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씨를 처음 만난 것은 눈 내리는 겨울날이었다. 단 한가닥의 검은 머리도 없는 완벽한 백발이었지만 윤택한 피부와 크리스탈처럼 빛나는 눈빛이 노인의 그것은 아니었다. 온통 하얗게 덮힌 세상과 머리털색이 구분되지 않아 마치 대지가 진씨이고 진씨가 대지인 것 같았다. 산신령보다 조금은 세련된, 숲의 정령쯤 될 법한 신비로운 포스가 풍겨져 나왔다.
‘레골라스 한국 버전인가’
영아 때부터 일관성 있게 낯짝을 가렸던 나인데 반사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알고 보니 진씨는 부모님의 농장일을 도와주기 위해 타 지역에서 온 것이며 과수원 농막에서 살 예정이라고 했다.
진씨가 온 후로 부쩍 부모님이 든든해하시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는 본가에 갈 때마다 대놓고 잘 생겼다고 칭찬해 주었다. 잘 생긴 것도 고마운데 일까지 잘 한다고 해서 간식을 사다 바치며 빠르게 친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진씨가 아버지 모르는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나는 1차로 진씨가 여자인 것에 충격을 받았고, 2차로 진씨의 수려한 모습은 없고 구황작물을 빼다박았지만 심각하게 귀여운 아이의 외모에 놀랐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따로 없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그 아이를 감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감자는 크면서 점점 색이 진해지더니 이제는 기름에서 갓 건져올린 핫도그 색이 되었다. 감자는 엄마와는 달리 잠이 많은 편이었다. 자고 있는 뒷모습은 정말 한마리 핫도그 그 자체였다. 투명하고 단순한 캐릭터였지만 우리집에서는 꽤나 사고뭉치짓을 했는데 일년에 한두번은 꼭 가출을 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찾아나서기도 했지만 소용없었고 시간이 지나면 어느샌가 거지꼴을 하고 대문간을 넘어들어왔다. 눈치를 보아하니 이성 문제인 것 같았다. 엄마는 언젠가 옆동네에서 감자와 똑 닮은 아이를 보고 “감자야”라고 부를 뻔한 걸 억지로 참았다고 말하며 폭소를 터트렸다. 그 동네에도 아버지 모르는 감자1이 생긴 것이다. 아니, 감자2나 감자3일 수도 있다.
원래는 이제라도 수술을 해서 더 이상의 가출과 2세 탄생은 막아야 한다는 쪽으로 집안의 의견이 모아졌다. 헌데 어영부영하는 사이 녀석의 시간은 나보다 빠르게 흘러 중년에 이르렀고 우리는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털갈이 후 입맛을 잃어 근래 감자 체중이 많이 줄었다.
우리 가족 중에서 제일 마른 감자… 이틀 공복 따윈 가볍게 해내는 너란 강아지… 주말에 연어포 간식이나 잔뜩 사다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