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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Oct 02. 2023

꺾인 고개와 무표정

머리 안 쪽 


성인이 되면서 내게는 역할이란 게 생겼다. 정확히는 역할이란 게 필요했다. 그게 없으면 사회는 내게 자리도, 사람도 주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 자연스럽게 확신했다. 그때부터 내가 잘하는 게 뭔지 진중하게 따져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는 수학을 잘했는데, 두 번의 전과 끝에 문과와 이과 그 중간 어딘가에서 굴러먹는 놈이 됐다. 또 바이올린도 잘했지만, 중학교로 올라갈 때 전공을 선택하지 않았다. 6년 만에 다시 잡은 악기는 멀쩡했지만 손에는 보이지 않는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만으로 22살인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나를 이기는데 반년 넘게 걸렸다. 대학교 학점은 엉망이었고, 스펙에서 가장 기본이라는 영어 점수도 미달이었다. 와중에 수능을 두 번 치르고, 군대 가기 싫다며 휴학까지 하느라 내 나이는 쭉정이처럼 부족한 내용물을 무시하고 커져갔다. 


그래서 잘하는 거 말고, 뭐 하고 살았는지를 생각해 봤다. 여러 취미 활동을 했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렸는데, 나는 항상 틈만 나면 한눈을 팔았다. 친구들끼리 밤에 길을 걷다가 술 취한 남자가 주차 금지판을 발로 차는 걸 보고, 직원이랑 같이 그 표지판을 원위치했다. 새벽에 담배를 피우다가 집 앞 공원에서 크게 싸우는 레즈비언 커플을 발견했을 때는, 둘의 그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무례하지 않은 거리에서 바라보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관심 있어하는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이나 행동이었다. 그러니 누구든 흥미를 돋워주기만 하면 내 시간을 가감 없이 투자했고, 아무리 대단한 지인이어도 사람 안쪽이 무색무취라면 존경심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니 내가 감성적인 사람인지 이성적인 사람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감성적인 사람들은 내 태도가 너무 차갑다며 서운함을 표했고, 이성적인 사람들은 내가 이상한 생각을 너무 자주 해 피곤하다고 했다. 가끔은 무슨 낡은 정수기 물처럼 온수도 냉수도 아닌 어중간한, 가장 맛이 없는 식수 같은 사람이 된 건가 하는 생각에 잠겼다. 



내가 이렇게 관찰을 일삼고, 상황에 냉정했다가도 감정적으로 결정하는 버릇은 경험론에서 기인한다. 나는 배움이 느렸기 때문에, 살면서 처음 하는 일을 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어떤 사소한 거라도 있으면 위안이 됐을 텐데 전무했다. 이런 내가 예전 일을 곱씹어보고, 응용하는 일은 소양 수준이 아니라 생존전략이었다. 그렇게 경험론을 예찬하며 무던하게 살아가다 보니, 원래 뒤통수에 달려있던 눈이 가려진 것처럼 고개를 돌리게 됐고, 머릿속은 여러 잡생각으로 버무려졌다. 밖에 다닐 때마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는 없으니 무표정으로 싱긋거림을 숨겨야 했다. 


사실 난 에세이를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소설 같은 순수창작에 비하면 어설픈 일이라 생각했고, 내가 품은 이야기들은 술자리에서 분주한 혓바닥에게나 어울리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이 페이지까지 오는 데도 계속 헷갈렸다. 내가 편취한 내 감정들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 무슨 의미를 강제적으로 갖게 될까. 결국 이 글을 완성한 나는 어떤 사람인 것일까. 


