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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나먼 여정 Oct 14. 2023

비행기 모드로 바꾸어 주시기 바랍니다.

삶의 낙이 없다는 남편에게 고함

밤에 잠이 오질 않는다. 남편 때문이다. 정확히는 남편이 한숨처럼 내뱉은 “삶에 낙이 없어, 낙이.” 그 한 마디 때문이다.

 

 평소처럼 남편은 퇴근 후 저녁 식사를 하고나서 쓰레기를 버렸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을 씻긴 후 일부러 들으라는 건지 설거지 하는 내 옆에 와서 저렇게 말했다. 고작 그거 도와주면서 그런다고 한마디 하려다 아이들 앞에서 목소리가 커질 것 같아 꾹 참았는데 자려고 누우니 다시 또 속이 부글부글 하는 것이다.

 

 웃겨, 누군 삶의 낙이 있는 줄 아나봐. 내가 더 일을 많이 하면 많이 했지, 고작 그거 도와준다고 생색낼 일이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아이들도 다 잠들었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작은 방에 있을 남편에게 따지러 갔다. 문을 벌컥 열었더니 웅크리고 자는 남편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혼자 자기를 무서워하는 첫째를 위해 오늘도 아이와  좁은 침대에 낑겨서 자고 있었다. 그냥 뒤돌아 조용히 문 닫고 나왔다. 닫힌 문 틈으로 그의 코 고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눈 뜨면 출근이고 퇴근하면 육아가 시작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남편은 연애시절엔 신작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보던 영화관 VIP였다. 어쩌다 가끔 영화를 보던 나와 달리 좋아하는 영화는 몇 번이고 다시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기껏해야 상영이 종료된 영화나 다운받아 핸드폰으로 본다. 그것도 아이들 재워놓고 밤에 보다보니 매번 영화가 끝나기도 전 잠들어 버리기 일쑤다. 취미 생활조차 이런데 시간 조율을 해야 하는 친구들과 만남은 더욱 쉽지 않아 그가 약속이 있는 날은 일년 중 손에 꼽았다.

 

 이 사람은 대체 언제 즐거울까? 문득 그가 2년 후에 나와 가기로 한 스페인 여행에 대해 얘기할 때 활기가 넘쳤던 게 생각났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남편은 여행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잘 웃지 않는 그였지만 여행에서 찍은 사진에서만큼은 늘 활짝 웃고 있었다. 핸드폰 갤러리에서 예전 사진들을 둘러보다 웃는 그의 모습을 보며 가슴 한 켠이 철렁했다. 어쩌면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하는 그의 발목을 내가 잡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의 행복에 나와 아이들이 방해가 된 걸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당장이라도 남편에게 여행을 다녀오라고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며칠 간 내가 애들을 홀로 보기로 하고 남편이 국내로라도 며칠 여행을 다녀오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그의 말대로 삶의 낙이 생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게 맞는 걸까. 매번 여행을 보내 줄 수도 없을 뿐더라 그렇게 해야 남편이 행복하다면 결국 우리가 떨어져 있어야만 그가 행복하다는 뜻이었다.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생각이 빙글빙글 꼬리잡기를 하는데 아주 오래 전, 그와 함께 보았던 영화한 편이 떠올랐다. 시간여행을 하던 남자에 관한 영화, <어바웃 타임>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과거로 되돌아가 놓쳤던 첫사랑도 잡고,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도 한다. 하지만 여러 사건들을 통해 그는 결국 더 이상 시간여행을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영화의 막바지에 다달아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제 난 시간 여행을 하지 않는다. 단 하루조차도. 그저 내가 이날을 위해 시간여행을 한 것처럼 나의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완전하고 즐겁게 매일 지내려고 노력할 뿐이다. ’

 

 바로 그것이었다. ‘오늘이 나의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 ‘완전하고 즐겁게 지내려는 노력’이 지금의 나와 남편에게 필요했다. 일단 나부터 남편을 그렇게 봐야만 했다. 어제도 보고, 오늘도 보고, 내일도 볼 지긋지긋한 얼굴이 아니라 오늘 하루도 우리 가족을 위해 밖에서 힘쓰다 온 소중한 사람이자 나의 단짝으로 그를 볼 일이었다. 자잘한 집안일에 치여 얼굴을 붉히는 대신 서로를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우리가 함께 하는 지금을 돌아오지 않을 여행지에서의 하루처럼 여길 수 있다면 우리의 매일은 총천연색을 띈 다채로운 시간이 될 터였다.

 

 그러니 마음을 비행기 모드로 바꾸어 놓아 일상을 여행하듯 살자고 남편에게 말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세상의 소식과 다른 이와의 비교는 잠시 꺼두고 대신 지금 우리 눈앞에 놓인 것들을 충분히 즐기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자고 말이다. 그리곤 삶의 낙을 찾던 남편을 위해 오랜만에 낙지볶음을 요리하기로 했다. 빨간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아주 매콤하게 해 놔서 남편과 나의 눈물, 콧물을 쏙 빼야지. 그래서 평소보다 더 못나진 서로의 얼굴을 보며 깔깔 웃어대고 나면 이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신혼여행으로 갔던 파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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