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임원급에 해당하는 선배님들과 식사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데, 한 선배님께서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밥 먹자고 부르면 좋아하지 않는다지?”라고 질문하셨다.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는데, 옆에 계시던 다른 선배님께서 “좋은 소식을 줄 게 있거나 칭찬해 주려고 부르면 좋아하면서 오더군요. 그냥 친해지자고 부르면 싫어하겠죠.” 하고 답하셨다. 현답이었다. 인간사에서의 모든 갈등은 누구 한 쪽의 잘못이 없다. 백지장은 맞들지 않으면 찢어지지 않는다.
소위 MZ세대로 불리는 청년층은 흔히 조직 내의 위계질서나 효율성에 저항하는 존재로 묘사되곤 한다. 직장내에서 ‘MZ세대 같다’ 라는 말은 새로운 형태의 비난이다. 그러나 이 비난을 쉽게 대화에 올리는 사람들은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집트 벽화에도 ‘요즘 젊은 이들은 버릇이 없다’ 라고 고대 문자로 쓰여 있듯이, 기성세대는 원래 젊은 세대가 되바라졌다고 생각하기 쉽다.
'되바라지다'는 말이 ‘얄밉도록 지나치게 똑똑한 체하다’ (박완서 소설어사전) 로 정의된다고 할 때, 당신은 스스로보다 젊은 세대의 지적 능력에 위협을 느끼는 것이 아닌지 반문해야 한다. 그 위협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두려워 동년배와 담배, 술을 나누며 타자 비난을 회피 기제로 삼은 것이 아닌지 반문해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호봉제에 나타해진 자신을 다시금 채찍질하여 정신을 젊게 만들고 공부의 세계로 뛰어들어야 한다.
두 번째로, '되바라지다' 가 ‘튀어져 나오고 벌어져 아늑한 맛이 없다’ (국어사전, 네이버) 로 정의된다고 할 때, 당신은 젊은 세대에게 당신이 기대하는 만큼, 혹은 자신이 과거에 했던 만큼 조직에 대한 희생을 하지 않으려 하는 개인주의를 비판할 것이다.
가장 큰 호황을 누리고 사회 경제적 변화가 컸던 시기를 경험한 X세대에게는 ‘성취’가 궁극적 삶의 목표였으며, 성실, 효율, 그리고 조직을 위한 자기 희생 (전체주의)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필수 요건이었다. 이는 삶의 주된 목표가 ‘생존’ 이었던 그들의 삼촌, 아버지 세대 (70년대 이전 태생)가 가져야 했던 가치들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언급하였듯 이러한 가치는 MZ세대에게는 피로감을 유발한다.
그들이 유년기부터 바라본 사회는 생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었고, 장기화된 불황으로 인해 사회, 경제적 계층 변화가 적은 시기였다. 무엇보다 장기화된 불황의 시대를 물려준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감이 이들 의식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삶의 실질적 변혁을 꾀할 수 없는 노력은 무의미하므로, 성실이나 효율은 이들에게 피로한 가치이다. 개인의 자유와 재미를 침해하는 전체주의는 더욱 불합리하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 우리가 8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 그러나 우리는 사실 모두 MZ세대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기대 수명은 세계 최고수준으로, 현재 여성 약 87세 남성 약 81세 (만으로)이며 향후 더 늘어날 것이다.
지금 중년에 해당하는 나이 일지라도 40-50년 이상의 삶을 더 살아야 할 것이며, 앞으로 우리가 누려야 할 사회는 X세대나 그 아버지 세대가 누리던 그것이 아닌 MZ세대가 자라면서 보아온 바로 그 세대이다.
이들이 경험하는 니힐리즘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숙제이다.
> 모두의 숙제, 삶의 목적 찾기.
니힐리즘의 극복과 삶의 목표를 찾는 시도는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언급되고 있다.
니체는 낙타-사자-아이의 단계로 인간 정신의 3단계를 분류하였는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낙타, 용기를 내어 저항하어 자유를 얻어내지만 창의력은 없는 사자, 타자가 아닌 자신에 순종하며 새로운 가치를 빚고 의미와 재미를 찾아내며, 과거의 악습이나 상처를 손쉽게 잊고 새로운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의 단계이다.
‘미움받기 위한 용기’의 기시미 이치로는 어두운 밤을 떠다니는 배와 같은 삶에서, 궁극적 목표가 될 길잡이 별로써 ‘타자 공헌’을 꼽았다. 공헌감, 즉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각’ 은 보상을 바라지 않고 타자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이타적인 정신으로 소속감과 양심을 충족시켜 자유롭고 행복한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보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로 유명한 철학자이자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명확히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만 양심은 삶의 의미를 맡아낼 수 있는 (sniff) 수단이라고 하였다. 양심은 윤리적 본능으로 우리는 자유의지와 책임감을 가지고 이를 따를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자아 초월적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양심을 삶의 방향으로 삼아 우리는 기존의 자신에 비해 더 발전된 존재가 될 수 있으며, 권태를 극복하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아초월을 멈추는 순간 의미를 상실하고 좌절하기 때문이다.)
다소 어려운 용어들을 언급하였는데, 나는 이들을 요약하기 위해 ‘모든 감정은 정돈하면 사랑과 두려움 두 가지 뿐’ 이라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의 저자)의 말을 떠올리고 싶다.
우리는 삶의 목표 발견과 행복 추구를 위하여 감정을 정돈해야 할 것이며, 또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할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면 타자에 대한 사랑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게 된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의 재화를 빼앗아 본인의 배를 불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고요히 하고 그 안에 잔잔한 행복을 끊임없이 채운다는 것이다 (필자 brunch ‘합격의 기쁨보다 소확행’ 참조).
잔잔하고 진실된 행복은 대개 양심의 방향에 일치하며 이는 소속감이나 사회에 대한 공헌감을 포함하는 행위로 드러난다. 욕심 (불필요한 재화를 위해 타인을 약탈하고자 하는 마음)이 감소하며 공동의 번영이 자신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배려와 성실성의 덕목을 갖춘다. 이들의 행위는 타인이나 조직에 의해 강요되지 않으며 스스로의 발전을 꾀하는 가운데 자발적으로 발생한다.
어렵다...
너무 어렵다면 미안하다. 그렇지만 삶의 목표에 대한 논의가 너무 쉬워도 안되지 않을까 싶다.
보다 통상적인 언어로 돌아와서, 당신이나 누군가가 MZ세대를 비판하고 있다면 그 또한 자기 뼈를 뜯어먹는 거나 마찬 가지인 '남 탓' (필자 brunch ‘남 탓이 결국 제 탓인 이유’) 에 불과하다. 언제 태어난지에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현재를 공유하는 동반자이다. 양심의 충족, 고요한 마음, 행복을 채울 수 있는 지혜와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용기는 모든 세대에게 필요한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