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편 연재 소설ㅡ《세월호, 그날 이후》
4편-[무너진 꿈]
이른 새벽이었다. 간밤의 즐거움과 환호는 모두 밤의 침묵 속에 잠잠해졌다. 서해의 푸른 물결만이 군산 앞바다를 지나 목포로 가는 세월호의 뱃머리에서 출렁거렸다. 가끔씩 날아온 갈매기 몇 마리만이 끼룩대며 세월호 뒷전에서 먹이를 찾았다. 각 선실에서 잠든 단원고 학생들도 아직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잠든 4시경 동철은 잠에서 깨어 선실 밖으로 나가보았다. 긴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라 외부와 연결된 비상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비릿한 갯내음이 코로 번져왔다. 자주 가보지는 못했지만 어릴 때 할아버지를 따라가 시화방조제에서 낚시를 해보았다. 낚시에 지렁이 미끼를 끼워 물속에 던지면 후드득하며 낚싯줄이 팽팽해지고 물고기와의 싸움이 시작됐다. 결국 낚싯대를 들어 올리면 큰 망둥어가 매달려 올라왔다. 어른들은 그래서 손맛을 보는 재미로 낚시를 한다고 했다.
저 깊은 바다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릴 적 읽었던 해저 이만리의 노틸러스 호를 이끌던 네모 선장이 지금도 바닷속에서 핵잠수함으로 선원들과 여행을 하고 있을까? 파리 자연사 박물관 아로낙스박사와 조수 콩세유, 네드랜드의 10개월 간 해저 여행은 결국 탈출로 막을 내리게 된다. 동철의 상상력은 어느새 여객선 세월호와 잠수함 노틸러스 호가 만나는 것으로 발전한다. 이번 수학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미래과학 상상그리기대회에 이 장면을 출품하리라 다짐했다.
잠수함 노틸러스호와 세월호가 만나는 상상화 앞으로 화가가 되어 SF 상상화를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동철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바다에 외쳤다.
"사랑한다. 희정아. 우리 멋진 미래를 만들어 보자!"
조그만 섬들이 세월호 옆을 지나갔다. 어느덧 목포가 가까워지나 보다 동철은 생각하고 친구들을 깨우러 다시 선실로 내려갔다. 친구들도 하나둘씩 잠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침 식사 시간이 7시부터 9시까지라서 여유가 있었다. 오후 1시쯤이면 넉넉히 제주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동철은 짐을 정리하고 희정이 있는 방으로 가보았다. 아직 희정은 어젯밤의 여독이 남아있는지 식사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동철은 친구들과 몇 명이서 식당으로 올라갔다. 7시인데도 벌써부터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식사는 간단하게 하고 선상으로 다시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을 예정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동철은 희정에게 문자를 보냈다. 8시 30분까지 세월호 선상에서 기념사진을 찍자는 것이었다.
세월호는 어느새 전라남도 진도를 지나 조도면 맹골수도 해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옛날부터 맹골수도 해상은 물살이 빠르고 거칠어서 고려시대 때는 강진에서 만든 고려청자를 싣고 개경으로 가던 공물선들이 침몰하는 사고가 자주 일어나던 곳이었다. 그래서 세월호와 같은 여객선들이 맹골수도 해역을 우회해서 제주도로 운항했다. 하지만 4월 15일 두 시간 정도 늦게 출발한 세월호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맹골수도 해상으로 운항을 결정했다. 친구들과 선상에 있던 동철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희정이 올라오지 않자 8시 45분 희정을 찾아 선실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통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데 정확히 8시 48분 배가 갑자기 회전하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계단으로 구를뻔했으나 난간을 잡고 버텼다. 간신히 성철의 반이 있는 선실에 내려왔을 때는 배가 이미 기울기 시작했다. 선내에서는 방송으로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선실에서 조용히 대기하라고 여러 번 반복하고 있었다. 성철도 담임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구명조끼를 입고 기다렸다. 10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은 없이 배는 더 기우는 것 같았다. 동철은 선상에 같이 있던 친구들도 걱정되고 희정도 선상으로 올라왔는지 궁금한 마음에 구명조끼 3개를 들고 담임선생님과 선실 복도로 나왔다. 하지만 기울어진 복도를 걷는 것도 힘들었다. 비상구 계단을 통해 위쪽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거의 선상으로 올라왔을 때 친구 두 명이 난간을 잡고 떨고 있었다. 재빠르게 구명조끼를 입혔다. 담임선생님은 아무래도 위험함을 직감했는지 다시 선실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동철과 친구 두 명을 서로 의지해 난간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이때 기울어진 배 위로 경찰 헬기가 날아오기 시작했고, 여러 척의 어선들이 기울어진 세월호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다행히 동철과 친구 2명은 헬레곱터에서 내려준 구명줄을 타고 구조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실에 있던 희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9시가 넘어가자 선실에 있던 단원고 학생들은 더욱 두려움에 휩싸였다. 선체가 기울면서 여행 가방들이 미끄러져 몇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핸드폰을 꺼내 119에 신고하고 가족들에게 전화와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김초록 음악선생님은 교사방에 있다가 학생들이 걱정이 돼서 선실로 내려가 보았다. 방송에서 울려 퍼지는 선실에서 가만히 구조를 기다리라는 내용만 반복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학생들의 선실이 아래층에 있어서 가능한 대로 위쪽으로 이동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희정이 있는 여학생 방에서는 여학생들의 두려움에 떠는소리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아무래도 선실밖으로 나가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친구들을 독려해 선실 통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희정의 등에는 기타 가방이 메어져 있었다. 전기가 나갔는지 어두운 선실 복도를 랜턴을 켜고 이동했다.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김초록선생님이 내려오고 있었다. 반가움에 울음이 터졌다.
