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 시리즈 2
어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Getty images의 주인공, 장 폴 게티가 평생 동안 모은 소장품들을 대중에게 무료로 공개하는 Getty center에 방문했다. 입구에서 트램을 타야 갈 수 있는 게티 센터는, 방문객들이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처럼 느끼게 하기 위해 트램을 만들었다고 할 만큼 예술에 대한 어떤 진심을 가지고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내가 가장 기대했던 것은, 평소 모네 애호가를 자처하는 나로서 ! 아무래도 모네의 그림이었다. 현재 게티 센터에는 다양한 그림들과 조각 등이 전시되어 있고 그 중 모네의 작품은 약 3점 정도 존재한다
대중에게 모네의 화풍으로 가장 잘 각인된 것은 ‘수련’ 연작이다. 그러다 아쉽게도? 게티 센터에는 수련과 관련한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총 세 점의 작품들 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해돋이>다. 이 작품도 워낙 유명한 모네의 작품답게 유명세를 떨치기는 하지만
사실 이전에 사진으로 봤을 때는 다른 작품들만큼의 임팩트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너무 좋아서 보고 또 보고 30분 가량을 이 작품 앞에 머물렀다. 모네가 포착한 순간의 질감들은 아름다웠다. 잔잔해보이지만 지루해 보이지는 않는 물결과 사람들의 모습과 떠오르고 있는 해의 조화가 잘 어우러지는 모습에, 카메라로는 담기지 못할 1m 앞에서의 감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림을 뚫어지게 들여다 보았다.
나는 왜 모네의 그림을 좋아하는가?
모네의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새내기 때 대학교 교양수업에서 배운 암기용 지식들은 이제 거의 잊혔으며 미술에 그렇게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그냥 모네의 분위기가 좋아서 모네를 좋아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네를 좋아하는 이유를 유추해보자면 모네와 그 인상주의 화가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상주의는 산업혁명 등 다양한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등장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기성세대의 도식화된 화법과 고상한 주제를 거부했다. 이와 함께 사진의 스냅 샷 같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생생하게 표현하면서 ‘회화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공통된 의식을 가지고 현실을 담아내었다. 이들의 작품은 살롱에 출품이 거부되었고, 이에 자체적으로 작품을 모아 전시를 개최한 것이 인상주의의 시작이다. 말 그대로 찰나의 ‘인상’을 반영한다는 뜻에서 인상주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때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인용하여, 신문기자인 Louis Leroy가 이 화가들을 ’인상주의자‘라고 비꼬았던 명칭이 후에 이들을 지칭하는 이름이 된 것은 나름 흥미로운 여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돌아와서, 나는 인상주의를 기존의 질서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라고 생각하기에 좋아한다. 어느 분야건 아무리 기존의 질서가 이전만큼 힘을 떨치지 못하더라도, 그 시류에서 떨어져 나와 NO를 외치기란 쉽지 않다. 미술가들에게 절대적인 위치였던 살롱에 출품이 거부당한다는 사실은 정말정말 큰 사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예술을 주창했던 인상주의가 좋다.
그러면서도 나의 미감을 충족시켜서 좋다! 나는 단순히 기존의 질서에 도전한다고 해서 모든 미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 예술적인 감각은 그리 심오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미술이라는 것은 그 이름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또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초현실주의와 같은 상당히 난해한 (..) 미술은 ‘의미가 있다‘ 이지 그걸 향유하고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은 부드럽고 아름답다. 그리고 모든 것을 뜯어보겠다는 정교한 묘사보다 어딘가 남겨 둔 그 애매모호함이 좋다. 그 애매함에서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상상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의 저 동작은 정확히 뭐였을까, 생각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상주의를 만들어나간다는 점이 좋다.
생각해보니 좋아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도 유독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용기 때문인 것 같다. 어제 긴 시간 동안 모네의 그림 앞에서 여러 생각을 해 보았는데 그 생각들의 대부분은 용기라는 키워드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 작품을 사랑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이 나로 하여금 투영하게 하는 생각들을 사랑하는 셈이다. 아무튼 모네의 해돋이는 김기림 시인의 <바다와 나비>를 먼저 떠올리게 했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이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이 시를 읽다 보면 용기와 치기 사이를 고민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 고민은 작년 한 해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든 주제이기도 하다. 이 시 속 나비의 행동은 용기인가, 치기인가. 나는 지금 나아가야 할 때 주저하고 있는 것인가, 멈추어야 할 때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사람들의 기준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용기인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용기라는 이름으로 무책임하게 실행하는 치기와 다를 바가 없는가
이러한 내 고민에 대해 적어도 인상주의는 용기에 가까워 보였기에 좋았다. 기준점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나에게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며 사람들의 인정까지 받는 인상주의의 모습이 동경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인상주의가 미적으로나, 그 배경을 알게 되면서부터나 더욱 좋아졌다.
그러나 누군가는 인상주의를 치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용기까지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들마다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용기와 치기는 단순히 나 혼자만을 요인으로 결과를 도출해내는 종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상주의는 여러 시대적 배경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도 맞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충분한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었기에 성공했다. 여기에 대한 대표적인 예시로는, 마이클 조던이 200년 전에 태어났다면 지금과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지에 대한 질문과도 맥락이 통한다. 그냥 동그란 구멍에 공을 잘 넣는 사람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 보면 순환론에 말려들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의 노력과 맞물려 운이 따라준다면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을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명명할 것이고, 노력이 충분하지 않았거나/충분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운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건 뭐.. 안타까운 것이다. 그러나 이 요소들은 우리가 모두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전부터 어렴풋이 머릿속에 새겨놓고 있었으나, 점차점차 몸으로 겪으면서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용기와 치기를 결정짓는 단 하나의 요소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에 쓰인 것만으로는 나비의 행동이 용기였는지 치기였는지 알 수 없다. 축 처진 날개로 돌아오는 나비의 실패가 치기로 직결되는 것 또한 아니다. 세상의 인정이 용기로 직결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노력만으로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고민하고 무언가에 힘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은 운이 좋다면 언젠가는 용기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할 뿐이다.
또다시 아까 모네의 작품으로 돌아왔다. 내가 살면서 본 작품 중에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으로 남을 것 같은 이 그림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해돋이다. 신년을 맞이하는 지금과도 잘 맞물린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2024년을 보냈다. 누군가는 새로운 환경에 속하게 되어 많은 것들을 경험했을 한 해를, 누군가는 조금의 권태와 위기에서 오는 혼란스러운 한 해를, 누군가는 의무의 한 해를, 누군가는 인내의 한 해를 맞이했을 것이고 그 가운데는 용기와 치기가 골고루 자리잡았을 수도 있다.
돌아보면 지난 한 해 나에게는 치기가 조금 더 많았던 것 같다. 축 처진 날개를 실패와 치기로 연관지어 실패할 때마다 좌절했고 성공이 곧 용기라고 생각했기에 이를 위해 내 자신을 괴롭히는 순간도 많았다. 그리고 2025라는 숫자에 익숙해지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는 또 나름의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고민하되 지나친 고뇌는 하지 않고, 실패를 치기와 연결짓지 않고, 성공만을 용기의 척도로 생각하지 않는 2025년이 되기를 해돋이를 보며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