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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④‘쇼카손주쿠’와 ‘쇼인 신사’

by 김성웅 Jan 03. 2025

‘모리’(毛利) 가의 ‘하기’(萩) 시  


메이지 유신의 본거지는, 지금의 ‘야마구치’ 현에 있는 ‘하기’라는 도시로 번 체제가 유지되었던 막부 말기까지 '조슈번'의 번청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하여, 임진왜란 중에 경상도 남부를 지배하다가 철병한 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자, ‘도쿠가와’ 시대에 영지를 빼앗기고 핍박받은 다이묘인 ‘모리 데루모토’가 그의 후손들과 더불어 둥지를 틀었다. 


전술적 식견이 뛰어난 ‘모리 테루모토’는 1604년, 두 강이 만나는 삼각주를 끼고 있는 평지의 바다 끝 반도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등지고 하기성을 건축하였다. 한눈에 봐도 방어에 유리한 천혜의 지형이다. 그리고, 번주가 거주하는 성을 중심으로 바둑판처럼 조성된 계획도시를 조성하고 ‘모리(毛利)’가가 대를 이어 조슈지역을 다스렸다.      

호텔에서 내다본 '하기'시 전경 (바닷가에 보이는 산아래에 하기성을 지었다. 하기성은 1871년 '폐번치현'시 폐성)호텔에서 내다본 '하기'시 전경 (바닷가에 보이는 산아래에 하기성을 지었다. 하기성은 1871년 '폐번치현'시 폐성)

당시 ‘에도’ 막부는, 농민과의 사무라이 간 연대를 우려하여, 번 주가 거주하는 성밖에는 ‘죠카마치’ (城下町)라는 '성아래 마을'을 조성하여, 성에서 가까운 곳으로부터 지체가 높은 사무라이들, 그리고 하급 무사들은 상인촌 가까이에 신분별로 거주시켜 농민과 분리하였다.      


조슈번의 하급 무사 중에는, ‘유신 3 걸’로 불리며 유신 혁명을 주도하여 최고의 각료에 올랐던 기도 다카요시나, 제1차 조슈-막부 전쟁 이후 뿔뿔이 흩어진 개혁파 인사들을 모은 뒤, 쿠데타를 일으켜 극적으로 다시 조슈번을 장악하였던 다카스기 신주쿠 등의 집안은 그래도 ‘죠카마치’에 살았지만, 그보다 더 낮은 하급 무사의 가족들은 두 강이 만난 삼각주 상에 살지 못하고 하기의 동쪽에 흐르는 ‘마쓰모토’ 강(지도 오른쪽 상단) 너머에 다수 거주하였다.         

하기시 항공사진 (두 강 사이의 삼각주 중앙 부분이 '죠카마치' 지역이고, 왼쪽 상단 바닷가 반도 지역이 하기성 성터) 하기시 항공사진 (두 강 사이의 삼각주 중앙 부분이 '죠카마치' 지역이고, 왼쪽 상단 바닷가 반도 지역이 하기성 성터) 

이들 가운데는 역시 하급 무사 집안 출신이지만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지주’였던 요시다 쇼인이나, 메이지 혁명을 완성하고 초대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와, 후임 총리 야마가타 이리모토’, 그리고 러일전쟁 간 총리를 역임하였던 가쓰라 타로.. 등등 이들의 생가도 이곳 하급 무사 거주지역에 있었다. 특히, ‘쇼인’ 생가에는 그 유명한 ‘쇼카손주쿠’가 있고, 가까이에 ‘이토 히로부미’의 생가가 있다. (지도 우측 상단 '마쓰모토' 강 건너편)   

       

다만, 조슈번 출신의 다른 총리들, 예컨대, 초대 조선 총독을 역임하고 총리가 된 ‘데라우찌 마사다케’, ‘아베 신조’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그리고 그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 등이 태어난 곳은 이곳 ‘하기’에서 약간 떨어진 ‘야마구치’ 출신이다.

     

그러면, 막부 말기 때까지 일본에는 270여 개의 번이 있었는데, 조그만 1개 번에 불과한 이곳 ‘하기’나 ‘야마구치’에서 '메이지' 시대 30여 년 동안의 짧은 기간에 왜 이렇게 많은 총리와 최고위 장군들이 출현하였을까? 전문가들은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선구자인 요시다 쇼인이 문하생들에게 끼친 역할에 주목한다.       


