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오장육부의 기능이 온전하다면 물만 먹어도 살찌는 사람은 없다. 다이어터라고 주장하며 섭취하는 모든 칼로리에 날을 세우지만 내가 탈다이어트 못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스트레스성 폭식.
현대인 중에 스트레스 안 받는 사람이 누가 있으며, 맘고생을 하면 입맛이 떨어지고 살이 쪽쪽 빠지는 선택받은 자도 있는 반면에 나는 비교적 가성비 좋게 스트레스를 해결하곤 한다.
음식이 주는 힐링은 소박하고도 확실했다. 시험기간이면 ABC 초콜릿으로 심신을 달래던 여학생은 퇴근 후 왠지 모를 헛헛함에 2만 원짜리 치킨을 주문하는 어른으로 성장하였다. 집순이인 나는 특별히 하는 것 없이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다 잠들곤 한다. 그런데 유난히 퇴근길이 길게 느껴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드라마를 보는 행복이 고플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집청소도 하기 싫고 바로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고 배달어플을 켜곤 한다.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메뉴를 고르는 것도 숙제 같지만 일단 먹다 보면 무언가가 채워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위가 느끼는 허기가 마음의 공허함과 같지는 않을 것인데 멍청한 뇌는 구분하지 못하고 늘 그렇게 속아댄다.
다음날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런 날에도 원인은 있었다. 내가 쓴 보고서에 혹평이 달리거나 하지 않던 전화 응대를 하거나 부당한 평가를 받았다는, 직장에서 있을 법한 일상적인 스트레스들이다. 이런 사소한 일로 치킨을 시켜댄다면 차라리 닭집을 하는 것이 수지가 맞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치킨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나의 마음이 참으로 궁핍하다 싶었다. 공원을 산책하거나, 친구에게 전화해 수다를 떨거나, 운동을 하는 등의 우아한 가격을 지불할 수는 없는 걸까.
30대 미혼 여성에게도 명절 스트레스는 존재한다. 이번 설 스트레스의 값을 매기자면 비비큐 황금후라이드 2만 원과 영하 4도씨의 밤에 치킨 먹고 어쩔 수 없이 산책 나가는 비루함을 추가한 가격이 되겠다. 이즈음 홈쇼핑에 금은보화들이 줄줄이 나오는 것을 감안하면 주제에 맞게 방어했다 자평하면서도 그래서 비만한 부자가 없구나 하는 씁쓸함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