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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녹 Apr 13. 2024

[추락의 해부] ,각자의 진실

1-3. [추락의 해부] 쥐스틴 트리에


#1. 언어라는 형식 위 진실


 하나의 사건을 해부할 때 우리는 각자의 진실을 메스 삼아 사인을 파헤친다. 분명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며 함께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다르고 나아가 기억이 다르다. 내 안에 존재하는 느낌을 다른 이에게 말하는 순간 그것들은 재차 왜곡되며 청자는 이를 다시 한번 변형하여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나의 진실은 끊임없이 변모하며 새로운 진실을 낳는다.


우리는 사건 또는 정서를 전달하기 위해 언어라는 형식을 빌린다. 우리는 말하고 듣고 쓰며 정보를 생산하고 가공한다.  같은 사실이라도 이 과정 속에서 언어를 통해 재생산된다. 전달되고 번역되는 과정 속 의미의 변질은 어쩔 수 없는 언어의 특성이다. 사뮈엘은 프랑스인이고 산드라는 독일인이지만 그들은 영어로 소통한다. 산드라는 법정에서 불어를 사용할 것을 요구받으며, 그녀의 변호사는 불어로 증언하는 것이 핵심이라 말한다. 그녀가 영어를 사용하는 순간 통역사를 거쳐 한 번 가공된 그 말들의 의미는 듣는 이의 성장배경, 지식, 가치관 등을 통해 재가공된다.


영화 전반에 걸쳐 감독은 듣는 자의 해석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진실의 형태를 보여준다. 다니엘이 마지막 증언을 하는 씬을 보면 과거의 어느 한순간에 사뮈엘이 아들에게 했던 이야기는 다니엘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된다. 우리가 보고 있는 영상에서 입을 움직이는 사람은 사뮈엘이지만 들리는 목소리는 다니엘의 것이다. 이는 실제 과거도, 현재도 아닌 다니엘의 기억 속 진실이다. 증인으로 참석한 사뮈엘의 정신과 의사, 친구, 그리고 이 사건을 보도하는 기자들과 이에 대해 의견을 내놓는 TV쇼 사람들까지. 각자 사뮈엘의 추락사라는 하나의 같은 사실인 알맹이를 놓고 자신의 견해와 이해관계라는 초콜릿을 덧씌워 맛보고 판단한다. 진실은 전달하는 형식과 전달받는 객체에 따라 왜곡되고 덧씌워지며, 찰나의 순간 눈이 녹아 물이 되듯 형태를 바꾼다.


'직접 본 것만을 믿어라'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직접 보지 못하고 들은 것을 통해 무언가 믿어야 하는 순간에 놓인다. 다니엘이 시각장애를 가진 아이라는 설정은 우연이 아니다. 당장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둘째치고 영영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한 채 무엇을 믿을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것이 유명한 누군가의 스캔들과 같은 가십거리일 수도, 지인의 뒷얘기일 수도, 아빠의 사인이 될 수도 있다. 그는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를 듣는다. 검사와 변호사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정확한 단서는 없다. 듣고 있던 그가 엄마의 손을 잡아준다. 왜 그랬을까. 그의 말대로 아무리 찾아봐도 어떻게 된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면 '어떻게'가 아닌 '왜'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 초반에 다니엘은 분명 거짓말을 한다.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를 들었고 싸우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아빠가 자살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언질을 주는 증언을 한다. 나는 다니엘이 엄마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엄마가 범인이 아니었다고 믿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2. 관계의 시소


 사뮈엘이 추락하기 전 날 산드라와 사뮈엘의 관계는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 앞에서 울려 퍼지는 그들의 싸움이 녹음된 소리가 둔탁하게 무너지고 날카롭게 부서지며 그들은 추락한다. 그들의 관계가 추락하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듯하다. 관계란 시소와 같다. 한 사람을 올리기 위해서는 다른 한 사람이 내려가야만 한다. 본래 시소란 평행하기 어렵다. 양쪽의 무게가 동일해야만 하며 동일하더라도 살짝만 움직여 위치를 바꾸게 되면 금세 무게 중심이 무너지기 시작해 한쪽으로 내려가거나 올라가기 시작한다. 반면 아래에 있던 쪽에서 갑작스럽게 발돋움을 하거나 벌떡 일어나 떠니 버리면 공중에 있던 사람은 추락하게 된다. 그렇게 시소는 양쪽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작동한다.  