         

대일본 ‘팽창주의’ 자 요시다 쇼인과 쇼카손주쿠’ (松下村塾) 


'요시다 쇼인'은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하급 사무라이들을 사상적으로 지배하였을까? 1830년에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요시다 쇼인’의 집은 매우 곤궁하여 ‘요시다’가로 입양되어 자랐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일을 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모든 일본인이 ‘다 아는 사람’으로 유명해진 것은 그가 개설한 쇼카손주쿠의 문하생들이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서 일본 제국의 근대화와 제국주의의 초석을 다졌기 때문이다.         

‘쇼카손주쿠’는 ‘쇼인’의 숙부 사숙이었는데, ‘쇼인’도 여기서 ‘야마가류’의 검술 등 병학과 유학, 시문, 서 등에 대해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다. ‘쇼인’은 15세 때 조슈 번주 모리 다카치카에게 어전(御前) 교육으로 손자병법을 교육하여 능력을 인정받았고, 이때의 인연으로 ‘쇼인’의 재능을 아낀 ‘모리 다카치카’는 ‘쇼인’의 ‘탈번’으로 인한 처벌이나, ‘밀항’ 실패에 따른 자택연금 등에서 수차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쇼인’은 어려서부터 몸에 익은 일본식 병학(和式兵學)을 유지한 ‘양이론자’였지만, 대국이자 문명국으로 알았던 중국이 ‘아편전쟁’에 패배하고, 대제국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고, 서양의 군사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서양 관련 서적을 탐독하였고, 19세 때 서양의 문물과 병학을 위해 사쓰마의 나가사키로 유학 가서 (네덜란드을 배우고, 세계지도를 보고 세계 각 지역의 지명을 익히고, 동양보다 더 큰 세상이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1840년 일본판 세계지도 (남극대륙까지 묘사되어 있을 정도로 오늘날 지도와 비슷하다)1840년 일본판 세계지도 (남극대륙까지 묘사되어 있을 정도로 오늘날 지도와 비슷하다)

이처럼, 세계정세에 눈을 뜨게 된 ‘쇼인’은 어린 나이임에도 특히, 서구 열강의 침략 움직임 (서구의 식민지 경영)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일본의 신속한 체제전환의 필요성과 대일본 팽창주의를 추구한 장본인이 되었다. 이런 사상에 들뜬 그는 이미 20세 때부터, 더 많은 서양 정보를 얻고자 서양 선박 등을 관찰하며 규슈 일대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가 22세 때인 1852년, 일본의 건국 역사를 밝히고, 서양의 위협에 어떻게 대비할지를 갈파한 <신론>이라는, 미토 번의 ‘미토학’ 학자 세이시 사이가 저술한 책을 읽었다. 그야말로, ‘존왕양이’의 ‘바이블’이 된 서적이다. '세이시 사이'는 이 <신론>에서 막부의 가장 큰 행사였던 ‘산킨코타이’ (參勤交代) 제도를 비판하고, 막부가 다이묘의 연대를 막기 위한 ‘500석 이상 적재 가능한 대함 건조 금지법’을 해제하고 외압에 대비한 부국강병책을 주장하는 등 막부 세력의 근간을 해체하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세이시 사이’의 저서는 막부만 알고 살아왔던 '쇼인'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신론>으로 크게 감명받은 ‘요시다 쇼인’은, ‘탈번’까지 감행하면서 미토 번을 방문하여 ‘미토학’ 학자 ‘세이시 사이’를 만나, 가르침을 얻어 일본의 국체가 천황이 중심 되는 황국 임을 깨닫고, 그의 국가관은 ‘조슈 번’에서 ‘일본’으로 바뀌었다. 훗날, 그가 ‘쇼카손주쿠’에서 숙생들을 가르칠 때 ‘세이시 사이’의 <신론>은 주요 교재가 되었다. 

     

'세이시 사이'가 속했던 ‘미토학’이란, ‘국체는 천황으로부터 시작’하며, ‘우리들은 해가 뜨는 나라의 백성들’이라는 사상으로, 메이지 시대의 '존왕양이'로 이어지는 토대가 되었으며, 특히, ‘존왕’이라는 개념이 점점 깊게 뿌리내리자, 여기에 유학, 국학, 사학, 신도를 결합하여 일본 특유의 정치사상으로 발전한 학문이었다.           

