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줍줍과 딸기맛 아이스크림

by 제법

30대 중반이면 풍부한 식견과 경험을 바탕으로 지속하는 취미가 하나쯤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직장인이라면 철마다 예쁜 오피스룩을 쇼핑하고 점심시간에는 보기도 먹기에도 근사한 맛집 찾아다니는 일상을 꿈꿨다.


그러나, 고백했던가? 올해 여름에는 만만한 흰 블라우스 5개를 사서 내내 입었다는 사실을. 스티브 잡스도 그리 이해 못 할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다. 남자들의 제육 소울푸드설에 공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자소서에 적어내던 음악감상과 독서가 아닌 무려 취미가 부동산인 사람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처음 부동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17년 여름이다. 예상치 못하게 우리 집은 가장의 부재에 맞닥뜨리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껏 누가 시킨 적은 없지만 가장의 마인드로 살고 있다.

이 시대 가장은 본디 주거를 책임져야 한다. 2017년 여름은 대치동 은마아파트가 15억 하던 때였고 지금은 29억이 넘는다. 2014년부터 어느 정도 상승하던 서울 부동산은 탄핵정국이 정리된 2018년에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가끔 그 당시 지방에 있는 본가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서울 아파트에 갭투자를 했다면 내 인생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스스로 중산층일지도 모른다 평하며 겨울 딸기 가격 쯤은 보고 쇼핑할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 부동산 입문자였던 나는 2018년 상승장에 서울아파트를 사지 못했다. 덜컥 전재산을 베팅할만한 경험과 명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2019년 하반기에 수도권 신축을 취득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유주택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자산의 90프로 이상이 부동산에 매몰된 사람의 삶은 여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시세가 오르면 상급지와의 가격차가 벌어지는 것에 안달이 났고 시세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마음이 불안했다. 기꺼이 호갱노노의 진정한 호갱으로서 내 열정과 시간을 바쳤다. 5년이 지난 지금은 어느 무리에 가서도 부동산 이야기가 나오면 한 마디 거들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고수는 말이 없는 법인데 나는 고수가 아니니 의견을 아끼지 않아 지인들이 가끔 부동산 상담을 요청한다.


최근 서울 역세권 아파트 몇몇이 선착순 계약, 일명 줍줍이 나왔다. 맞벌이로 인천에 분양받아 살던 지인 A가 나에게 조언을 구해왔다.

"나는 무조건 서울 살아야 해"

A는 다짜고짜 본인이 서울 사람이라는 말부터 했다. 평촌 신도시 분양 시절부터 평촌에서 자랐고 아직도 부모님은 평촌에 거주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대뜸 출생지를 고백하며 본인이 서울 아파트를 가져야 하는 당위성을 어필했다.

"맞벌이 통근하려면 무조건 서울 살아야 해. 시세는 안 올라도 상관없어"

그러면서 계약할 아파트는 돈이 모자라 입주 때 전세 줄거라 했다. 서울 거주가 중요한 A에게 나는 좀 더 저렴한 서울 역세권 준신축 실거주를 추천 주었다. 그러나 A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분양권 계약을 고집했다. 분명히 실거주 목적이라고 했는데 계약금 10프로로 상승장에 편승할 수 있는 풀레버리지 투자자의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냥 서울 아파트가 갖고 싶다고 말할 것이지 구차하게 시세가 안 올라도 된다는 쉰소리는 왜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실거주를 위해 나름 내 지식을 총동원하여 엄선한 단지를 추천했는데 투자 목적이라면 전혀 이야기가 달라지니 슬슬 짜증이 나 급하게 대화를 마무리하였다.

다년간의 사회생활로 밖에서 생긴 화는 집으로 가져오지 않는 편인데 내 애착 영역인 부동산을 건드리자 쉽사리 떨쳐내기 힘들었다. 스트레스를 받자 어제 사놓은 딸기 아이스크림이 생각났다. 여느 때처럼 지잉 지잉 소리를 내고 있는 냉장고를 바라보았다. 나는 딸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지만 살을 빼고 싶기에 먹고 싶지 않았다. 다이어트를 외치며 오늘 점심 백반의 밥을 반공기나 남겼지만 딸기 아이스크림은 예외로 삼고 싶었다. 먹기 싫지만 먹고 싶은 마음. 그냥 맛있게 먹으면 되지 왜 허구한 날 다이어트 타령이냐 되물으면 나도 할말이 구구하다.


인간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생각보다 논리적이지 않으며 모든 분야에서 일관적일 수 없다는 일관성만이 지켜질 뿐이다. 상대방의 모순을 품어 줄 수 없는 미성숙한 영혼이니 오늘은 딸기맛 아이스크림 세스쿱만 먹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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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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