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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나먼 여정 Oct 14. 2023

Watch your step! (계단주의)

작은 단계를 무시할 때 생기는 일에 대하여

 이왕 돈 들여서 사 준 장난감이니 잠시라도 나를 육아에서 해방시켜줬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내 시간을 더 잡아먹는 장난감이 있다. 어쩌다 밟기라도 하는 날엔 극강의 고통을 겪게 되는 그 것, 바로 레고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레고를 좋아하지 않았다. 완성하기까지 거쳐야 하는 과정들이 너무 지루해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만들어 달라고 졸라대는 아이들 탓에 억지로 하다보니 자연스레 레고의 특징을 터득했다. 기초작업에 시간과 공을 제일 많이 들인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을 바닥까지 꼼꼼히 만들어야 할 때면 이런 과정은 생략해도 된다고 투덜거리다가 마침내 완성된 모습을 보고나면 꼭 필요한 과정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레고만큼 비싼 장난감은 아니지만 종이접기 또한 이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반듯한 정사각형 색종이를 이리저리 접다보면 어느 새 그럴듯한 작품이 완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 과정 중 대강 접고 넘기거나 종이 끝을 제대로 맞추지 않은 단계가 있다면 무조건 실패다. 제대로 된 모양이 나올 수 없다. 결국 레고든 종이접기든 작지만 사소한 단계들을 모두 정확히 거쳐야만 한다. 건너뛰거나 대강해도 되는 단계가 없는 것이다. 작은 블록 하나, 접어서 만들어진 선 하나가 모여 작품이 완성된다. 살아가는 것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몇 년 전 겨울, 어느 슬로프 위에서도 절실히 느끼지 않았던가.      

 

 어쩌다 청소년 단체 하나를 맡았던 해였다. 그 해 마지막 활동인 스키캠프에 학생들 인솔차 참여했다. 주최측은 인솔 교사들 또한 스키 강습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어렸을 때 스키를 배운 경험이 있는 나는 당시 초급에서 무리 없이 탈 수 있었다. 하지만 많은 선생님들이 스키가 처음이었고(모두 제주도민이라는 점을 기억해 주시라) 한명이 휘청거리면 도미노처럼 우당탕탕 몇 명이 넘어지던 탓에 강습은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그 날 하루 그들 속에 있었던 나는 굳이 강습 받을 필요가 없겠다고 판단해 캠프 기간 내내 홀로 스키를 탔다.


 그러다 같은 방을 쓰던 선생님의 권유로 딱 한 번, 마지막 강습에 참여하게 되었다. 가보니 며칠 사이에 모두 스키에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다들 능숙하게 초급 슬로프를 내려오자 강사는 종강기념으로 중급 코스에 올라가자고 제안하였다. 그동안 강습에 빠졌던 나 또한 리프트에 올랐다. 마침내 며칠 전만 해도 슬로프 위에 서있는 것조차 힘들던 사람들이 천천히, 그러나 안정적으로 곡선을 그리며 중급 코스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강사의 폴대를 잡아 겨우겨우 내려가던 사람이 있었는게 그게 바로 나였다.


 그 후 계단주의 스티커를 볼 때마다 나는 그 날의 뼈저린 기억을 떠올리며 작은 단계를 우습게 보지 말고 한 번에 한 칸씩 제대로 밟아야 한다고 되새긴다. 그리고 번거롭거나 힘든 순간을 만날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이 내가 꼭 거쳐야 하는 과정임을 다시 한 번 나에게 당부한다. 그러한 것들에는 규칙적인 일상과 주기적인 운동, 핸드폰을 내려놓고 취하는 휴식시간이 포함된다. 매번 아이가 말을 걸 때마다 하는 눈맞춤이나 잠자기전 아이에게 해주는 작은 의식들도 결코 빠뜨리지 않는다. 나의 삶이 단단하게 여물어 언젠가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길 바라며 나는 오늘도 한 칸씩 정확히 계단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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