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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권태주 Nov 28. 2024

푸른 한강

■ 장편 연재 소설ㅡ《세월호, 그날 이후》


1편ㅡ[푸른 한강]


1


영종도 하늘에 새벽안개가 가득했다. 겨울인데도 농사를 끝낸 들판에는 잘라진 볏목에서 파릇파릇하게 새순들이 돋아나 봄인 듯 위장하고 있었다. 그 위로 안개가 내려앉아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뒤덮고 있다. 마치 점령군처럼.

들판 너머 바다가 가까운지 파도소리가 쏴아 쏴아ㅡ거리며 들려왔다. 밀물 때인가 보다. 철썩이는 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렸다. 성철은 어젯밤 묵었던 펜션을 나와서 바닷가로 향했다. 해수욕장이라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갯벌과 밀려온 부유물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성철은 생각했다. '내 고향 해수욕장은 백사장에 고운 모래와 푸른 바닷물이 참 깨끗한데 이곳은 해수욕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겠군.'

성철은 바닷가를 혼자서 걸었다. 새벽 먹이를 찾아왔는지 갈매기들이 떼 지어 몰려다녔다. 밀려온 죽은 생선이나 조개들을 찾는 것이다. 쉴 새 없이 끼룩대며 성철을 앞서 나갔다. 이 바닷가의 주인은 자기들인데 낯선 방문객이 미덥지 않았나 보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협박하듯 끼룩 댔다.

밀려오는 파도를 보니 지난봄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인천항을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목포 인근 해상에서 기울어져 침몰한 것이다. 마침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기 해 승선했던 단원고 2학년 학생 299명과 선생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단원고는 안산시에 있는 인문계고등학교였는데 성철이 안산교육청에서 장학사로 근무할 때 업무로 자주 방문했던 곳이었다.

교육청 장학사 5년 근무를 마치고 성철이 교감으로 발령받은 학교는 안산의 학교였다. 전철역이 가까운 학교라서 교사들의 출퇴근이 편해서 경합지였다. 아파트 단지의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라 안정된 학습분위기에서 일 년을 근무했다. 2014년에는 벚꽃이 유난히도 활짝 피었다. 학교 앞 도로에는 벚나무가 안산에서 군포까지 양쪽으로 심어져 있었는데 하얀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는 풍경은 마치 나비 떼가 날아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했다. 인근 도시의 사람들은 일부러 이 벚꽃길을 찾아와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곤 했다. 또한 인근에 반월호수가 있어서 산책하거나 가족들이나 직원들이 회식하기 좋은 음식점들이 많이 있다. 교감 2년 차이던 2014년 봄, 뉴스에서 속보가 떴다.

"세월호 여객선 목포 인근해상에서 침몰 중!"

"300명이 넘는 여객인원 구조중, 탑승객 신원 확인하고 있음"

"단원고 2학년 학생들 수학여행중었다고 함. 피해 인원 파악 중임."

성철은 급히 텔레비전을 켜고 뉴스에 집중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배는 기울어가고 있었고 주변에 구조하러 온 배들과 헬기, 아나운서의 급박한 목소리가 전해지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교무실 안의 직원들과 언제 올라오셨는지 교장선생님도 같이 뉴스를 보고 있었다.

점심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뉴스에서

"세월호 여객선 탑승자 전원 구조....."라는 멘트가 화면에 떴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점심식사하러 급식실로 이동했다.


2


인천국제공항이 영종도에 들어오면서 섬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평생을 농사와 어업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살 곳을 떠나가야 하는 막막함이 있었다. 보상받은 돈으로 대토 하여 궁여지책으로 인근 을왕리해수욕장 주변에 펜션을 짓고 손님을 맞이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니면 청라국제도시가 생겨 그곳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생긴다고 해서 이사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아최대의 국제공항이 완성되자 김포공항은 주로 국내 여행객을 수송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인천공항은 허브공항으로서 성장해 갔다. 21.38km의 인천대교가 10년의 공사 끝에 웅장한 위용을 드러냈다. 2000년대 대한민국의 발전과 선진국으로서의 길목에 인천대교와 인천국제공항이 있었다.

