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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다 Jul 25. 2024

엄마의 ‘갓 생’은 ‘어제 일’ 기록부터.

엄마 꿈이 뭐냐는 아이의 질문에 답합니다

“엄마는 꿈이 뭐야?”

가을이가 저학년 때 나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우물쭈물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넘겼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경력단절이 된 여성에게 꿈이 뭐냐고 묻는 질문에 선뜻 “응, 내 꿈은 이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 꿈이 뭔지도 모른 채 오랜 시간을 지내왔다.


두 번의 스무 살을 지나고도 여전히 나는 진로 고민 중에 있다. 보육교사, 사회복지사, 컴퓨터 자격증 등 여러 시도를 해봤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려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육아를 도와줄 다른 사람의 손이 없었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아이들을 누군가의 손에  맡길 담대함도 없었다. 그런 여건들이 꿈에 대한 생각은 사치라고 말했다. 


초등 저학년 때 단골 질문인 건지 둘째 단풍이도 최근 들어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꿈이 뭐야?” 여전히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단풍이는 형과 다르게 끈질기다. 잊을 만하면 또 물어본다.

“엄마 꿈이 뭐야?” “엄마는 꿈이 뭐였어?” 


몇 년이 흐른 지금도 꿈을 말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방황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쓸모없는 기간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듯 내 마음이 향하는 방향을 잡은 듯하다. 그 일은 쓰는 사람이 되는 거다. 쓸 때는 고통이지만 결과물은 보람차다. 다른 사람들의 글과 비교하며 부지기수로 작아지지만 누군가의 작은 격려가 다시 쓸 힘을 주기도 한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세상에 너무나도 많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만큼 유명한 작가가 되기도 어렵다. 하지만 글을 쓰며 몰랐던 나 자신을 알아간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런 걸 싫어했구나. 지금껏 객관적으로 나 스스로를 들여다볼 시간을 갖지 못했음을 글을 쓰면서 깨닫는다. 스스로를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면서 적어도 나 자신한테 만큼은 필요한 글이지 않을까 하는 정신승리를 해본다.


글을 쓰며 규칙적인 루틴이 생겼다. 운동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어느 때보다 마음이 평안하다. 육체적, 정신적인 건강과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안도감은 나 자신에게도 그 모습을 보는 아이들에게도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2년 전부터였다. 아이들의 교육 관련 영상을 자주 찾아봤다. 교육적인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 그 사람이 내게는 슬기로운 초등생활의 이은경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막막할 때 어떻게 육아해야 하는지, 학습은 어떠한 방식으로 도움을 줘야 하는지 선생님의 유튜브를 보며 배웠다. 


옆집언니처럼, 때론 친언니처럼 다그치면서 가장 강조하셨던 말은 이거였다. “운동하셨나요? 독서하셨나요? 칭찬하셨나요?”이 세 가지만 해나가도 육아가 할 만한 일이 된다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내 육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엄마가 아닌 자신의 일을 무엇이든 시작해 보라고 강조하셨다. 외로웠던 육아에서 선생님은 내게 큰 지지자이자 육아동료였다.


어렸을 때 하지 못한 진로의 고민이 아이들의 질문에서 시작됐다.  질문의 싹은 이은경 선생님의 격려로 뿌리를 내렸다. 그때부터 고민했다. 5년 뒤, 10년 뒤 어떤 삶을 그리면서 살고 싶은지. 내 삶을 위해 뭘 하면서 살 건지.


마음이 간절하면 보이는 걸까. 우연히 이은경 선생님이 글쓰기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글이 보였다. 그 문구를 보는데 설렜다. 선생님 덕분에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읽다 보니 쓰고 싶어졌다. 재빠르게 신청하고 온라인 수업에 참여했다. 자신 글을 써보라고 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글로 쓰라고. 막상 쓰려니 막막했다.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내 이야기가 재미있을지 모든 게 의문이었다.

내 눈은 잽싸게 다른 사람에게로 향했다. 수업을 함께 듣는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그려낼까. 순간 작아졌다. 학교 선생님들과 전문직을 가진 분들이 많았다. 수 없이 만나온 아이들의 이야기를 쓰기도 했고 해외 한 달 살기, 전문직을 가진 사람들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다수를 이루었다. 단순하고 특별할 일 없던 내 삶이 처음으로 부끄러워졌다. 


그런 나의 마음을 누군가 대변하듯 물었다. “선생님, 전문적인 직업이 아니거나 다양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 글을 써야 할까요?” 귀가 쫑긋하고 안테나가 세워졌다. 

“전문적인 직업이나, 해외 경험만이 글을 쓸 수 있는 소재는 아니에요, 쓸 소재가 없으면 어제 일을 쓰면 되죠.” 


“어제 일을 써라.” 

그 문장이 큰 위안이 됐다. 뭘 쓸지 몰라 고민하던 내게 동아줄 같은 말이었다. 그 뒤로 글을 쓰는 게 한결 가벼워졌다. 하루를 대하는 나의 눈이 달라졌다. 아이들과 전쟁 같은 육아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고 나의 신경은 곤두섰다. 아이들의 행동, 말 그들의 크는 과정이 예전과 다르게 다가왔다. 


아이들과의 에피소드를 글로 쓰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아이들의 육아이야기는 너무나  진부하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잘 풀 수 있는 이야기, 잘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이들의 이야기였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 자신이지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나에게 의미를 주는 일은 아이들의 성장과정이었고 그 안에서 나는 나를 알아가고 있다. 글을 쓰며 내가 아직 마음이 덜 자란 어른이란 걸 느끼고 아이들의 커가는 과정을 보며 그때의 나를 만나며 알아간다. 


원대한 꿈은 없다. 아이들과 하루를 잘 살아 내는 것. 내 뮤즈인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잘 기록해 글로 남기는 것. 덜 자란 나의 마음이 정신적으로 독립한 어른이 되는 것. 운동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루틴을 지키며 일단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엄마 뭐 해? 글 써?” 

“ 다른 사람이 엄마 글 안 읽어줘도 나는 읽어 줄 거야.” 

“엄마 글 쓰는 거 보고 나도 글 쓰는 거 배워야지.” 나의 어린 독자 2명은 항상 내 곁에서 나를 응원한다. 아이들 덕분에 오늘도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일깨운다.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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