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미 여러 번
아들에게,
엄마가 최근에 집안 구조를 조금 바꾸는 과정에서 너의 독서책상을 치워버렸어. 거기에 잘 앉아서 책을 보지 않길래 없어도 되겠다 싶었지. 너는 너의 것이라고 된 것이 없어진 게 싫었는지 독서책상이 없어진 게 싫었는지, 없어졌다고 히이잉 하며 울상을 지었어.
그렇게 우리 집 가구 재배치가 시작되었어. 가족 세 명이 함께 쓸 독서책상을 마루에 놓으려면 이걸 이렇게 저걸 저렇게… 옮겨야 할 가구들이 도미노처럼 줄줄이 늘어섰더라. 가구 자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곰팡이까지 발견되었지. 일이 자꾸 커졌지만 그래도 엄마아빠는 한번 뒤집어엎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어.
지금 마루에 침대가 떡하니 놓여있구나. 이렇게 이틀밤을 지내고 내일이면 드디어 침실로 복귀할 수 있겠어. 이 정도면 거의 이사에 맞먹는 노동 같아. 주말을 다 쏟아붓고 오늘까지 부었는데도 정리가 덜 끝났어. 내일이면 끝나겠지. 대략 실현이 가능한 희망사항 같아. 마루에 넓은 책상을 두고, 그 위를 밝게 비춰줄 등을 책상 옆에 세우고, 의자를 두지. 엄마는 나름 오래전부터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예상에 없게 일이 진행되네.
예상에 없던 일은 또 있었어. 동네 도서관에서 신청받던 동화책 독후활동이 폐강되었어. 신청자가 너뿐이어서 그렇다더구나. 충격적이지 않니? 그런데 하는 김에 엄마도 신청해 본 성인 에세이 쓰기 강좌는 폐강되기는커녕 수강인원이 일곱 명 정도가 모였지. 원래 목적과는 일이 다르게 진행되고 있어. 그걸로도 모자라서 다음 과제 주제가 “나를 뒤흔든 말“이라는 거야. 갑자기 내 과거로 깊이 들어가 버리는 주제를 가지고 낯선 사람들 앞에서 읽을 생각을 하니 엄마는 조개라도 된 양 입을 다물고 싶어 져. 지금은 나를 진짜로 뒤흔든 말과 생각을 빼고, “뒤흔들었다고 주장하는” 가짜 글감을 생각 중이야. 뭘 쓰면 그럴듯하게 척할 수 있을지.
최근엔 소름 끼치는 순간이 있었어. 네게 무심코 한 말이 누군가에게서 내가 많이 들었던 말이었어. 그렇게 듣기 싫던 말을 내가 진짜 하고 있더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런 경우가 이미 수차례 있었더라고. 부모든 누구든 가까운 이의 단점은 싫다 싫다 하면서 배워버린다는 말이 있지. 엄마도 똑같네. 설마 내 내면의 풍경이 그 사람의 그것을 닮아있는 걸까. (이 대목에서 소름이 끼쳤지) 네게 말할 때 특히 주의해야겠어. 내 구김살이 네게까지 옮겨가는 건 생각만 해도 미간에 주름이 설 정도로 싫구나. 이 생각에 대해서도 과제에 쓸 수는 없겠어.
너도 자라면서 엄마처럼 속내를 감춘 말을 할 때가 오겠지. 어쩌면 이미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아. 엄마는 가끔 널 보며 “얘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건가?” 생각해. 네가 자라면서 점차 그런 의문이 생기더라. 내 아기, 좀 천천히 자랐으면 싶은데, 벌써 마음에 혼란을 품은 소년이 되었네. 표정과 말이 따로 놀기도 하지. 너의 내면이 내 것과는 딴판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네 말을 듣다 보면 나와 너무 비슷한 생각을 거쳐가고 있어서 그저 미안하구나. 이래서 그때 의사가 육아는 삼대를 간다고 말했던 걸까. 에세이 과제가 피곤한 몸에 깃든 마음을 마구 뒤흔드는구나. 그래도 확실한 사실 하나. 너를 무한히 사랑한다는 것.
오늘도 신나는 하루가 되길 바라며,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