어젯밤 영종도 을왕리해수욕장 앞 펜션에서 성철은 오래간만에 교육청에서 함께 근무하던 직원들과의 모임을 했다. 5년 동안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고락을 함께했던 장학사들과 주무관들이 모였다. 세월호 침몰로 사망한 단원고 학생들의 장례절차를 주관하던 교육청이 안산교육청이었다. 장학사들은 수시로 목포 팽목항까지 출장을 가서 실종자를 찾을 때마다 장례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안타까운 일은 세월호에 승선했던 교감선생님의 사망이었다. 구조선에 올라 사고 뒤처리를 하던 그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들에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랄까? 모두가 슬픔에 울부짖고 있을 때 수많은 제자들과 선생님들의 죽음에 괴로워했던 교감은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금요일 저녁 펜션에 모인 성철과 함께 근무했던 교육청 장학사와 주무관들은 오랜만에 지난 일들의 회상과 대화로 밤이 가는 줄을 몰랐다.

  "세월호 학생들이 안산의 장례식장에 도착할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요. 부모들의 절규와 살아남은 친구들의 오열...."

 "어느 2학년 반은 생존자보다 사망자가 다수였어요. 배가 기울어 올라오지를 못한 거죠."

 "어떤 시민은 줄을 아래로 내려보내 손에 피범벅이 되면서 한 명의 학생이라도 구하려고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고요."

 "돌아오지 못한 299명의 학생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모두들 그날의 기억들로 마음속에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성철은 말없이 못 마시는 소주잔을 압안에 털어 넣었다. 밤늦게까지 지난 시간들을 이야기하다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날 밤  성철은 악몽을 꾸었다. 푸른 한강으로 유람선이 떠 있었는데 갑자기  한강에 풍랑이 일더니 유람선이 표류하다 교각을 들이받고 침올하는 것이 아닌가. 다리를 지나가던 많은 사람들이 차를 세우고 유람선을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구르는 것이었다. 그때 보이는 어머니 얼굴.... 슬픈 얼굴의 어머니 모습이었다. 성철은 어머니를 부르다가 잠에서 깨었다.

 "휴우ㅡ"

새벽 4시. 모두들 바닥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파도 철썩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3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각자 집으로 가기로 하고 헤어졌다. 성철도 아파트가 있는 동탄으로 가기 위해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톨게이트로 승용차를 몰았다. 안산에서 동탄으로 이사한 지도 3년이 지났다. 경부고속도로 옆에 있는 동탄신도시는 미래에 100만 인구를 목표로 건설되었지만 중심지인 메타폴리스에 전철이 들어오지 않아 몇 년째 아파트값이 폭락한 상태였다. 대신 외곽에 있는 서동탄역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전철의 종착지 역할만 할 뿐이었다. 성철은 공무원아파트에 전세로 들어와 생활하다가 동탄2신도시가 개발된다는 소식에 아파트 분양을 받기 위해 발품을 팔고 다녔다. 하지만 주변의 동료들과 동탄의 아파트 사람들은 새로운 신도시 아파트 분양에 별 관심이 없었다. 대신 서울 강남 사람들은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부지런히 모델하우스를 들락거렸다. 역시 돈냄새를 잘 맡는 부자들은 달랐다. 3억 내외의 싼값에 분양하는 아파트를 자신들의 젊은 자식들에게 증여하려는 목적이었다. 성철도 무주택이라 가점으로 아파트를 우선 분양받을 수가 있었다. 이미 안산 고잔신도시에서 아파트를 분양받아 살다가 이익을 보고 매도한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한 동탄역이 가까운 아파트를 분양받으려고 신청했다. 운 좋게 바라던 아파트를 분양받아 중도금 대출로 입주 날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성철의 승용차가 톨게이트로 막 진입하려는데 이종 사촌 형으로부터 핸드폰 연락이 왔다. 불안하고 다급한 목소리였다.

 "성철아, 새벽에 큰형이 행주대교에서 한강으로 뛰어내렸어. 지금 한강수색대가 찾고 있는데 얼음이 얼어서 수색하기가 힘든가 봐. 급하게 네게만 먼저 연락하니 다른 형제들에게도 네가 전해주렴. 곧 시신을 찾을 준비를 해야겠어."

이게 무슨 소린가? 우리 집안의 자랑이자 대들보였던 사촌 형님이 자살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갓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성철은 급히 김포에 있는 둘째 형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고는 김포의 형님댁으로 차를 몰았다. 김포에서 10년째 장어집을 운영하는 둘째 형 내외도 일찍 가게에 나왔다가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고 있었다. 뒤이어 서울에 사는 셋째 형과 넷째 형도 달려왔다. 모두 불안과 걱정의 눈빛이었다.