"모두들 구명조끼 입었지? 같이 선상으로 이동하자."
"감사합니다. 선생님"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있었다. 세월호는 복원력을 잃고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학생들이 구조되려면 물에 잠긴 선상이 아니라 반대편 난간을 통해 밖으로 탈출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미 바닷물이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선실 위층에 있던 일반 승객들은 쉽게 구조받을 수 있었지만 아래층에 있던 단원고 학생들은 탈출이 쉽지 않았다. 희정은 그때 핸드폰에 온 문자 중에서 동철의 문자를 보았다. 본인은 경찰 헬리콥터로 구조되었으니 가능하면 반대편 선실 난간 쪽으로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난간으로 오르기는 쉽지 않았다. 누군가가 구명줄을 내려줘야만 올라갈 수 있었다. 그때 위쪽에서 커튼줄을 묶은 줄이 내려왔다. 화물기사 한 사람이 학생들을 구조하려고 구명줄을 만들어 내려보내고 있었다. 20여 명이 줄을 타고 오르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었다. 체육복을 입은 친구들이 먼저 줄을 타고 올라갔다. 김초록선생님도 학생들을 진정시키며 한 사람씩 위쪽으로 올려 보냈다.
너무 늦었나 보다, 희정은 몇 명의 친구들과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수를 꿈꾸며 보물 1호로 가져온 기타 가방이 먼저 바닷물 위로 떠올랐다. 희정의 꿈도 무너져 내렸다.
"엄마. 사랑하고 미안해. 나 먼저 갈 게. 사랑해."
희정이 마지막으로 남긴 문자와 함께 휴대폰도 희정의 꿈과 같이 바닷물 속으로 사라져 갔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온 성철은 다시 텔레비전을 켰다. 오전에 분명히 세월호 승객들을 전원 구조했다는 내용은 없어지고 텔레비전 화면에는 물에 잠긴 세월호와 주변의 구조선들이 떠 있었다. 남자 아나운서의 급박하고 높은 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성철의 가슴도 털썩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안산의 중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자신이기에 혹시 단원고로 진학했던 제자들이 있는지 걱정이 앞섰다. 다른 중학교 교감선생들에게 전화를 돌려 안부를 물었다.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과 제자들의 소식이 있는지 알아보기도 했다. 속보에서는 구조된 단원고 학생들보다 배 안에 있는 학생들이 훨씬 많았다. 당일 10시 30분까지 모두 172명이 구조되었고, 이후 생존자는 없었다. 구조된 탑승자는 승무원 23명, 단원고생 75명, 교사 3명, 일반인 71명이었다. 선장과 승무원들은 다수가 미리 탈출하여 구조되는 어이없는 뉴스였다. 무려 300여 명이 세월호에서 탈출하지 못했다는 소식에 국민들과 유족들은 오열했다.
