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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 Apr 24. 2023

앵콜 받는 할머니

 

드르르륵 드르르륵. 우리 집 아침을 여는 소리다.

아직 잠이 잔뜩 붙어 있는 눈꺼풀을 올리는 마음으로 블라인드를 이쪽저쪽 천천히 올린다.  반쯤 올렸을까. 베란다 창으로 익숙한 자전거 한 대가 쓱 지나간다. 물 한 잔 마시면서 베란다멍을 하고 있는데 또 지나간다. 아까 그 자전거다. 그 후로도 몇 번 자전거 할아버지는 직사각 베란다 창에서 등장과 퇴장을 한다.




우리 집은 1층이다.

아파트 끝 동 모퉁이 집이라 한적한 편이지만 사람들은 꾸준히 지나간다.  보통은 강아지 산책 시키는 사람이 자주 보이는데 최근엔 이 자전거 할아버지가 종종 지나가신다. 할아버지 자전거는 애초에 앞으로 가는 게 목표가 아니라 멈추지 않는 게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천천히 가다가 가끔 화단 쪽으로 비틀비틀 방향을 잘못 잡을 땐 보는 나도 조마조마해진다. 그렇게 자전거랑 호흡이 잘 안 맞아도 라이더 할아버지는 열심시다.

 

이 분 말고 자주 보이는 할아버지가 또 있다. 집 앞으로 작은 놀이터 하나가 있는데 외져서인지 사람이 늘 없다. 아이들이 놀아주지 않는 심심한 놀이터에서 할아버지는 자주 시소를 탄다.  

처음에 둘째 아이가 보고

"엄마 엄마! 저 할아버지 혼자 시소 타셔. 심심하"

했을 땐 엥? 할아버지? 시소?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한참을 봤다. 그런데 가만 보니 시소를 운동기구 삼아 근력 운동을 하고 계신 거였다. 몸으로 누르면 바닥에 닿지는 않고 스프링처럼 튕겨져 올라갔다 내려오는 그 시소를 정말 열과 성을 다해 타신다. 아이 걱정처럼 심심할 틈이란 건 전혀 없어 보인다. 저 시소가 원래 운동기구였던가 착각이 들 정도로.




이 분들 말고도 천변, 공원, 어디를 가든 정말 운동에 진심이다 싶은 어르신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시간이 없어. 바쁘다 바빠 운동 운동!' 얼굴에 쓰여 있는 분, 일하듯 운동하는 분들도 있다. 멋모를 땐 그런 어르신을 보면 이런 생각을 했었다.

'왜 저렇게까지 건강을 챙기실까. 진짜 오래 살고 싶으신가 보다'


그런데 지금은 안다. 그게 얼마나 짧은 생각이었는지. 그건 살아 있는 동안 살아 있는 것처럼 살려고 하는 거라는 걸.  자식한테, 가족한테 폐 안 끼치고 내 몸뚱이 내가 건사하기 위한 치열한 움직임인 걸 말이다.


나는 운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론 운동도 날 좋아해 주지 않으니 뭘 해도 길게 이어가기가 어렵다. 하지만 지금은 운동을 습관으로 어떻게든 내 몸에 붙여보려고 노력 중이다. 최근에 몸 이곳저곳이 삐걱삐걱 대면서 근 1년을 1차 병원부터 3차 병원까지 지겹도록 들락날락하다 보니 이제 그만 하고 싶어졌다.

접수 수납, 접수 수납.. 도돌이표 같은 병원 대기 번호표 뽑는 그 일을.


사람이 몸이 아프면 몸만 상하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쪼글쪼글해진다. 당장 내 몸이 불편해지니 뭔가 으쌰으쌰 하다가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이런 몹쓸 생각이 주책맞게 올라와 버린다. 그래서 생각했다. 하루하루 온전한 기분을 위해서라도 할 수 있는 만큼 '몸'부터 챙겨야 되는구나.




요즘 '노년' '건강'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우리 할머니 생각이 부쩍 난다. 할머니는 100세 가까운 나이까지 장수하셨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할머니가 장수하셨다는 생각이 잘 안 든다. 내 기억 속 할머니는 일흔 정도 되는 시간부터 그냥 거기 멈춰 게셨던 거 같다. 어디 특별히 아프신 데 없이 건강한 편이셨지만 늘 기력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워낙 사람들하고 왕래를 잘 안 하시던 분이라 많은 시간 벽에 기대어 앉아 무릎에 이불을 덮은 채 티브이를 보셨다. 지금도 할머니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모습이다.

어른이 돼서 그런 할머니를 보며 생각했다.

'할머니의 낙은 뭘까'

'늙는다는 건 슬픈 거구나'

 

티브이일 수밖에 없었던, 어쩐지 안스러운 할머니를 떠올리다 보내 노년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만약 이다음에 나한테도 손주들이 생긴다면 그 애들한테 난 어떤 할머니로 비치게 될까.


음.. 다른 건 몰라도 사는 게 그럭저럭 재밌어 보이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주름이 많아도 그 주름 속에 자잘한 재미라는 게 있을 수 있구나 느낄 수 있도록.

  


생전에 박완서 작가님은 한글을 헷갈려하는 손주들을 위해 그 자리에서 맞춤형 동화를 만들어 읽어주셨다고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너무 좋아하면서 "할머니 또" "할머니 또"

고개를 쭉 빼고 귀기울였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들으며 작가님처럼 손주들한테 앵콜을 받을 수 있다면 그만큼 기쁜 노년도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라는 걸 뚝딱뚝딱 만들어 들려줄 수 있는 반짝반짝하는 동심이 있으니 말이다.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어쩔 수 없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아니라

일이든 소일거리든 그게 뭐가 됐든, 늘 뭔가를 꼬물꼬물 하고 있고

그러다 가끔 콧노래도 새어 나오는, 그래서 그냥 궁금해지는 할머니.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올 때마다 두둑하게 용돈 쥐어 주는 것보다 어쩌면 몇 배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꿈을 이루려면 영양제도 한 주먹씩 먹고 운동도 밥 먹듯이 하면서     

그렇게 치열하게 건강부터 챙겨야겠지.


이 안 좋으면 있던 동심도 쪼그라들 테니까.








                                                                       Photo by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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