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에 행주대교는 신행주대교, 김포대교, 일산대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한강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었다. 일산신도시가 생기면서 행주대교는 엄청난 차량의 소통을 가져왔다. 한무룡 해군제독도 소장으로 예편한 후 일산에 전세아파트를 얻어 퇴임 후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장군으로 퇴임하면서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하지 못했으니 그의 군인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청렴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두 딸을 두었는데 큰딸은 가산디지털단지에서 작은 업체를 운영하는 사업자와 결혼했고, 둘째 딸은 의사가 되어 여의도에 있는 병원에 의사로 근무하고 있다.
행주대교 북쪽 끝단에는 행주산성이 있는데 이곳은 임진왜란 3대 승전으로 유명한 권율장군의 사당이 모셔져 있다. 성철은 권율장군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새해에는 김포 형님댁에서 차례를 지낸 후 가족들과 항상 행주산성에 와서 권율장군 사당에 참배하고 있다. 2300명의 민관군이 고양 들판에서 밀려오는 3만 명의 왜군들과의 처절한 전투 끝에 승리하여 왜군의 침략에 고통받던 조선의 백성들에게 승리의 희망을 준 대첩이었다.
성철은 한장군이 투신한 행주대교 끝단을 가 보았다. 낡은 엑셀 승용차와 구두,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려던 새벽 시간의 한강은 얼마나 쓸쓸했을까?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투신을 결심한 형님의 비장한 표정을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한무룡 해군제독의 고향은 전라북도 김제였다. 위로 누님이 한분 있고 아래에 남동생 2명과 막내 여동생 1명으로 총 5남매였다. 남동생은 2000년대 어느 날 공장장으로 근무하다가 폭설이 내리고 추위가 몰려오자 공장을 점검하러 혼자서 공장 안으로 들어가 전기를 올리다가 감전돼 사망했고 공장은 화재가 나서 불타고 며칠 후에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도 손을 쓸 틈이 없이 벌어진 사건이라 가족들은 황망함과 비통함으로 장례를 치러야 했고 미망인은 나중에 재혼하고 말았다.
한 제독의 어머니는 고향이 충청남도 보령군 청라면이었다. 우리나라 가곡에 나오는 청라 언덕을 자주 흥얼거리는 큰 저수지가 있던 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 태어난 그녀는 3남매였는데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빠는 경찰이 되어 대전에서 근무하였다. 유일하게 의지했던 언니는 인근 청소면에 살던 권씨 가문의 큰아들에게 시집을 갔는데 다시 안면도로 이사를 가게 되어 언니와의 교류도 끊어지게 되었다. 이때 일제에 의해 정신대를 강제로 시집 안 간 처녀들을 잡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딸을 인근의 노총각에게 급히 시집을 보냈다. 하지만 성에 대해 따로 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녀는 밤마다 짐승처럼 괴롭히는 남편과 혼자라는 우울감 등으로 정신은 피폐해져 갔다. 정신이상이 오게 된 그녀는 마침내 악몽 같은 집을 떠나 어디론가 유랑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충청남도를 떠나 어느 날 찾아간 곳은 전라북도 김제의 절이었다. 김제 금산사는 백제시대 세워진 고찰로 그곳의 주지는 정신없이 헤매던 그녀를 받아들여 정신적 치료를 하게 된다.
주지 스님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처자가 대웅전 아래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절밥을 먹이며 회복하도록 도왔다. 걷기도 하고 경내를 돌아다니게 되자 본격적으로 청소라든가 땔감 구하는 일을 시키고 새벽에는 예불에 참여하게 하고 명상까지 하게 했다.
"탁! 탁!"
수지 스님의 죽비가 그녀의 어깨에 울림을 주었다.
"너는 어디서 왔고, 네 이름은 무엇이냐?"
그녀는 잃어버린 기억을 떠 올리려고 애를 썼다.
갓 열일곱의 나이였던 그녀는 몇 개월 동안의 명상과 치료를 통해 젓가락 같았던 몸이 살집이 불었고 창백했던 표정에 살짝 봄날 꽃들을 보며 미소 짓기도 했다.