14시 36분경, 중앙구조본부가 승객 300여 명이 세월호에서 탈출하지 못한 사실을 최종 확인했다. 「주변 해역 대형 해상사고 대응 매뉴얼」과 「해상 수색구조 매뉴얼」에 따르면 해수 온도가 20도 미만일 때는 사고 발생 후 3일 이내 집중 수색을 실시해야 한다. 따라서 구조본부장은 한시라도 빨리 수중수색 활동에 필요한 지시를 해야 했다. 그러나 중앙구조본부가 수중수색을 위한 종사명령을 내려야 할 중요한 시점에 해양경찰청 차장과 수색구조 과장 등은 청해진해운이 구난업체 언딘과 구난 계약을 체결하도록 종용하고, 현장에 도착한 타 업체의 현장 투입을 통제했다. 이들은 당일 15시 18분부터 언딘 이사와 청해진해운 관계자에게 재차 전화해 구난 업체를 선정하는 데 관여했다. 즉 인명구조 작업보다 시급하지도 않고, 소관 업무도 아닌 선체 인양 작업에 더 신경을 쓴 것이다.
15시경, 해경은 수색 작업에 진전이 없었음에도 수색 상황과 구조 동원 세력을 과장하여 발표하기 시작했다. 해경이 발표한 상황보고서 6보에는 수중수색에 해경 118명, 해군 42명 등 160명이 동원되어 격실 등 생존자 확인을 위해 수색을 실시하고 있으며, 해상수색에는 해경 55척, 해군 17척과 관공선과 어선 27척 등 72척, 항공기 18대 등이 동원되었다고 과장했다. 또한 언론은 사실 확인을 하지 않고 이 내용을 받아쓰며 '지상 최대의 구조 작전'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당시 대통령비서실은 수색구조 현장 상황 정보를 보고 받고 있었고, 해경에게서 가족 동향도 보고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발표가 허위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수색구조 상황을 허위로 발표한 것을 문제 삼거나 수정하도록 지시하지 않았다. 수중수색을 위한 중요한 판단과 결정은 때를 놓쳤다.
18시경, 3009함에서 진행된 ‘민·관·군 상황 대책 회의’에서는 세월호의 특성으로 보아 실종자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며, 40미터 수심에서 희생자 수습 활동을 하는 것은 위험하니 수심이 얕은 곳으로 세월호를 예인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산업잠수사들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이런 제안이 합당하고 가능한지 제대로 따져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23시경부터 생존자가 직접 구조 요청을 하고 있다는 허위 메시지가 확산되고, 에어포켓에서 60시간을 보낸 후 구조되었다는 사례가 방송에서 나오는 등 여론의 흐름으로 인해 실제 세월호 상황에 근거해 논의하고 판단하기 어려워졌다. 구조본부는 치밀한 상황 분석과 신속한 의사 결정을 제때 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생존구조 활동 이외에 실종자 수중수색 계획과 희생자 후속 조치 방안을 함께 마련하지 않았다.
일분일초가 지날 때마다 애가 탔을 실종자 가족은 구조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시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럴수록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가족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구조 현황과 대책을 설명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구조 소식은 없었고,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자 현장에 모인 가족들은 크게 절망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위키 백과 수색 및 인양
수색과 구조 첫날이 지나가고 잠수부들이 동원되어 혹시 선내 에어포트에 살아있을지 모르는 생존자들에게 공기를 주입하여 생존시간을 늘리는 작업과 부력주머니인 리프트백을 설치한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더 이상 생존자는 없는지 성철의 마음도 답답하기만 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실종자들이 있을 선체 수색 상황과 경비함정, 민간어선, 관공선, 헬기까지 투입되어 광범위한 해상 수색도 병행한다는 뉴스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4월 18일, 선체로 들어가는 통로를 확보하고 공기 주입이 시작되었다. 4월 19일, 선체 유리창을 깨고 선내에 진입하여 선체 내부에서 처음으로 시신 수습이 이루어졌다. 이후 4월 29일까지 수습된 시신은 200구가 넘어섰다. 그러나 선체 붕괴가 진행되면서 시신이 수습되지 않는 날이 차츰 늘어갔다. 사고 현장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유실된 시신이 발견되기도 했다. 5월 29일, 승객이 가장 많이 잔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4층 선체 일부를 절단하고 장애물 제거 작업을 병행하면서 일반인, 단원고 학생, 서비스직 승무원의 시신이 수습되기도 했다.
이후 수색 작업이 진척이 없자 10월 22일 민간 잠수업체가 철수 입장을 밝히면서 수색 중단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실종자 가족들은 10월 27일 무기명 투표로 수색 지속을 결정했고 민간 잠수업체도 철수를 번복하고 수색을 재개했다. 10월 28일, 곧바로 마지막 실종자가 발견된 지 102일 만에 단원고 여학생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수색 중단 논의가 잠시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11월 11일, 정부는 수색 작업의 어려움과 잠수사 위험을 들어 수색 종료를 선언했고, 실종자 9명을 남기고 참사 발생 210일째에 수중수색은 마무리됐다.-위키 백과, 수색과 인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