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나는 한 워터파크에 있었다. 파도풀에서 다이빙쇼가 열린다는 안내 방송이 울리자 사람들이 일제히 무대 앞으로 몰려들었다. 나도 별 기대 없이, 그냥 구경이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파도풀 끝자락에 자리를 잡았다.
다이빙쇼를 보여줄 이들은 다름 아닌 구조요원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나온 대학생들이었다. 빨간색 라이프가드 티셔츠를 입은 그들이 차례로 몸을 던졌다. 누군가는 높이 솟구쳐 오르고, 누군가는 똑바로 선 자세에서 물속으로 곧장 떨어졌다. 또 누군가는 귀여운 댄스로 관중의 웃음을 끌어낸 뒤 공중에서 빙그르르 돌면서 다이빙을 했다. 풀 안 가득 모여 있던 사람들은 두 팔을 번쩍 들며 환호했고, 물결이 환호에 맞춰 춤추듯 일렁였다.
스무 명의 청춘이 미사일처럼 하늘로 솟구쳤다가 푸른 물로 곧장 떨어질 때, 붉은 티셔츠가 바람결에 흩날렸다. 그 붉음은 새파란 하늘에 대비되어 더욱 또렷하게 빛났고, 마치 불꽃이 파도 위에서 흩어지는 듯했다.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 저것이 젊음이구나. 힘차게 솟아오르고, 불꽃처럼 순간을 터뜨리는 것.
제대로 불 한 번 지펴본 적 없는, 미지근했던 내 청춘이 문득 스쳐 지났다.
내 젊음은 늘 조심스러웠다. 체력이 약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무리하면 다음 날 망칠 게 뻔했으니 늘 에너지를 많이 쓰지 않으려 조심했다. 젊음을 젊게 쓰지 못한 채, 어릴 때부터 늙은이처럼 살아온 셈이다. '가야 하나?'라는 질문 앞에서 멋있게 몸을 던질 수도, 한계를 시험해 볼 용기도 얻지 못했다. 나의 최선이란 일상의 루틴을 겨우 완수하는 정도였다. 병에 걸리고 나서야 그것은 젊은 날의 공백이었고 후회라는 감정으로 떠올랐다.
여러 직업을 거친 끝에 편집자로서 첫 근무를 했던 날이 생생하다. 사락사락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사무실에서 교정지를 보는데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되었구나'라는 느낌. 편집자의 삶이 내겐 잘 맞다고 믿었다.
오랫동안 머릿속 세계를 더 소중히 여겼다. 머리를 쓰는 건 귀한 일, 몸을 쓰는 건 한 수 아래라는 편견. 내가 받아온 교육과 이 사회가 새겨놓은 왜곡이었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교정지를 들여다보고, 원고를 다듬으며 수년을 보냈다. 마감에 쫓기던 어느 날 밤, 문득 내 허벅지를 내려다봤다. 근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허연 살덩이.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근육과 관절은 아마 새 제품 같을 거다. 쓰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지 않을까."
말랑한 종아리를 조물 거리며 중얼거렸다. 운동하지 않는 삶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그날따라 밀려들었다.
‘이제 알았니? 그러니 이렇게 살면 안 돼!’
나를 보다 못한 신이 어디선가 말해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 기회를 붙잡지 못하고 흘려보냈다. 운동 대신 해야 할 일들은 늘 많았으니까. 일하느라 연애하느라 친구 만나느라... 하루는 늘 모자랐다. 운동은 늘 내일의 할 일 목록 맨 밑에 있었고, ‘내일의 내일’이 되기 일쑤였다. 누군가 나에게 왜 병에 걸린 거 같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몸을 위해 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리라. 몸에 나쁜 걸 특별히 탐하지도, 오염된 환경에 오래 노출되지도 않았지만, 내 몸을 위해 특별히 좋은 무언가를 쌓아 올린 적도 없었다. 큰 해는 주지 않았지만 단단히 지켜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결국 면역을 다져두지 못한 몸은 삶의 파도 앞에서 힘없이 무너졌다.
병을 앓고 회복을 위해 운동을 시작한 뒤에야 비로소 달라졌다. 매일 산에 오르고, 필라테스를 하고, 피트니스 센터를 다니면서 몸은 조금씩 강해졌다. 그리고 4년 간 운동과 함께 하며 깨달았다. 운동은 단순히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나 오래 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운동은 체력을 기르기 위함이고, 체력은 인생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한 조건이다. 달리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며 좌절과 환희를 겪어내는 것. 그것이 삶을 제대로 사는 방식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체력은 어쩌면 삶을 제대로 누리기 위한 기본값일런지도 모른다.
가족들은 지금의 나를 보고 “운동을 해서 건강해졌다”라고 말하지만, 진짜 나의 변화는 따로 있다.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마음껏 달려보고 싶고 내 몸이 어디까지 나를 데려갈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 그것은 바로 삶을 제대로 누려보고 싶은 마음이다. 마흔아홉의 나이에 불쑥 스무 살 청년 같은 자신감이 찾아왔다.
체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벽돌을 쌓듯 차근히 길러야 한다. 오늘의 운동, 오늘의 한 끼가 내일의 나를 만든다. 이제 그 벽돌을 천천히 쌓아가겠다. 젊음은 지나갔지만 남은 삶을 힘차게 살아내고 싶다.
언젠가는 나도 한 번쯤 솟아오르리라.
그날 워터파크에서 본, 불꽃 다이빙처럼.
*필라테스에 대해 물어보는 분들이 여럿 계셔서 다음 회는 번외 편으로 필라테스와 헬스의 장단점, 식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 마지막 회를 발행할 예정이에요. 우리 브런치 이웃들이 지금 계신 곳에서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
*사진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