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 시리즈
춥기 그지없던 3월 초의 추위가 지나고, 이제는 완연한 봄이 도래했다!
어제는 오랜만에 벚꽃을 보기 위해 벚꽃 구경을 다녀왔다. 사람들이 아주 많지도 적지도 않은 평화로운 풍경과 딱 좋은 날씨는 학업과 과제에 허덕이는 대학생에게 한 줌의 힐링과도 같은 시간이었기에 기분이 매우 행복해졌다. 새삼 쾌적한 날씨와 쾌적한 풍경이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체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꽃이 흐드러지는 봄의 시작을 벚꽃으로 맞이하며, 문득 과외 시간에 수업을 했던 한 시가 떠올랐다. 꼭 이맘때쯤, 3-4월이 개화 시기인 산수유나무에 관한 시이다.
산수유나무의 농사
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뜨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 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이 시를 우리나라 내신에 맞추어 해석하면 그 나름대로도 의미가 있지만, 그것과 약간 연합해 내 생각을 더하고 싶다.
시에서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보통 우리가 잘 주목하지 않는 '그늘'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연히 나무가 있으면 그늘이 있는 것. 당연한 존재였던 그늘이 시인에게는 '나무의 한 해 농사'라는 결실로 재평가받고 있었다.
우리가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사진을 찍는 꽃은 하늘에 피워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져 무더운 여름날 사람들이 잠시 쉬고 갈 수 있는 휴식처요 숨 돌릴 틈이 된다.
그렇다면 그늘은 왜 '농사'라고 불리우는 것일까. 이 시에서 시인은 나무가 그늘을 만드는 데 있어서의 수고로움을 언급해 주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측면에서 그늘은 나무에게 또다른 결실을 맺어 준다고 생각한다. 이 시에서 그늘은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로 표상된다. 그늘을 만든다는 것은 조금 귀찮아도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한 번 더 수고로움을 감내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그늘은 나무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름날 시원한 그늘을 찾아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그 그늘 덕분에 말라 죽지 않고 살아남은 다른 식물을 관찰할 수 있는 등 나의 수고로 만들어진 그늘은 언젠가 나에게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그늘은 나의 배려로 시작한 선순환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우리는 주로 꽃에만 집중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의 심미적 아름다움을 보는 것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나무에게는 다른 이를 위해 남겨주는 공간인 그늘도 존재한다. 이번에 벚꽃을 보러 갔을 때에도 작은 공원 속 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쉬는 시간이 참 좋았던 기억이 있다.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 있는 것도 좋지만, 다른 이를 위해 남겨진 그늘에 대한 감사함을 알 수 있다면 어떨까? 그리고 나 역시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꽃에만 치중하기보다는, 묵묵히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줄 수 있는 그늘을 농사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꽃이 흐드러지는 봄 속에서, 꽃의 아름다움으로 시작해 그늘의 수고로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