그렇게 절에서 생활하던 중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제읍내 장에 다녀온 주지 스님이 광복의 소식을 가져와 산속의 스님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절에 있던 스님들과 불자들도 목청껏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기억의 저 편 희미한 거미줄처럼 엮여있던 그녀의 잊혔던 기억들이 모세혈관에 피가 도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진달래 핀 골짜기에 내려가 냉이를 캐던 그녀에게 몇 명의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아랫동네에 사는 여자애들 몇 명이 부모 심부름으로 화전을 만들기 위해 진달래꽃을 따러 산에 온 것이었다. 여자애들은 재잘거리며 노래까지 불렀다.
"나에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어느 순간 그녀는 그 동요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는 언니와 손잡고 뛰놀던 청라 언덕이 떠올랐다. 그리고 언니와 함께 언덕에 앉아 부르던 '청라 언덕'이 떠올랐다.
"봄에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햇빛 비칠 때 나는 흰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그래, 내 고향은 청라 언덕이 있던 청라였구나. 그럼 내 언니의 이름은 의성이고 내 이름은 미성이었지."
'언니, 언니가 보고 싶다. 안면도로 시집간 언니 내 언니가 보고 싶다.'
미성의 눈에는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찼다.
1950년 새벽 6.25가 발발했다. 북한 공산군은 소련의 무기와 탱크를 지원받아 일요일 새벽 4시에 일제히 남침을 감행한다. 7월 19일 인민군4사단의 2개 부대가 군산에 주둔한다. 그리고 호남평야 일대의 곡식들을 후방에서 탈취하여 대구 낙동강 전선에 있는 인민군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라북도에서도 피난 가지 못한 주민들의 호구조사와 부역자를 선별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김제에도 인민군들이 수시로 가가호호다니면서 주민들의 동태를 살폈다. 아이들은 인근 국민학교로 모이게 해 김일성 가와 인민군가를 가르쳤다. 주민들은 운동장에 모이게 하고 수시로 사상교육을 시켰다. 그 자리의 맨 앞줄에 완장을 낀 미성의 모습도 보였다. 초췌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미성은 어느새 보도연맹 여성위원장이 되어 있었다.
길고 긴 3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38선은 휴전선이 되었고 남괴 북은 다시 갈라진 채 분단이 되었다. 전쟁과 관련된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 외에 양민 학살인원이 남한에서만 114만 명에 이른다. 이러한 피비린내 나는 혼돈의 세월이 가고 전쟁 후 무룡은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김제 부호의 후처로 들어가 태어난 것이었다. 무룡의 아버지는 전쟁 전 이미 처자식이 있었으나 인민군이 군산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소작농만을 남겨두고 선유도로 피난을 가서 전쟁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그가 전쟁 후 가족들을 이끌고 다시 김제로 돌아왔을 때 그의 기와집은 의외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인민군 보도연맹의 지휘부로 쓰이던 집이 그의 집이었다.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국군과 경찰 가족, 지역 유지들은 가장 먼저 학살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어서 국군이 돌아오고 난 후 부역자들과 인민군의 앞잡이들이 잡혀가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다. 그 와중에 무룡의 어머니 미성이 살아남은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한씨 집안의 가게 점원으로 일하던 미성은 한씨 가족들이 선유도로 피난을 가자 큰 기와집과 점방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인민군들이 들어오고 한씨의 기와집은 그들의 지휘부 건물로 사용되었고, 미성은 보도연맹의 여성위원장으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그때 인민군 장교 청년이 미성을 사랑하게 되고 어느 날 미성은 임신을 하게 된다. 점점 배가 불러오자 그는 미성을 금산사에 은밀히 숨겨두고 딸아이를 출산하게 한다. 그 이유로 미성과 딸은 금산사에서 지내면서 전쟁의 화를 피하게 되었다.
