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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 Jan 19. 2023

애들 없이 일주일 살기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이들이 없는 일상은.

무심코 고개를 돌리면 거기 아이들이 있었고, 지금 거기 없어도 곧 있을 예정이었으니까. 먹고 떠들고 싸우고 웃고 심지어 자는 그 시간에도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들이 캠프를 떠났다. 그것도 둘이 같이, 일주일씩이나.      




나보다 주변에서 더 난리였다. 너무 좋겠다며 진심 부럽다 했다. 그 금쪽같은 시간을 뭐 하고 보낼 거냐며 본인들이 다 설렌다 했다.      


음.. 뭘 하면서 보낼까.  일단 아이들이 있을 땐 절대 못할 걸 좀 해 볼까.

제주도 걷기는 어떨까. 걷는 걸 워낙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없으니 "엄마~ 얼마나 더 가야 돼" 소리 들을 일 없고, 한갓지고 얼마나 좋은가. 너무 걸어서 허리가 안 펴질 때쯤, 한라산 중턱에서 냄비라면 하나 흡입해 준다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이다. 칼바람이 얼굴을 때려서 콧물이 줄줄 나도 웃음이 나겠지.      


아니면 일주일쯤, 에쿠니 가오리로 살아보면 어떨까.

한참 겉멋 들려있던 20대 때,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 언니를 동경했었다. 아이가 없는 그녀의 일상에선 에스프레소 향이 났다.  목욕에 진심인 그녀는 2시간 동안 우아하게 목욕을 했다. 슬리퍼를 신고 동네를 산책하다, 베이커리에 들러 빵을 사 들고 고양이처럼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 사이사이, 무심하게 툭툭 글을 썼다.  샤워도 10분 안에 끝내버리는 내 눈엔 그저 탐나는 일상이었다. BGM으로 재즈가 흐를 거 같은 가오리 언니의 하루는.  

그래, 그렇게 도시 여자 느낌으로 일주일 보내봐도 괜찮겠다.      




그런데..

이렇게 저렇게 생각만 하다, 어느새 그 시간이 턱 하고 와버렸다.      

아이들이 떠난 것이다. 세상에나, 이제 나는 자유의 몸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머리가 아무리 서두르라고 허리업을 외쳐도, 어찌 된 일인지 이 놈의 몸뚱이는 침대에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른다.  


그래, 첫날부터 너무 신나 하는 건 애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 첫날이니까 그저 널브러져 있기로 했다. 하루쯤 뭐 이렇게 마음껏 게을러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런데 그렇게 기분 좋게 시작된 잠은 또 다른 잠을 불렀고, 축 늘어진 시간들이 계속됐다.  자다 지쳐 일어나서 대충 배 채우고, 배 부른 김에 또 눕고 모든 걸 침대 위에서 해결하고 있었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누웠다.


먹는 건 또 어떤지. 애들 있어서 맘껏 못 먹었던 컵라면, 햄버거, 피자 뭐 이런 것들만 먹어 치웠다.  가스 불을 켜지 않고도 충분히 살 수 있었다. 음식 쓰레기 한 번을 안 비웠고 세탁기도 청소기도 올 스톱이었다.      


제주도 올레길 따윈 없었다. 주말에 남편이랑 동네길 걷다 온 게 전부였다. 후다닥 들어와서 패딩은 방 한 구석에 휙 던져놓았다. 아이들이 안 보고 있다 생각하니 뭐든 아무렇게나 툭툭 했다.

그러고는 또 언 몸을 녹이려 금세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올레길을 너무 걸어서가 아니고, 너무 누워 있어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초조하긴 했다.

'아, 이런 시간 다시없는데.. 이렇게 써 버릴 순 없는데'

하지만 곧 '에이, 몰라 내 맘대로 할 거야. 나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그렇게 보낼 거야' 삐뚤어지기를 작정한 중 2처럼, 내 꼴리는 대로 했다.      


'나 혼자 산다'에 나오는 연예인들 보면 자기 자신을 위해 뚝딱뚝딱 요리도 만들고, 혼잣말도 맛깔나게 하면서 자기만을 위한 시간을 즐기던데. 누군가 내 일주일을 찍었다면 이건 뭐 지루함 초과로 방송불가다.




한때는 아이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직도 현역에 있는 결혼 안 한 후배나 딩크족 동기. 여행과 취미를 즐기는 그들,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고 있는 그들을 보며

나와는 다른 장르로 살고 있는 그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었다.  그 옛날 이휘재가 A와 B를 앞에 두고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면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졌던 것처럼. 나는 이제 그들과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고.  아이와 함께 내 이력서는 멈추고, 내 자아는 멈췄다고.  


그런데, 침대생활을 일주일쯤 하다 생각하니 그게 아니었다.  아이가 없었다면 일은 계속하고 있을지언정 내 본캐는 나무늘보였겠구나.  어찌어찌 일은 하겠지만 남은 시간은 둥둥 떠다니듯이 살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동안 나도 몰랐던 나를 봤다.  사춘기 때도 못해봤던 자아발견이란 걸 하고야 말았다.


아이들은 내 발목을 잡은 게 아니었다. 나를 잘 붙잡아 주고 있었던 거였다.  한없이 나른하고 게으른 나란 사람한테 열심히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던 거다.  아이들이 초침이 돼서 자꾸 늘어지려고 하는 나라는 시계를 열심히 돌리고 있었던 거다.  




"엄마~ 짜파게티 먹고 싶어~"


일주일 만에 돌아온 아이들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가스불이 켜지고 보일러가 돌아가고 청소기가 움직이고, 자고 있던 내 시계도 움직인다.  나무늘보는 온 데 간데없고, 대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목청 좋은 엄마만 있을 뿐이다.


   

“빨래할 거 다 내놔~~~"  






이미지 : 픽사베이 / 밀리의 서재 '진짜 게으른 사람이 쓴 게으름 탈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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