당시, 막부의 쇼군은 일본 전국의 막강한 번들을 모두 지배하는 권력자였지만, 천황의 존재는 ‘카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그리고 ‘에도’ 막부까지 약 700여 년간 무가정권 시대를 이어오는 동안, 그저 연호만 정하고, 관직만 수여하는 실권 없는 한낱 장식품 신세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쇼군을 국가 지도자로 알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에도 막부’를 떠받치는 ‘미토’ 번주 ‘마쓰쿠니’가 <대일본사>라는 천황 중심의 역사책 편찬작업을 시작하여, 200여 년 동안 <사기(史記)>와 같이 ‘기전체’로 역사를 기술하였다. (편년체는 연도 단위) 역사를 ‘기전체’로 기술하면 ‘메이지 10년’ 등의 연호로 이어지니 쇼군이 아니라 천황을 중심으로 역사가 편찬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그런 역사책에서는 자연스레 막부보다 천황이 더 큰 권위를 가진 존재로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미토학'을 배우고 조슈로 돌아온 ‘쇼인’은 즉시 탈번을 범한 죄로 감방에 구금되었다. 당시, 번은 오늘날 국가처럼 번주의 권한이 막강하여, 만약 사무라이가 번을 허가 없이 벗어나면 낭인 신세가 되어야 했는데, 선동가이자 혁명가의 기질을 가진 ‘요시다 쇼인’은 무모에 가까운 행동으로 ‘미토학’을 공부하기 위해 탈번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쇼인'의 재능을 아낀 번주 ‘모리 다카치카’는 '쇼인'의 처벌을 '본가에서 유폐'되는 형벌 정도로 마무리한 뒤, 얼마 후에 바로 사면하고, 다시 10여 년간 국내 유학을 허락하였다. 파격적인 조치였다.     

     

그런데, ‘쇼인’은 여행 도중인 1853년 6월, 일본인에게 공포와 경탄의 대상이었던 ‘미국 흑선 내항’이라는 큰 사건을 목도하였다. 그리고, 권력을 가진 막부가 도쿄만에 진입한 미국 함대에 놀라 허둥대는 무능을 절감하고 막부 반대 세력이 되었다. 그는 미국 군함이 일본 앞바다를 헤집고 다니니, ‘일본이 서양 열강에 침략을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껴, '일본을 지키려면 서양을 더 잘 알아야 한다’라고 생각하였다. 1854년 3월, 미국 해군 함정에 몰래 승선하였다가, 미군에게 발견되어 밀항에 실패하고, 밀항시도’ 로 ‘하기’로 송환되어 감옥에 갇혔다.     


'쇼카손주쿠' 옆에 있는 ‘요시다 쇼인’의 생가 (자택연금지)'쇼카손주쿠' 옆에 있는 ‘요시다 쇼인’의 생가 (자택연금지)

'책 읽는 사무라이'로서 견문을 넓히기에 분주하였던 '쇼인'은 ‘하기’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에도, 554권의 책을 읽고 죄수들 상대로 강의도 하고, 저술활동도 하였다. 하지만. ‘병학사범’의 검술로는 서양을 상대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해군 육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의 밀항 동기와 사상적 배경을 다룬 <유인록>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훗날 그의 문하생들이 ‘조선 식민지’화를 수행하는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     

      

1855년 12월 출옥한 ‘요시다 쇼인’은 ‘가택 유폐’ 상태에서, 1856년에 505권, 1857년에 385권 등 책을 읽었다. '책 읽는 사무라이' 중에서도 일본식 표현대로 '엄청난 독서광'이었다. 많은 독서와 여행으로 견문을 넓힌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숙부 ‘다마키 분노신’이 개설한 ‘쇼카손주쿠’라는 '사립 글방'을 재개설하여 나이, 신분차별 없이 문하생으로 받아들이고 강의하였기 때문에, '쇼인'과 '쇼카손주쿠'의 명성이 점차 높아졌다.   

   

특히, ‘쇼인’의 세 살 아래 동네 친구로 '쇼인'의 문하생이 되었던 '기도 다카요시' (훗날 유신 3걸 중 1인)는 유신정권의 최고 각료가 되었고, 후배로서 총리까지 역임하였던 이토 히로부미야마가타 아리모토 등등 학구열이 강했던, 십 대 후반 어린 나이의 수많은 하급무사 출신들도 앞 다투어 입숙하였다. 이들이 살았던 '하기'시 중심에는 '메이린콴'(명륜관)이라는 번교가 있었지만 이들은 '쇼카손주쿠'를 택했다. 1856년, '쇼인'이 ‘쇼카손주쿠’를 열었을 때, 입숙자는 모두 18명이었는데, 숙생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 교실도 증축을 하였다.