전쟁 후 한씨 일가가 돌아오고 나서 미성의 소재를 수소문하니 금산사에 딸과 기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씨네 점방으로 데려와서 축은한 마음에 후처를 삼는다. 1954년 한무룡이 태어난다. 하지만 호적에는 어머니로서 미성은 없었다.
1월의 행주대교는 한강의 매서운 겨울 찬바람이 불어왔다. 한강의 발원지는 강원도 태백시 금대동의 계곡 검룡소에서 발원해서 정선, 영월의 동강을 거쳐 단양, 충주, 여주를 지나 경기도 양수리에서 합류한 후 한강으로 흘러들어 서울을 관통하고 김포를 지나 임진강과 합류해 서해로 흘려간다. 이런 긴 여정을 통해 지금 강물은 행주대교를 지나가고 있다. 인생의 여정도 저 강물과 같지 않을까? 어린 시절을 지나 이제 어깨쯤 까지 왔는데 한무룡 형님은 본인의 나머지 인생을 포기하고 이 행주대교에서 한강으로 뛰어들어 나머지 인생을 지워버렸다. 그에게 조여 오는 검찰의 압력, 해군 방산비리에 연루되었다고 그의 과거까지 먼지 털듯 털어버리고 세상에 드러내겠다는 그들의 권력 앞에 인간으로서의 한무룡은 초라한 개인에 불가했을 것이다.
1977년 해군사관학교 임관식에 한무룡소위는 국방부장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박정희대통령과 딸 근혜양도 참석 예정이었다. 영광스러운 임관식에 참관석에는 부모님도 초대받았다. 하지만 한무룡 소위의 친어머니 미성은 초대받지 못했다. 다만 임관식을 마친 아들을 해군사관학교 밖에서 어머니 미성을 만날 수 있었다. 후처라서 호적에 등록되지 못한 어머니 미성이었다. 이것이 평생 한으로 남아 죽는 날까지 미성을 힘들게 했다.
마침내 오후가 돼서야 해군 전역 UDT 대원들이 장비를 준비해서 한무룡장군의 시신을 찾기 위해 행주대교 아래에 도착했다. 모두들 비장한 표정들이었다. 한장군을 보좌했던 퇴임 김중령이 수색을 지휘하고 있었다. 온 가족들이 초조하게 한강 물밑을 수색하는 UDT 대원들을 기다렸다. 물살은 빠르고 한겨울의 한강은 차갑기만 했다. 몇 군데 수색 포인트를 정하고 여러 번 반복해서 수색하던 대원들이 올라왔다. 수온이 차가워서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김중령이 말했다.
"오늘은 늦게 수색을 시작했고 한강 수온도 차가워서 대원들의 저체온증이 우려됩니다. 내일 오전에 다시 수색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장군님은 저희가 반드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수색대원들이 장비를 정리하여 봉고차로 떠나가고 가족들도 뒷정리를 마치고 한 곳에 모였다. 그때 김포에서 장어집을 운영하는 둘째 형님이 말했다.
"안타깝지만 무룡 형님은 내일 다시 찾도록 하세. 날도 춥고 어두워졌으니 김포 우리 가게로 가도록 하세."
가족들은 차를 나누어 타고 김포 고촌에 있는 둘째 형님 댁으로 출발했다. 김포 IC를 나와서 첫 번째로 보이는 작은 도시가 고촌읍이다. 이 고촌읍 언덕을 넘어가면 김포 시내가 나온다. 둘째 형님네 장어집은 김포로 넘어가는 언덕의 배밭 안에 있었다. 강남에서 사는 사업가가 일찍부터 사논 배밭인데 그 안에 있는 단층 건물을 개조해서 식당으로 만들었다. 이미 고촌 시내에서 장어집을 10년 간이나 운영해서 서울과 일산, 김포에 많은 단골들이 찾아오는 숨은 맛집으로 소문 나 있었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둘째 형님이 말을 꺼냈다.
"무룡 형님이 검찰 조사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네. 이런 사단이 생길 거라면 나에게 와서 고민이라도 털어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정말 형님이 힘들었다는 생각이 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