 업무 파악도 좀 하고 팀워크도 좀 다지고 하려 했건만 다지기는 개뿔, 일부터 쳐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거다.
이메일과 전화의 주 내용은 '발령'에 관한 것이었다.
본사 내 약 2천 명의 직원들이 있다. 그중 2%만 발령에 대한 논의가 된다고 해도 40건이다. 한 명의 발령을 확장 짓는데 까지 적게는 두 번, 많게는 수십 번의 소통이 오고 간다.
최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A팀에서 퇴직자가 생긴다. 바로 공석이 발생한 거다. 소속 팀장은 인사팀(=나)에 메일을 보낸다.
'팀 내 공석이 발생했습니다. 채용 또는 사내공모 가능할까요?'
당연한 듯 하지만, 바로 절차를 진행하면 안 된다. TO를 확인해야 한다. 나는 조직도를 담당하는 분을 통해 충원이 가능한지 확인해 본다. 이 팀은 TO 가 넘치는 상황이다. 즉, 이번 퇴직자로 인해 인건비 대비 인원 수가 맞춰지게 된 것. 공석 충원은 불가하다. 이 내용을 팀장에게 전하면, 다시 묻는다.
'TO 증설을 위해 어떤 절차가 필요한가요?'
이제 조직 담당자에게 이 안건이 넘어간다. 그렇게 어찌어찌 TO 가 승인되었다 치자. 그럼 다시 나에게 메일이 온다.
'사내 공모를 희망합니다.'
그럼, 사내 게시판에 공모글을 올리고, 지원자를 추리고, 면담을 조율하고, 면담 결과를 확인한다. 적합한 직원이 확정되었을 경우 사내공모를 한 직원의 소속 팀장과 이동에 대한 논의를 하고, 또 그 자리 충원 방법을 확인하고, 이동 일자에 대한 확정을 한 뒤 최종 발령이 게시되는 것이다.
내 선에서 조율된 것 외에 팀장님으로부터 툭툭 들어오는 발령 건들도 있다. 임원 간 협의 하에 승인된 거라면서. 그럼 다 작성해 둔 발령리스트를 다시 수정해서 보고, 또 보고.
멀리서 보았을 때 '발령' 업무는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게시판에 띄워지는 고작 한 페이지의 발령지를 위해 수많은 이메일과 전화가 오고 간다는 사실을. 그 보다 더 자주 보고서를 수정한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도 이메일을 회신하고 삭제하고 옮겨두고를 반복한다. 전화벨이 울리면 재빠르게 받고 응대한다. 뭐랄까. 위에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테트리스 조각들을 모양에 맞춰 쳐내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나마 다행인 건, 정말 다행인 건, 나와 함께 일하는 파트원 박 주임님이 굉장한 실력자였다는 점이었다. 나보다 먼저 이 일을 해온 분인 만큼 내게 필요한 부분을 적시에 지원해 주었고, 전달한 일은 책임감 있게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나의 팀장님은 누구보다 일머리가 뛰어난, 전사에서 소통에 가장 능한 분이라는 사실.
그렇게 처음 맡은 파트에서, 키보드 빨리 치기를 배우고, 말 빨리하기를 배우고, 보고서 빨리 수정하기를 배워 나갔다.
파트원과 호흡을 맞추는 방식과 팀장님의 일머리도 함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조용한 전쟁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