     

하지만, 이 조그마한 건물에서 '쇼인'이 여러 숙생들을 가르친 기간은 불과 3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였던 어린 하급 사무라이들은 그의 해박에 지식에 매료되어, ‘쇼카손주쿠’ 사숙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지내는 동안 ‘쇼인’의 생각을 공유하며 '지식의 신념화'에 점점 빠져들어,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천황과 국가를 위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운 그의 급진 개혁주의 사상에 이념화되었다. 

      

막부 말기에, '막부 타도'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킨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세력은, 이들처럼 ‘존왕양이’와 ‘대일본 팽창주의’를 외치던 ‘요시다 쇼인’의 주장에 경도된 하급 사무라이 출신들이었다. 특히, '쇼인'과 함께 했던 이들은, 거의 모두가 과격한 급진개혁파로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자에 대한 암살과 테러를 서슴지 않았다.

 

‘쇼카손주쿠’ 학습장‘쇼카손주쿠’ 학습장

'쇼인'의, 학습방법은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회독이라며 특정 주제를 놓고 참가자 모두 자유롭고 격렬하게 토론하는 방식이었다. 자연히, 신분이나 나이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고 모두가 독서와 토론에만 열중하였다. ‘학문은 곧바로 현실정치와 연결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한 '쇼인'이 공부를 정치토론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인데... 오늘날, 미국의 웬만한 대학원 이상 고급과정에서나 볼 수 있는 학습방법을 이미 오래전에 일본의 촌구석에서 시도하였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1858~59년까지 막부가 ‘쇼군 후계자’ 문제와 ‘천황 칙허 없는 통상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조정의 신하와 다이묘 가신들 등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고, 탄압하는 이른바, 안세이 대옥’ 사건이 발생하자, 지독한 ‘양이론’ 자였지만 외국과의 통상을 강조하고 막부의 쇄국정책을 비난했던 ‘요시다 쇼인’은 이 대옥 사건에 분노하여 1859년 ‘존왕양이’ 파 탄압의 중심인물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쇼인'의 이 같은 급진적인 막부 반대 활동으로 다시 감옥에 수감되는 바람에 쇼카손주쿠는 1858년 11월 폐교되었다. 그리고, 다른 건으로 체포된 쇼인이 잘못 이 암살계획을 자백하는 바람에, 사형을 언도받고 29살의 나이에 처형되었다.     


'쇼인'은 죽기 전, 그의 <유훈록 (류콘로쿠)>에 ‘비록 몸은 무사시 벌판에 썩어가더라도 남겨 놓은 것은 야마토 다마시 (大和魂)’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훗날, 이 ‘야마토 다마시’는 소위 일본혼이라며 침략주의,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적 가치관으로 미화되어 수많은 청년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았다. 어쨌든, 쇼인의 제자들은 그의 <류콘로쿠>를 되풀이 암송하며 '존왕양이'와 '막부타도'의 결의를 다지며, '막부 타도'의 선봉에 서게 된다. 결국, 그가 처형당한 지 8년 후인 1867년 에도막부는 타도되었고, 그의 원대로 천황제 국가가 새롭게 탄생하였다. 



성역화된 쇼인 신사’와 군국주의자들


‘쇼인’은 대일본 ‘팽창주의’ 이외에도 이른바, ‘초망굴기’ 론을 설파하며 ‘하급 사무라이나 지식 있고 뜻있는 민중’들도 ‘번과 신분의 경계를 뛰어넘어 전국적으로 연대하여 일(봉기)을 일으키라는 등 폭력을 선동하고 수많은 암살이나 무력적인 습격을 사주하는 선동가였다. 이처럼, 문하생들에 대한 철저한 사상 교육 탓일까? ‘쇼인’의 문하생은 모두 9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몇 안 되는 문하생 대부분이 메이지 혁명의 투사와 혁명가로 활동하며 번에 대항하고 막부에 반항하며 봉기를 일으켰다가, 대부분 진압되어 사망하였다.

