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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권태주 May 10. 2024

대숲

대숲     




1

한 올 한 올 실바람 모여들어

성긴 바람 댓잎 아우성을 부른다

툇마루 달린 메주 덮은 댓잎은

바다를 닮아 파랗고

대숲에 걸린 달에 놀란

강아지 짖어 대는 밤

안개는 스멀스멀 대숲을 향하여 기어간다


     

2

조카 녀석 잠든 얼굴엔

대낮 소꿉장난이 숨어있고

어머니 마른기침

대숲 가르며 비명이 된다

함석지붕 처마 밑으로

달빛은 잠식해 들어와

자정 알리는 시계추

깨우는 시간


    

3

뜰에 나서 귀 기울이면

풀벌레 기척 소리

비둘기 깃 퍼덕이는 소리

몸 비비며 울어대는

댓가지 요란함이 들려온다

대숲 너머 나 뒹구는 쟁기만

새벽을 부르고


     

4

길 따라 떠나신 할머니 모습

대숲에 어릴 때

먼바다에서 들려오는

고동 소리 정겹다

청댓잎 숨 몰아쉬며 잠들어도

뿌리는 부지런히 수액을 더듬는다

대숲에 달빛 숨어드는 밤


    

-1985, 공주교대 계룡문학상 당선작


*에필로그-    나의 대학시절1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찾아온 고향 집, 어머니께서는 반갑게 맞아 주셨지만 내 몸과 마음은 3년 동안의 객지 생활로 지쳐 있었다. 일단 몸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서겠다는 다짐을 하고 한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2월 10일 고등학교 졸업식 날 공주에 있는 학교에 갔다. 본인이 희망하는 대학에 합격해서 좋아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우리 반 1,2,3등 모두 재수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나중에 차희0은 서울대에 합격했고, 김상0은 충남대 의예과에 합격해서 의사가 되었다.

  졸업 후 나는 고향 집 골방에 공부방을 만들었다. 문제집을 사서 풀고, 밤에는 교육 방송을 라디오로 들으며 공부했다. 지겹던 이과 과목도 던져버리고 세계사와 사회문화 같은 문과로 전향해서 독학을 했다. 시골에서 바쁜 농사철이 되면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골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았다. 대신 헛간에서 키우는 토끼 몇 마리에게 줄 칡순이나 민들레 잎을 가져다줄 때만 밖으로 나왔다.

  6월쯤이 되니까 몸도 많이 회복되고 토끼들도 번식해서 40마리가 넘게 불어났다. 당연히 먹는 풀의 양도 많아져서 가끔 토끼를 잡아 몸보신했다. 하지만 여름 장마가 오자 병이 돌아 많은 토끼가 죽고 말았다. 가을이 오자 농사짓는 큰형이 나에게 사관학교 시험을 보라고 권했다. 이종사촌 중에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지휘관이 된 함원0 형님을 보고 나에게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권하셨던 것이다. 함원0 형님은 해군제독 소장으로 정년 전역을 하신다. 나 내키지 않았지만 원서 접수를 하고 대전고등학교에서 시험을 보게 되었다. 전날 예비소집장에서 고등학교 동창인 강기0과 하숙집에서 같은 방을 쓰던 이기0도 만났다. 반가운 마음이었지만 여관방에서 뒤척이며 군인의 길은 내가 갈 곳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다음 날 수학 문제를 절반만 풀고 엎드려 있었다.

  다시 입시 준비의 나날을 보냈다. 다른 친구들은 서울의 종로학원이나 대성학원에 가서 공부한다는데 혼자 공부하는 것이 불안하기도 했지만 최선을 다했다. 두 번째 학력고사를 보는 11월 아침부터 진눈깨비가 내렸다. 친구의 자취방에 몇몇이 모여 밤을 새우고 시험장에 갔다. 첫 번째 학력고사보다는 쉽게 출제가 되었지만 좋은 점수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시험장에서 친구의 가족들이 싸 온 보온밥통의 밥과 반찬을 나눠 먹고 오후 시험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고향 집에 내려와서 겨울을 보냈다.


  학력고사 성적이 발표되고 나서 기대보다 못한 성적에 실망하였지만 그래도 내가 가고 싶은 Y대학 원서를 사려고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는데 옆자리에 앉은 노신사가 계셨다. 그분은 나의 모습을 지켜보시더니 넌지시 물었다.

  "어느 대학에 지원하려고 하는가?"

  "네, 서울에 있는 Y대학에 가고 싶어서 원서를 사러 갑니다."

  "그런가? 공주 출신인가?"

  "네, 공주고를 졸업했습니다."

  "아, 그래. 내가 선배이네. 난 00교육대학 교수라네."