지금 와서는 에세이를 쓰길 잘한 것 같다. 한창 주변을 곁눈질하고 내 감정에 집중할 때는 그것들이 정말 극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공개할 글로 번역을 해보니 어떤 이야기는 너무 형편없어서 다섯 줄도 채우지 못했고, 더 형편없는 이야기는 다른 다섯 줄도 없애버릴 정도였다. 어떤 이야기는 지금의 내가 풀기에는 너무 난해해서, 앞으로도 계속 어려워할 것이라는 저주 비슷한 격려만 얻고 끝났다. 할 수 있는 이야기야 산더미처럼 있지만, 그것들을 꼭 완성 짓고 공개한다고 해서 그 이야기들을 위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뽐내고 싶다 해서 내 이야기들을 저버릴 수는 없다. 아마 지금까지의 분량이 내가 쓸 수 있는 내 이야기의 다양함과 양의 최대치일 것이다. 만족스럽다. 내 수준에 이 만큼 끙끙댄 것 자체가 큰 결과라고 생각한다. 


개버릇 못 준다고, 나는 계속 이렇게 살 것 같다. 이렇게 살 수 있는 한 이렇게 살고 싶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데, 스무 살에 생긴 늦은 버릇은 불혹까지는 가지 않을까?  



기억 한편에 짱 박혀 있던 일화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 저희 반에 전학생 한 명이 왔습니다. 외국에서 살다 온 여자애였습니다. 전교생 수가 적었던 우리 학교 특성상, 선생님은 그 아이가 학교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저를 기용하셨습니다. 한창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으로 이름을 날리던 제게 환영 연주를 하라고 하시더군요. 당시 저는 그런 자리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무대에 서는 거 자체는 크게 두렵지 않았지만, 무대가 생기고, 그곳에 제 자리가 생기는 과정은 너무 무섭더군요. 그래서 바이올린을 케이스에서 꺼내기까지도 엄청 실랑이를 했습니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안 하려는 저를 계속 닦달하더군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닦달은 굉장히 따뜻한 관심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바이올린을 들고 보통은 선생님이 계시는 바로 그 자리에 섰습니다. 멋모르는 초등학생 입장에서 그 자리는 알 수 없는 황홀함이 가득했습니다. 그냥 모두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제일 적당한 곳이었을 뿐인데 말이죠. 저는 튜닝을 시작했습니다. 정확히는 튜닝할 때 네 가지 소리를 번갈아 내는 그 몸짓을 따라한 것이죠. 저는 지금도 즉각적인 튜닝은 하지 못합니다. 머리 쪽에 달려있는 팩을 잘못 돌리면 줄이 아예 풀려버리는데 그게 아직도 두렵기 때문이죠. 어린 나이의 저는 얼마나 더 했겠습니까? 그냥 어른들이 연주 전에 비장하게 준비하는 모습이 멋있어서 흉내만 내 본 겁니다. 


근데 그 모습을 보고 선생님과 친구들이 야유를 던진 겁니다. 제가 연주를 하기 싫어서 아무 소리나 막 내는 것처럼 보인 것이죠. 저는 그 분위기를 도저히 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에 따라 다시 자리에 앉아버렸고, 선생님은 제게 애정 섞인 말투로 사람이 그럴 때는 해 줘야 하는 거라고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제 문제는 두 가지였습니다. 일단 사람들의 기대를 등에 업었을 때, 알겠다는 말도 없이 무대에 올라서는 안 됐고, 내 의도와 다른 상황이 펼쳐졌을 때 그게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거기서 위트를 발휘할 수도 있었잖아요? 아니 너네는 튜닝도 모르냐. 맞출 거 맞추고 이제 연주를 하는 거지. 전학생 앞에서 우리 학교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광고하냐? 이러고 당당하게 연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 전학생 입장도 생각해 보면 참 곤란했겠습니다. 이렇게 속 좁은 놈 때문에 괜히 남의 시선을 부담스럽게 받게 됐으니까요. 그래도 이제는 클 만큼 커서 그런 상황에선 쌍욕도 하려면 할 수 있답니다. 만약 기회가 닿아 그 여학생에게 다시 연주할 일이 생긴다면, 다섯 시간도 넘게 해 줄 의향이 있습니다. 슬슬 줄을 갈아야 하는 시기인데,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땀 뻘뻘 흘리다 줄이 끊어지면 엄청 멋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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