       

하지만, 살아남은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모토’.‘가쓰라 다로’ 등은 메이지 시대의 핵심적 권력가로서 메이지 유신을 완성시키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급 무사 출신이었던 이들은 항상 칼을 차고 군인적 가치관을 내세운 ‘군국주의자’로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제국의 근대화와 제국주의의 초석을 다지고, 부국강병을 이루자, 선동가였던 '쇼인'의 영향을 받은 ‘해외팽창론’에 따라 중국, 조선, 남방 등 아시아 지역을 침략 전쟁으로 물들였다. 

     

또한, ‘쇼카손주쿠’는 메이지 유신을 열어간 지사들의 정신적 기초를 다진 곳이기도 하지만, 메이지 유신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1866년 -쵸동맹’ (사쓰마-조슈 동맹)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쇼카손주쿠’는 메이지 시대에 성역화되어, 1858년 3월에 지어진 20평 정도의 학습당 건물 등이 사적 건물로 지정되었고, 1907년 이곳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가 중심이 되어 이곳에 ‘쇼인신사’를 세워 신사 내에 생가가 함께 있다.

      

‘쇼인 신사’ 입구‘쇼인 신사’ 입구

‘메이지 유신’의 본산으로서, 성역화된 ‘쇼인 신사’에는 메이지의 아들 ‘다이쇼’ 천황, 손자 ‘히로히토’ 황태자 등이 방문한 기념비도 있다. ‘쇼인’과 그 문하생들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니만큼, 천황가도 쇼인의 생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히로히토’ 천황이 제2차 세계대전의 군국주의자들과 함께 전범 노릇을 한 정신적 배경이기도 하다. 그리고, 통치집단의 이러한 행보는 국민들의 ‘집단적 군국주의적 사고’에도 영향을 미쳤다.   

        

1968년 메이지유신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당시 ‘사토 에이사꾸’ 총리(61~63대)의 휘호로 헌납한 메이지 유신태동지지라는 글귀가 새겨진 석비가 있고, 그 근처에는 1862년 ‘다가미 토오시치’(사쓰마번), ‘구사카 겐즈이’(조슈번), ‘사카모도 료마’(토사번)가 연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56, 57대)가 세운 삿쵸토 연합밀의지처라는 비도 남아있다.

      

‘메이지 유신태동지지’ 석비‘메이지 유신태동지지’ 석비

이처럼, 군국주의의 향수에 젖어, 두 석비를 세운 전 총리 2명은 조슈번 출신으로, 성은 다르지만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친형제 간이다. 그리고, ‘아베 신조’(90, 96~98대) 전 총리는 이중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특히, 이들 전 총리 2명과 ‘아베 신조’ 전 총리처럼 혐한과 반한 감정에 물든 일본 정계의 우익 인사들의 쇼카손주쿠에 대한 향수는 대단하다. 같은 시대 조슈번 출신으로 ‘일본 근대 군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무라 마스지로는 '야스쿠니신사를 세워, 그곳 참배 문제는 한국이나 중국 등 인근 국가를 긴장관계로 내몰기도 한다.           


책 뒤편에도 나오지만, 군 출신으로 한국통감과 조선총독으로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조선인이 우매하고 불결하다며 '함부로 칼을 빼드는 군 헌병 경찰제도로 '무단(武斷) 정치'를 단행하며 조선 민중의 원수였으나, 일본 총리로서 세습 백작에 올랐던, '데라우찌 마사타게'도 조슈 출신이고, 역시 군 출신으로 ‘데라우찌’의 후임 2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똑같은 억압정책을 반복하다 3.1 운동으로 물러난 '하세가와 요시미치'도 조슈 출신이다.     


이처럼, 아시아를 침략전쟁으로 피로 물들인 공로로, 세습되는 공훈 작위를 받아 일본의 국가 영웅이 되었던 이들이나, 영향을 받은 이들이나, 이들의 후손들은 대부분 조슈 번 출신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조선 침탈’이나 이웃 침략에 대하여 제대로 된 사죄를 하지 않았다. '쇼인'의 영향력이나 군 출신이라는 군국주의적 배경을 보면,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왜 그리 왜곡되고 완고한 입장을 고수하는지?’ 일견 이해가 되지만, '일본과 천황'에 대한 편협주의자들로서 자신들의 사상적, 정신적 뿌리를 부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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