  고속버스 옆자리에 앉았던 노신사와의 대화는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까지 가는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나중에 이 분과의 인연이 다시 시작되게 되었다.

  서울 가는 고속버스 옆자리에서 만난 노신사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과천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 가서 대학 진학에 대해서 상의를 드렸다. 작은아버지께서는 법무부에서 오래 근무하셨는데 정부종합청사가 과천으로 와서 근무하고 계셨다. 그래서 진로란에 항상 판검사를 적었었는데 고등학교에서 이과를 선택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틀어지게 되었다. 내가 가고 싶었던 Y대학은 사립이어서 당시 등록금만 60만 원이었다. 현재로 따지면 600만 원이 넘는 거금이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큰 형님과 어머님께서는 현실적으로 사립대학을 보낼 형편이 못되어서 작은아버지께서는 강력하게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 진학을 권하셨다. 교육대학은 당시 RNTC(Reserve Non-commissioned Officer's Training Corps-교육대학에서 학군하사관 후보생과정 이수 후 교육법에 의한 의무종사기간(4)과 추가기간(3) 복무 시 현역복무와 동등하게 인정해주는 제도를 말한다.)라는 부사관 제도가 있어서 대학 1, 2학년 동안 매주 1일 군사훈련과 여름방학 때 3주 사단 훈련소에서 훈련과정을 거치면 군대복무를 대체할 수 있었다. 이 제도는 1990년 국공립 사범대생에 대한 책임의무발령제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내려져 1992년에 교육대학도 폐지되었다. 결국 진로를 교육대학으로 결정하고 다시 공주에 내려왔다.


  고등학교 3년을 보낸 공주에서 다시 대학 4년을 보내야 한다니 답답한 마음과 막막함이 밀려왔다. 고등학교 때 하숙했던 집에 다시 가서 하숙을 정하고 보니 공주란 곳과 나는 무슨 질긴 인연이 있나 생각되었다. 학과선택 이후 입학식 장에서 나는 또다시 깜짝 놀랐다. 서울 가는 고속버스에서 만났던 노신사가 바로 국어교육과정의 이충O 지도교수였던 것이다. 결국 학군단교육과 지도교수와의 만남,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교육대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남학생 10명과 여학생 36명 총 46명의 학생들과 4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교대에 온 남학생들은 대부분 재수나 삼수를 하고 군대 면제라고 하니까 온 친구들이 많았다. 대학 교육과정도 2년제에서 4년제로 바뀐 지 2년째다 보니까 교수님들의 실력도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남학생들을 중심으로 마곡사나 금강가로 야유회를 가서 친목도 다지고 목요일 군사훈련 날에는 여학생들이 조를 짜서 점심식사도 준비해 줘서 고마웠고 단합이 잘 되는 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과 공부보다는 도서관에서 영미 시인들의 시와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시집 , 한국대표소설집 탐독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연히 학생회관 게시판에 학보사 수습기자 모집이라는 게시글을 보고 호기심에 지원하게 되었다. 남학생 2명, 여학생 3명이 수습기자로 뽑혀 학교 신문을 발간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기사가 완성되고 서울 등촌동에 있는 인쇄소에 가서 숙박을 하며 일일이 활자 한 자씩 교정을 보고 신문이 발행될 때의 흥분과 잉크냄새가 참 좋았다. 6개월의 수습기자 과정을 거치고 대학 2학년이 되어 정기자로 승급하여 직접 기사를 작성해서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2학년 늦가을 무렵 현재 총학생회의 전신인 학도호국단 회장 선거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는 간선제로 과대표와 부대표들이 체육관에 모여 회장 부회장을 투표하는 선거였다. 나는 2학년 과대표로 봉사한 경력을 바탕으로 회장선거에 뛰어들었다. 고등학교 동문들과 학보사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다른 과 대표와 부대표 후보들을 바탕으로 선거 조직을 완성했다. 하지만 변수가 발생했다. 같은 과 남학생 한 명이 동문들의 지지를 받아 회장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결국 과대표로 뽑혀야만 회장 선거에 출마하는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당시 지도교수이신 이충O교수님은 고등학교 선배이시라 나의 당선을 지지하고 계셔서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결국 선거 당일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대학 입시에 실패한 이후 또다시 도전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인생을 조금씩 배워가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든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그 이후로 나는 무슨 일을 할 때 돌다리도 두드린다는 심정으로 철저함과 계획성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나는 학보사를 퇴사하고 국어교육과정의 학회장으로 선출되어 과의 일에 집중하였다. 덕분에 학보사의 동기였던 여학생을 만나 평생의 연을 맺게 되었다. 또한 대학에서 상금을 걸고 공모한 계룡문학상에 당당히 당선되어 시인으로서의 꿈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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