 "행주대교 아래에다 컨테이너 설치하고 임시 캠프를 꾸민다는구나. 겨울이라 한강 경찰은 수색을 포기하고 형님의 부하였던 해군 전역 UDT 대원들이 직접 한강 바닥 수색대를 조직하고 있다고 해. 우리 형제들도 수색 캠프로 가도록 하자."

 둘째 형의 목소리에 비통함이 묻어났다.

 "의정부지검 고양지청에서 두 번째 세월호 사고와 관련된 검찰의 참고인 조사를 받고 나오는 길에 행주대교에서 승용차와 구두, 유서를 남기고 투신했다는구나. 형님이 무슨 죄가 있다고. 천벌 받을 검찰 놈들...."


한무룡 해군제독은 2002년 전라북도에서는 최초로 장군을 달았다. 그의 고향은 김제군 성덕면 대목리. 김제중과 이리남성고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 31기로 임관한 후 '평소 굳건하고 성실한 자세로 항상 연구하는 군인상을 실천'한다는 주변의 칭찬을 받았고, 82년 미국 유학, 96~97년 일본 방위 연구소 유학 등으로 해군력 강화를 위해 노력해 왔으며, 2000년부터 국방장관 의전실장까지 한 이력으로 인정받는 해군제독이었다. 그는 계룡대 해군본부 해군군수차장으로 발령받았다가 해군인사 참모부장으로의 역할을 담당하며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이어 해군전력 현대화를 위해 2007~2008년 방위사업청 함정사업 부장으로 그 역할을 수행했다. 한 제독은 평소 청렴 성실한 인물로 모든 방산회의를 공개하여 비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참군인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결국 예비역 소장으로 정년퇴임을 하게 된다.

세월호가 2014년 4월 침몰한 이후 국민들의 관심은 어째서 오랜 시간 세월호에 갇힌 학생들과 시민들을 구조하지 못했는가에 있었다. 결국 박정희대통령의 딸로 유명세를 얻은 박근혜대통령의 무능함이 드러났고, 박근혜대통령의 행적이 8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가에 탄핵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또한 세월호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유병언이 안성에서 집단으로 생활하는 이단의 교주였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분노했고, 경찰의 추적을 받던 유병언이 사체로 발견되기도 했다. 또한 박근혜대통령 주변의 인물이었던 최순실이 국정농단을 했다고 구속되고 대통령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마침내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는 방안으로 해군 방산비리가 타깃이 되어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고자 했다. 검찰의 칼끝은 2008년 해군 국제관함식 행사의 요트대회를 주관하며 STX엔진으로부터 광고비 명목으로 7억을 받은 정옥근 전 해군총장의 아들을 체포하여 조사하며 정총장의 뇌물로 보고 소환할 예정이었다. 한무룡 해군제독은 전역 후 방산 관련업체 고문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방산비리 혐의로 피의자로 전환하여 조사할 예정이었다.

평생을 해군으로 정직하게 근무해 온 그에게는 검찰에서의 조사는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수치감을 받았을 것이다. 갓 검사를 단 젊은 검사의 반말과 호통, 말도 되지 않는 근거를 들이대며 협박하는 수사관들, 후임이었던 황기철 현 해군참모총장과 후배 장군들의 앞길을 막는 언행으로 그는 스트레스로 불면의 밤을 보냈다.


행주대교 아래의 한강물은 파랗게 아래로 흘러가고 있었다. 살얼음이 언 강가에는 마른 갈대들이 무리 지어 흔들리고 있었다. 오랜 세월 이 강가의 주인이었을 갈대들, 흔들리며 꺾이지 않고 생명을 유지해 왔다. 그 갈대숲 사이로 인기척을 느낀 청둥오리 몇 마리가 후드득 날갯짓하며 날아올랐다. 임시로 설치한 컨테이너에는 석유난로와 몇 개의 물통, 커피포트와 일회용 커피봉지가 플라스틱 의자에 놓여 있었다.

 "곧 해군 예비역 UDT 대원들이 올 거야. 옛날 형님이 함대사령관할 때 근무했던 부하들이 올 거야. 겨울이라 수온이 차서 목숨을 건 수색이 될 텐데 걱정이네."

이종 시촌형인 무현은 슬픔을 삼키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행주대교 아래는 유속이 빠르고 곧장 임진강과 연결되어 있어서 형님을 빨리 찾지 않으면 서해로 흘러가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

석유난로에 커피 포트를 올려 물을 끓여 종이컵에 맥심커피를 넣고 물을 부어 한잔씩 마시며 푸른 한강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무심한 듯 말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연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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