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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녹 Mar 23. 2024

거울을 들여다보면 내가 보여.

1-0.


S#1

너는 너 같지 않은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아.


영화워크숍에 참여하며 가장 행복했던 때를 꼽자면 동기들과 영화에 대해 가감 없이, 마음껏 이야기하던 순간들이다.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지칠 줄 모르는 영화광인 그들과 이야기를 시작하면 며칠 밤도 새울 수 있을 만큼 열정적이고 자유로웠다. 그 당시 나는 막 영화에 대한 취향을 갖기 시작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신나게 나열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말했다.

”넌 너 같지 않은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아. “

그때는 '그런가'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 문장은 의외로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기며 계속 눈에 거슬리곤 했다.

나 같지 않은 영화란 무엇일까. 나 같지 않은 건 무엇이며 나 같은 건 뭐지. 끝없는 의문이 꼬리 잡기라도 하듯 나를 물고 늘어졌다.



S#2

거울을 들여다보면


영화는 나를 비추는 거울과 같아서 들여다보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반사한다고 생각한다. 거울은 거짓말을 못해서 그저 앞에 놓인 모든 것을 반사하며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영화라는 거울 속에서 어떤 인물이 등장하여 어떤 사건이 발생하든 그것은 보는 사람의 시점으로 읽힌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게서 나오는 것을 토대로 보고 느끼게 된다. 영국 귀족 사회에서 벌어지는 불륜을 목격하거나, 설국열차를 타거나, 혹은 광활한 우주 속을 홀로 떠돌게 되어도 크고 작은 스크린 앞에 앉아 있는 지금의 나를 기준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자신과 닮은 것에 쉽게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유사한 상황에 처한 인물에게 더욱 몰입하며 공감하거나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인물에게 쉽게 마음을 뺏기고, 더 나아가 그가 마치 나라도 되는 냥 응원하고 연민한다.



S#3

나 같(지 않)은 영화


나 같지 않은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던 동기의 말은 맞기도 틀리기도 하다. 혹여 작은 실수 하나라도 하게 될까 늘 긴장하고 있는 나는 그의 말처럼 나와는 다르게 헐렁하고 자유로운 인물들이 나오는 영화를 좋아한다. 사실은 나와 닮은 그들이 나오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저 나는 남들에게 이상해 보이지 않기 위해(누구의 기준인지 모르겠으나), 혹여나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기 위해, 또는 어리숙하고 모자라 보이고 싶지 않아 수면 아래서 끊임없이 발을 굴릴 뿐이다. 사실 나는 괴상하고, 어리석으며 다양한 방면에 부족한 점 투성이고, 그런 나 같은 주인공들에게 공감하고 연민을 느낀다. 그들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과정 속에서 나의 숨기고 싶던 모습들을 긍정하고, 그 또한 나의 한 모습으로 인정하는 연습을 한다. 나는 그들에게서 진정 날 것의 나를 발견하고, 그들을 동경하며 조금씩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S#4

거울 속 세계


스스로 날 것의 나를 대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내 손으로 마취도 없이 가슴에 손을 집어넣어 심장을 꺼내 살펴보는 바와 다를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통하면 그렇게 잔인하고 피 튀기는 일은 잠시 뒤로 미뤄두어도 된다. 영화 속의 인물은 나와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사람이므로 비겁하게 들릴지라도 내가 아니라는 데에서 오는 안전함이 있다. 사건 또한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철저한 조작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이다. 그 사건들이 얼마나 현실과 비슷한지, 혹은 동떨어져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단지 그것이 영화라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그것에 직접 개입할 수 없게 되고, 제삼자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때로는 동화처럼 아름다운 미쟝셴을 통해 그들은 다시 한번 먹기 좋은 형태로 포장되어 배달된다. 그렇게 영화는 잠시 따끔하긴 해도 통증을 줄일 수 있도록 맞는 마취제와 같다.



S#5

내가 사랑하는 거울 속 세계


내가 유난히도 사랑하는 영화들을 모아 본다. 문득 보면 규칙이라곤 없는 듯 보이지만 분명히 한결같은 면이 있었다.


1화에서 인생영화라고 당당히 소리쳤던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등장하는 ‘조부 투바키’의 텅 빈 얼굴을 마주하며 애틋한 사랑을 느끼고,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의 ‘마츠코’의 어린아이 같은 짠한 사랑스러움에 마음을 뺏긴다. [피아니스트] (마카엘 하네케 감독 작) 속 ’ 에리카‘의 슬픔을 자처하여 나눠지고 싶고, [미스 리틀 선샤인] ‘올리브’의 가족들과 함께 달린다.


조금은 이상한 인물들이 엉뚱한 짓을 하는 세상.

내가 사랑하는 세계에서는 때론 어리숙하고, 어찌 보면 조금 모자라 보이기도 하는 주인공이 슬프고 고통스럽다. 넘어지고 무너진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조용히, 묵묵히 본인의 길을 나아간다. 나는 그런 영화들에게 쉽게 마음을 뺏겼다.



S#6

결국 나의 세계


영화는 마주 보게 한다. 내 안에 있지만 외면하고 싶은 그것을,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 보게 한다. 영화는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나는 여전히 쉽게 상처받고, 그런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유난히 그런 날이면 나는 영화를 본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쉽게 상처받는 연약한 영화들이 나의 손을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잡는다. 내가 내지 못 하는 소리를 크게, 당당하게 지른다.


그렇게 살아도 살아지며, 그렇게 아파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솔직하지 못하고 아닌 척하는 나에게, 사실은 겁이 나서 외면하고 있는 나에게 겁낼 필요 없다고 말한다.









표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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