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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런던에 다시 올 수 있을까

by 노마드

”우리가 런던에 다시 올 수 있을까.” P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르겠어. 런던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나는 답변했다. P는 눈을 흘겼다. ‘그 말이 아니잖아.’ 힐난하는 모양새였다.


“아마 같이 다시 오는 건 어렵겠지.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이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거야.” 나는 덧붙였다. 솔직한 진심이었다.



“내일 저녁에 봐.” 수업이 없던 P와 A는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를 떠났다. 나는 수업을 마친 후 파리행 기차에 올라탔다. 파리 북역을 떠나 도버 해협을 건넜고 열차 밖은 어둠에 잠겼다. 잠시 졸았다 일어나니 킹스크로스 역이었다. 9와 4분의 3 승강장 사진을 한 장 찍고, 지하로 꺼져 내셔널 갤러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네와 쇠라의 그림을 눈에 담고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이미 타는 듯한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트라팔가 광장에서 P와 A를 만났다. 내가 던진 첫 질문도 그 노을에 관한 것이었다. “노을 봤어?” 우리의 대화는 겉돌았다. P와 A는 저녁을 먹기 위해 찾은 인도 식당에 대해 이야기하기 바빴다. 나는 테스코에서 5파운드짜리 밀 딜로 저녁을 때웠다. 프렛이었나 코스타 커피였나. 음료 한 잔을 들고 P와 A를 따라 밖으로 나오니, 광장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경찰에게 손가락질하며 길을 건너는 백발의 노인, 박물관 계단 아래 이리저리 널브러진 쓰레기들, 핸들과 손에 접착제라도 바른 듯 경적을 울려대는 차들과 코를 훅 찌르는 대마 냄새.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머릿속을 헤집었다.



“어디든 가자.” 우리는 빅벤으로 향했다. 화이트홀 거리를 지나 웨스트민스터 역의 회랑을 거쳐 좌측으로 꺾으니, 10년도 더 된 어린 시절에 보았던 빅벤이 거기 있었다. 다시 한번 대마 냄새가 스쳤고, 우리는 그렇게 강둑으로 걸어갔다. 그 모든 소음과 냄새, 겉돌던 대화의 조각들이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강둑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 템즈 강의 고요함은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생각의 실타래는 메츠에서 파리에서, 파리에서 런던까지, 킹스크로스역에서 템즈 강변까지 이어졌다. 머리가 복잡했다. P가 난간에 팔을 기대며 나를 툭, 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모든 게 흘러가네.” 나는 마음속에 떠오른 문장을 여과 없이 뱉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도대체.” P는 웃었다.


A는 우리의 대화에는 별 관심 없다는 듯, 강 건너편을 보며 무심하게 말을 뱉고 뒤편의 벤치에 앉았다. “강바람 때문에 추워. 오래는 못 있겠네.”


몇 분 후, A는 친구의 전화를 받기 위해 잠시 떠났고, 나와 P만이 남아 물끄러미 템즈 강을 바라보았다. 런던 아이는 자줏빛으로 점멸하며 다리 건너편의 물을 보라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빛은 머무르며 일렁일 뿐, 우리에게까지 닿지는 않았다.


P는 내가 답을 하든 말든 옆에서 끊임없이 재잘댔다. 그러다가도 내가 잠시 주의를 잃으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눈을 흘겼다. 나는 계면쩍게 웃었다.


“저 건너편 건물은 어디에 쓰이는 걸까?” “어렸을 때 왔을 때는 어땠어?”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다 나는 P에게 고백했다. 같이 다시 오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라고. P도 별다른 의미를 담아 질문을 던진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저 흘러가는 물을 바라볼 뿐이었다. 가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한 순간들이 있다고. 나는 변명했다.


“꿈만 같아. 우리가 오로라를 볼 수 있을까?” P가 물었다.

“보지 못한다면 다음에 떠날 좋은 핑계가 되겠지.” 한참을 침묵하다 나는 입을 뗐다.


“매번 떠날 생각만 하네. 어디 정착할 생각은 없어?”

“정착할 곳을, 혹은 정착할 사람을 찾지 못해 매번 떠나기만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변명치고는 썩 나쁘지 않잖아? 나는 머무르기 위해 떠난다. (I leave to settle down.)” 스스로도 믿지 않는 말을, 되지도 않는 말을 무책임하게 지껄이며, 나는 또다시 물러섰다.


P가 말했다. “우리가 런던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모르겠어.” 나는 답변했다.


잠시 후, 벤치에 앉아있던 A가 돌아와 말했다. ”이제 그만 갈까. “ 런던 아이는 그때까지도 자줏빛이었다.



2월의 어둠은 이미 런던의 하늘을 뒤덮었고, 빅벤의 시계 뒤 하얀 배경이 두드러져 보였다. 시곗바늘은 저 강물처럼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강둑을 떠난 우리는 세인트 제임스 공원을 가로질러 버킹엄 궁전 앞에 다다랐다. 말보로 거리의 푸른 다리에서는 런던 아이가 희끄무리하게 보이다 말았다. 마찬가지로 그 음영이 끝까지 가닿지 못했다.


P와 A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지만 나는 왠지 강물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나는 자홍빛 파문이 물을 가르고 번져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의미가 분명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학기 초, A와 P, 그리고 S는 이미 계획한 일정들을 취소하고 같이 여행할 의사가 없는지 내게 물었다. 룩셈부르크에서 가이드를 자처했던 게 좋은 인상을 남겼거나, 그다음 주 파리에서 함께 보낸 시간들이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파리에서 돌아와, 나는 A와 P에게 물었다. S는 포르투갈을 같이 가자고 했으나, 그 자신의 2월 초 일정은 이미 계획을 끝낸 상태였다. “어디를 제일 가보고 싶어?” A의 답은 예나 지금이나 파리였다.


P는 말했다. “나는 오로라가 보고 싶어. 오로라를 볼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어.”


오로라라. 버킷리스트에 추가할지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결국 넣지 않은 선택지였다. 나는 이루지 못할 꿈은 꾸지 않았다. 의지로 달성할 수 없는, 순전히 운에 맡겨야 하는 목표가 주는 불확실성이 달갑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염원은 늘 마음 한구석에 있었다.


“그래, 가자.” 내 대답에 P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소원 하나를 이루게 되겠다며 수줍게 미소 짓는 P의 모습은, 윤활유를 바른 들 하염없이 삐걱대는 문 같은 내게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나는 문을 열어젖히고 불확실성의 한가운데로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여정의 끝이 런던의 밤하늘처럼, 레이캬비크에서도 텅 빈 밤하늘을 보는 것일지라도...


그렇게 우리는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 편과 기차표를 예매하고, 아이슬란드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런던에 도착해 하루를 보내며 나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런던에서 가장 저렴하다는 호스텔은 닭장 같았고, 옆 건물에서는 광란의 테크노 파티가 펼쳐졌다. 벽이 진동했다. 나는 ‘인생 최악의 숙소’라며 문자를 보내는 A와 P를 찾아가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며 고개를 내젓고, 잘 자라는 말을 건넸다. “내일이면 그래도 아이슬란드잖아? 여긴 그저 피트 스탑일 뿐이야.”


비좁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침대의 삐걱거림에 오히려 감각은 또렷해져만 갔다. 왜인지 떠오르는 건 템즈강 위로 번져나가던 자홍빛 파문이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결코 손에 잡히지는 않던 그 빛. 그 빛이 떠올랐다.

템즈 강을 적시던 그 빛처럼, 태양은 강렬해 오로라는 떠올라도 결국 닿지 못하고 그저 하늘에 머무르다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오로라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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