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율 1위 국가
첫 강의, 아니, 첫 주부터 시원하게 쨌다. 출튀도 아니고, 무려 엘살바도르로 간다. 일주일치 강의를 통째로 내팽개치고.
기다리던 친구들아 미안하다. 1년 기다렸으니 1주만 더 기다려라. 내가 간다. 엘살바도르로. 걱정 마라. 그렇게 안 기다렸을 거란 거. 나도 잘 안다.
점수 깎일까 걱정은 하지만, 출석 따위 알 게 뭐란 말인가. 수강 정정 기간에 출석 부르는 깐깐한 교수의 수업이면 안 듣는 게 성적에 낫다는 논리로 무장한다. 무쇠보다 두꺼운 게 내 얼굴 가죽이다. 강렬한 엘살바도르의 햇살도 이 정도면 튼튼히 방어하지 싶다. 다른 건 몰라도, 더 타는 건 사양이다.
내게는 첫 번째, 그들에게는 세 번째 강의에서야 불쑥 얼굴을 비췄더니 교수 얼굴이 볼 만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라는 의문을 눈에 가득 담아 쏘아붙이고 있었는데, 당당하게 '굿 모닝' 외쳐주고 자리에 앉았다. 8시 강의인데 아무렴 굿 모닝이다. 아닌가..?
출발 시간을 잘못 계산해서 한 2분쯤 늦은 건... 비밀도 아니다. 어차피 나라는 인간은 45분 이상 집중하지 못해 고개를 꾸벅일 텐데, 2분 정도 늦게 듣는 게 더 효율적이다. 그날의 강의에서 난 기적적으로 졸지 않았다. 그 정도면 예의는 지켰다.
그저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들을 생각을 하니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에어컨도 안 쓰는 미련한 서유럽을 여행하다 전교가 냉장고인 미국으로 돌아왔으니 당연한 일이다만, 사실 정확히는 서늘한 북유럽을 여행하다 온지라 소름이 돋은 적도 없다. 아무렴. 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부모님께는 노르웨이에서 애틀랜타로 돌아오기 이틀 전 즈음, 그러니까 엘살바도르행 비행기 티켓이 너무 저렴하게 나와서 첫 주 수업을 건너뛰고 좀 다녀와야겠다고 말씀드렸다. 부모님도 미국에 계셨다면 등짝 꽤나 맞았겠지만, 너무도 안타깝게 두 분 다 한국에 계시는 걸 어쩌겠는가. 통화를 하며 나의 유일한 걱정은 나중에 결혼해 나올 자식이 나를 닮을까 하는 것인데, 물론 일단 상대부터 찾아야 하기에 무의미한 걱정이다. 결국, 몇 초도 안 지나 'Que sera sera' 외치고는 무책임하게 떠난다.
사족이 긴데, 긴 만큼 나로서도 염치가 없는 행동임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왕복 200불짜리 티켓을 두고 안 가는 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친구 몇에게 물었건만 고개를 저어주고 대꾸라도 해주면 양반이고, 보통은 그러려니 성의 없이 맞장구친다.
부럽다고 말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이제는 나를 무슨 서커스단 원숭이 보듯 보는데, 불과 2년 전의 나였어도 1년에 50개국을 여행하는, 비행기 싸다고 엘살바도르로 간다는, 도른자를 보면 비슷하게 반응했으리라.
여행을 하면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해 깨닫게 된다던데, 보아하니, 나라는 인간의 관성은 지독해 종 울리면 침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마저도 못하다. 저렴하다고 계속 떠나니 정작 저렴해지는 건 통장 잔고다.
대관절 비행기가 싼 것과 여행을 가는 것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가 싶겠지만... 사실 없으니까 하는 말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부모님은 이제 썩을 놈의 아들이 어디든 훌쩍 떠나는 것에, 정확히는 떠난다고 통보하는 것에, 익숙해지셨다. 성과라면 성과다. 자, 박수.
그래도 신경은 쓰였는지 - 최후의 양심 정도로 해두자. - 아무래도 어감이 부정적인 짼다, 내팽개친다 따위의 말이나, 만에 하나 출석을 부를 수도 있다는, 첫 주부터 진도를 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칭찬해... 살인율이 1위였으나 대통령이 갱 5만 명을 감옥에 집어넣어 이제는 안전하다는 게 불효자식이 전해주는 유일한 정보인데, 돌이켜 보면 안 하느니 못한 말이었다.
여행을 5월 초부터 계획했고, 티켓은 7월 초 아테네에서 파르테논 신전으로 걸어가는 길의 아침에 반쯤 충동적으로 긁었다는 건 여전히 비밀이다.
2026년 봄방학 계획까지 세운 아들이 통보마저 계획적으로 했으리라 의심은 하시겠지만 어디까지나 의심은 의심으로 그쳐야 한다.
통화에서 부모님이 유추할 수 있는 건 어련히 알아서 잘 다녀오겠지 정도의 정보뿐.
알아야 알려드리는데 엘살바도르는 정말 비행기 티켓이 저렴하게 나와 가는 거라 나도 내가 떠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알았다 한들... 아무렴 알아도 좋을 게 있고 나쁠 게 있는데, 좋은 게 좋은 거지 싶다. 여행하며 생겼던 모든 일들을 알게 되시면 분명 까무러치실 거다. 불법적인 일은 무단횡단 말고 하지 않았다 믿지만, 그럼에도 각종 편력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속 편하실 거다.
다녀온 지 한 달이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성적은 여전히 좋다. 결과적으로, 첫 주에 진도를 나간 건 교수님 한 분뿐이었고, 그마저도 복습 수준이라 아는 내용이었다. 더군다나, 요즘의 전공 수업에 가장 일찍 출석하는 학생은 나이니, 동태 썩은 눈으로 조는 친구들이야말로 엘살바도르 아니면 어디론가의 여행이 필요했으리라.
어디서 읽은 글인지도 확실치 않다.
엘살바도르 서쪽 해안이 서핑 천국이라길래, 서핑은 고작 2번 해봤으면서, 선명한 복근과 함께 파도를 가르는 상상을 하며 (물론, 난 복근도 없고 서핑도 고작 2번 했다.) 실실 웃고 거창하게 여행에 '쒀핑 트륍'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곤 떠났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나 서핑하러 가." 이런 느낌이려나. '그래서 어쩌라고.' 그냥 그렇다는 거다.
옥스퍼드에서 여름 학기를 보내며 18개국,
유럽 분교에서 1년을 수학하며 짬짬이 25개국,
이어 한국에 돌아와 10일 간격으로 몽골, 호주, 그리고 일본을 여행한 후, 다시 또 떠나 장장 54일간의 유럽 일주를 끝낸 뒤 미국에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지 겨우 이틀, 개강까지 그 이틀을 못 버텨 나는 다시 엘살바도르로 떠났다.
애틀랜타 공항으로 가는 길, 엘살바도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두 가지뿐.
전 세계 살인율 1위 그리고 법정화폐 비트코인.
모르겠고, 여행을 시작했으니 공항에서 가볍게 노숙부터 하고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