두 사람의 관계도 이와 같다. 그녀는 그를 만나 만족스러운 관계를 맺게 되고 본인을 믿고 사랑하는 사뮈엘을 발판 삼아 발돋움을 한다. 이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둘의 시소는 수많은 사건을 겪으며 오르락내리락 서로를 올리고 내렸을 것이다. 서로 평행을 맞춰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엉덩이가 꽤나 아프고 여기저기 상처가 났을지도 모른다.


끝내 사뮈엘이 추락한 이유는 산드라가 떠났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온전한 본인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뮈엘에게 그녀는 얼마든지 그 시간을 가지라고 한다. 누가 말리냐는 식으로 결국 너의 부족함에 대한 핑계가 아니냐고 그를 몰아붙인다. 공중에 매달린 그는 코너에 몰리자 과거의 일들을 하나씩 되새김질한다. 괜찮다고 넘어간 것들이 사실 괜찮아지지 않은 채 그의 속에서 뾰족한 가시가 돋친 공이 되어 뒹군다. 재차 수면 위로 오른 자신의 과오들이 듣기 싫은 그녀는 다시 그를 몰아세우고 결국 공중에 매달린 그를 무시한 채 시소에서 내려버린다. 쿵. 떨어진다. 그는 절망하고 추락한다.


그들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였다. 그 추락은 사뮈엘의 추락사라는 물리적인 추락을 부추겼고, 끝내 산드라와 다니엘을 추락시켰다. 영화에서 산드라는 결과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지만 의례 법정극의 결말처럼 통쾌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여전히 찝찝하고 의문은 사라지지 않은 채 눈처럼 쌓여있다. 다니엘의 말처럼 ’ 어떻게 ‘가 아닌 ’왜‘를 생각해 보았을 때 그녀가 사뮈엘을 죽였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녀도, 여러 사실들을 조각조각 바라본 나도 무죄판결에 기쁘지 않은 이유는 그 승리로 가는 과정 자체가 지는 싸움이었으며 결국 그녀의 가시 돋친 소리들이 그를 공중으로 내몰았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3. 눈을 가리는 이기심


 사뮈엘은 산드라가 모든 것을 강요하며, 자신은 희생하며 살아왔다고 믿는다. 하지만 프랑스로 이사를 한 것도, 눈 덮인 산 꼭대기에 집을 짓고 살게 된 것도, 다니엘의 홈스쿨링마저도 그의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에게만 너무 많은 짐을 안겼다며 산드라에게 불공평하다고 부르짖는다. 사뮈엘은 아들의 사고 이후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눈이 쌓인 산 꼭대기에 높은 계단을 오르내려야만 하는 그런 집에서 살아간다. 비장애인에게도 힘들 것 같은 집에 시각장애가 있는 어린 아들과 산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다. 이러한 선택은 그의 욕심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이 부부의 싸움에서 진실의 잔인함을 맛보았다. 각자 자신의 무언가를 외면하기 위해, 어쩌면 그 무언가를 상대가 눈 감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상대를 공격한다. 산드라의 우월감을 사뮈엘의 자괴감과 두려움을 잔인하게 난도질하고, 사뮈엘의 열등감은 산드라를 이기적인 괴물로 만들었다. 그들이 서로에게 내뱉은 모든 말은 각자에게 진실이었지만 결국 서로의 손에 쥐어주는 무기가 되었다. 상대의 열등감을 들춰내는 우월감은 이기심으로 이어지고, 상대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고 본인의 희생만을 드러내는 열등감 또한 이기심으로 이어진다. 마침내 이기심은 진실을 가린다. 우리는 진실에게 등 돌린 채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다. 그렇게 전체가 아닌 일부만을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이 그들의 삶의 아주 작은 일부였음을 알아야 한다. 이기심 또한 서로가 가진 마음의 작은 일부라는 것을, 그것 또한 서로를 향한 마음의 일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끝내 이 글은 내가 믿는 진실이다.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에 기웃거려 본다.

그들의 이야기가 나라는 세계를 통과하며 이 글을 통해 다시 한번 변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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