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 하기 위해 다시 도전합니다.
“코레아우라”
“더 강하고 씩씩하게, 두 번째 코레아우라는 간절하게.”
“악센트 줄 부분 강하게 발음해야지.”
“시 낭송 너무 어려워, 이렇게 어려울지 알았으면 처음에 정했던 시로 할 걸 그랬어.”
가슴이 철렁했다. 어렵게 나가기로 결정해 놓고 너무나 많은 부담감을 주고 있었다.
욕심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했다. 많은 걸 요구하자 가을이는 고장 난 로봇이 되어갔다. 뚝딱뚝딱 범퍼링이 걸리는 고물 로봇. 이렇게 하다간 다 놓칠 것만 같았다.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자. 대회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했잖아.’ 항상 그랬다. 내 욕심의 게이지가 올라갔을 때 아이는 의욕이 꺾였다. 호기심에 빛나던 얼굴은 사라지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작년 시 낭송대회를 제안했을 때 가을이는 단번에 거절했다. 일주일 동안 개인 공부 면제를 걸었는데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올해는 가을이가 제일 좋아하는 게임을 미끼로 접근했다.
“가을아, 올해도 시 낭송대회 있는데 나가 보는 거 어때, 작년에 민찬이는 참가만 했는데 문화상품권 만원 받았대, 받은 상품권은 모두 현질 할 수 있게 해 줄게.”
가을이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참가만 해도 만원은 주는 거지?” “그럼, 장려상만 받아도 3만 원은 다 네 거야.”
우리는 한 달 전부터 분주했다. 신청서를 보내고 낭송할 시를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나라사랑, 평화통일을 주제로 한 시들을 찾아 5편을 프린트했다. 그중에서 가을이는 윤 정근 시인의 <눈삭이 꽃 당신>을 하겠다고 했다. 애달프고 구슬픈 시였다. 하지만 읽어볼수록 가을이와 맞지 않았다. 가을이가 낭송하는 이 시는 팥 없는 호두과자를 떠올리게 했다.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눈이 빠져라 시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유관순의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야무진 소녀가 유관순이 되어 시를 낭독하는 분위기. 번쩍. 이거다. 가을이는 영화 [영웅]을 좋아했다. 두 번이나 봤고 안중근의 책, 역사프로그램도 챙겨 봤다. 안중근을 주제로 하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까. 가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들뜬 마음으로 찾아 놓았던 영화와 뮤지컬 영상, 안중근의 자료들을 전했다. 안중근이라는 이름에 가을이의 눈은 반짝였다.
자료들을 보고 기본적인 뼈대를 만들어 시를 쓰고 읽어보면서 다듬었다. 중복되는 단어를 다른 낱말로 대체하고 통일감 있게 반복되는 구절을 생성했다. 반나절 이상 걸리는 긴 작업이었지만 가을이의 얼굴에 해냈다는 뿌듯함이 묻어났다.
“시간 아직 많으니 하루에 한 번씩 읽어 보자.” “아니야, 한 번 가지고는 안 돼, 3번씩은 읽어야지.” 그리고 본인의 휴대폰 배경화면에 시를 찍어 설정했다. 그래야 잘 외워진다고. 오, 본인이 쓴 시에 욕심이 살짝 생겼나. 좋은 징조였다. 하지만 개인 일정에 밀려, 때론 귀찮아서 하루에 한 번 읽은 것도 쉽지 않았다.
시낭송 일주일 전.
“가을아 , 시 낭송 실전처럼 한 번 해보자.” 시를 낭송하는 가을이의 모습에 기가 찼다.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않고 멈칫 멈칫. 감정이 뭔가요? 하는 목소리. “가을아 하루에 한 번가 지고는 안 될 거 같은데 3번씩은 연습하자.” 그리고 휴대폰으로 시 낭송 영상을 매일 촬영했다. 본인이 보고 스스로 느낄 수 있게. “가을아 이거 슬픈 시 거든 웃으면 안 돼.” “너무 빨라 조금만 천천히 낭송해 보자.” 3일을 남기고는 지적하지 않았다. “어제 보다 훨씬 나은데 그렇게 하면 되겠다.”
시 낭송 대회당일 날. 대회장에 가기 전에 가을이에게 당부했다. “처음 나가는 거니까 상 못 받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말자, 무대에 올라간 거 자체가 이미 훌륭한 일이야.” 가을이는 생각보다 덤덤했다. 오히려 내가 더 좌불안석이었다.
55명의 아이들이 차례차례 자신들이 준비해 온 시를 뽐내기 시작했다.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훌륭하게 낭송하는 아이는 감탄을 불러일으켰고, 떨리는 목소리는 지켜보는 나에게까지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준비하며 인내했을 시간을 알기에 모든 아이들이 대단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가을이의 순서가 다가왔다.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아이는 차근차근 시를 낭송했다. 평소보다 천천히, 차분한 모습이었다. 한 달여의 과정이 스쳐 지나갔다. 설렘, 좌절, 짜증, 뿌듯함과 함께 우리는 잘 이겨냈다. 무사히 잘 마쳤다는 시원함과 보람찬 마음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결과는 상관없을 거 같았다.
시상의 순간. 장려상, 동상이 수여됐다. “이제 마음을 비우자.” 남편에게 속삭였다. 동생 단풍이는 옆에서 자꾸 재촉하듯 물었다. “왜 형은 안 불러?” 그 순간 참가 번호 36번 가을이의 이름이 호명됐다. 와우, 금상이었다. 자작시가 플러스 요인이 되었던 거 같다. 상을 받고 내려오는 가을이는 겸손은 개나 주라는 듯 잘난 척을 해 보였다. “자작시가 나 혼자여서 상 받을 줄 알았어.” 평소 같았으면 겸손하라고 한 마디 해줬을 텐데 그 순간만큼은 내버려 두었다. 아이의 기쁨에 초를 치는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가을이는 한 단계 자존감을 업그레이드하며 10만 원의 상금을 손에 쥐었다. 그날 저녁 어느 때보다 해사한 표정으로 인생 첫 현질을 통 크게 결제했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엄마 금상은 내년에 참가 안 되지?” “2년 뒤에 다시 도전해서 대상 받아야지, 그러면 현질 30만 원어치 할 수 있어.”
그 자신감이 오래가길, 노력한 만큼 보상이 온다는 가치를 온몸으로 느끼길 바라며 그날 하루는 가을이의 헛소리를 마음껏 받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