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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권태주 Apr 22. 2024

고향

고향



고향에 나를 기다리는 집이 있고

어머니도 계실 적에는

늘상 수구초심이었는데

어머니도 안 계시고

고향 소식도 감감해지니

그리움도 마른 샘물처럼

바닥을 보이네.

한 해 두 해 자꾸만 세월은 가고

희미해지는 고향 기억

갈대는 고향 아닌 갯벌에도 자라고

억새는 고향 언덕 아닌 곳에서도 무성하여

나 고향을 잊고 사네.

부초처럼 떠다니고 있네.

ㅡㅡㅡㅡㅡㅡㅡ

*에필로그  내 고향은 충남 태안군 안면읍 신야리 목밭이다. 고려시대 삼별초가 몽골군에 맞서 항전하기 위해 강화도를 떠나 안면도 병술만에 진지를 구축하고 안면송을 목재로 공급하던 곳이 목밭이었다. 6 가구가 모여 있는 곳이 내 집이 있는 큰목밭이고, 7 가구가 있는 곳이 작은목밭이다. 할아버지는 고향이 충청남도 보령군 청소면이시다. 지금도 권씨 집안 시제時祭를 지내는 곳이 청소이다. 일제 강점기에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시고, 평생을 선비로 살아가신 분이다. 집안에서는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는 입장인지라 마침 안면도에 바다를 간척한 곳이 있어서 할아버지를 그 간척지의 마름으로 보내셨다.


가끔 육지에서 온 방물장수가 온 날이면 할아버지의 사랑방은 할머니와 동네 여인네들의 대화방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지금도 머리에 깊이 남아 있는 한 사람. 시각장애인이었던 함표 아저씨가 있다. 이분은 마을의 대소사大小事가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나셔서 음식을 드시고, 할아버지 사랑방에서 며칠씩 기거하다 다른 마을의 대소사가 생기면 떠나가곤 하였다. 함표 아저씨는 우리에게도 점을 쳐 주기도 했는데 붓통 같은 곳에 대나무로 깎은 여러 가지 표식이 있는 기구를 흔들어 점을 봐주곤 했다.


  어린 시절 카랑카랑하신 목소리와 긴 수염, 늘 한복이나 마고자 차림의 할아버지가 어제 일처럼 뇌리에 생생하다. 그래서 ‘아름다운 유년의 기억들은 퍼내고 퍼내도 끝이 없는 우물물과 같다’라고 바슐라르는『몽상(夢想)의 시학詩學』에서 말하고 있다. 지난가을 고향에 가서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 집 주변을 포클레인을 빌려 정리했다. 퇴임 후 머물 집을 미리 준비하고 있다.



유년 시절


  어렸을 때 기억하는 내 집은 충청도 양반집 구조로 솟을대문 옆에 사랑방이 있었다. 그리고 바깥채에는 섬마을로 오신 초등학교 선생님 부부가 기거하셨다. 대가족 체제여서 식사도 밥상이 세 개나 들어왔다. 맨 먼저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겸상하시고, 두 번째는 남자 형제들의 밥상, 맨 나중은 할머니와 어머니, 형수님의 차지였다. 농사도 온 가족이 함께하는 체제라서 논농사와 밭농사에 가족들이 매달렸다. 추수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바다에서 굴 수확과 김 양식을 하며 겨울을 보냈다.


  다섯 살 정도로 기억되는데 여름 어느 날 동네 형들과 바다에 가서 물놀이를 했다. 형들은 깊은 곳에서 물놀이를 하고 나와 친구는 갯고랑에서 미끄럼을 타며 놀았다. 그런데 밀물이 들어오는 시간 때여서 갯고랑에 물이 금방 들어왔다. 내가 미끄럼을 타고 갯고랑에 빠졌는데 바다가 깊어져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귓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와 철썩대는 물결 소리만 들렸다. 나는 최대한 큰 대자로 누워 하늘만 보고 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물놀이하던 형들이 나를 발견하고 뛰어와서 나를 건져주었다. 다섯 살로 끝날 내 운명의 시계가 다시 작동하는 아슬아슬한 사건이었다.


  여섯 살 때는 어머니께서 맹장염에 걸리셨다. 섬마을인 안면도에는 병원이 없어서 배를 타고 대천으로 가셔야 했다. 막내인 나를 두고 가기가 걱정되셨는지 같이 가기로 해서 황포 부두까지 따라갔다. 모두 배를 타러 올라가는데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배를 타지 않고 집에 가겠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부모님만 배를 타고 떠나시고 나는 동네 영숙이 누나를 따라 집에 오게 되었다. 영숙이 누나는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이 뒤깜벌 산에 아주 큰 호랑이가 살어. 너 내 말 잘 안 들으면 호랑이에게 물려가게 할 겨!"

  나는 정말 호랑이가 사는 줄 알고 영숙이 누나 뒤에 바짝 붙어 치마를 잡고 덜덜 떨며 집으로 왔다. 동네 꼬마들이 자주 영숙 누나 집 앞에 있는 밤나무나 감나무에 매달려 귀찮게 해서 하는 복수였을 것이다. 그렇게 간신히 집에 와 보니 안마당에 감씨가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형이 할머니께 떼를 써 단감을 혼자 차지해서 먹어버린 것이다. 흑흑~~~ 혼란의 시기가 지나고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한 나이가 여덟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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