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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⑫근대화와 '이와쿠라' 사절단

by 김성웅 Jan 18. 2025

일본의 근대화와 이와쿠라’ 사절단 


산업혁명과 제국주의적 사고

메이지 유신 3년 만인 1872년 1월, ‘폐번치현’을 완료하고 급진개혁파의 내정 개혁이 자리를 잡아갔지만, 한동안 정부는 '마음은 앞서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라며 경험해 보지 못한 미래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로 우왕좌왕하였다. 이에,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서유럽 관찰 사절단’ 이야기에 착안한 네덜란드 선교사 ‘베르덱’의 제안에 따라, 태정대신 3직 중 '우대신'이던 ‘이와쿠라 도모미’는 천황의 특명으로, 1850년대에 구미 열강과 맺어진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고, 서구 열강의 문물을 배울 목적으로,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등 장관급 4명과 학자 등 107명이 약 1년 10개월 후인 1873년 12월까지 미국, 영국, 독일 등 유럽 12대 강국 순방에 나섰다. 행정의 공백과 엄청난 비용이 소모되는 국운을 건 모험이었다.       

이와쿠라 사절단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1872, 런던 체류 중 촬영)이와쿠라 사절단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1872, 런던 체류 중 촬영)

이들은, 일본을 떠나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을 거쳐 ‘스에즈’ 운하와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세계를 일주하였다. 엄청난 비용과 기나긴 기간으로 호화 여행이라는 질타도 있었으나, 여행을 다녀온 이들이 ‘미구회람실기’라는 5권짜리 보고서로 구미 각국의 정치정세와 산업혁명의 공장으로부터 상, 하수도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발전상을 전하며, 과학, 교육, 문화,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본근대화 촉진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여한 최고위 각료들은 귀국 후 앞장서서 서구문물 도입에 나섰다는 점이다. 예컨대, '이와쿠라'는 미국의 철도 시스템이 마치 인간의 핏줄처럼 많은 화물을 곳곳으로 나를 수 있어, 미국을 부강하게 만들었다고 술회하였고, ’오쿠보 도시미치‘는 ’선진 문명‘의 서구를 견학하는 동안, 서구와 일본과의 국력 차이를 실감하면서 향후 일본이 나아갈 길을 고민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최초 방문 목적이었던 ’불평등 조약‘ 개정은 일본과 서구 열강 간의 압도적인 국력차이 앞에서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오쿠보‘는 영국 방문 간에도 증기, 제철, 철도, 도로, 무역이 영국이 부강한 이유로 간파하였는데, 유교 정도만 이해했던 사무라이들에 비친 서구의 모습은 경이의 대상이었다. 특히, 영국 공장의 설비, 생산과정, 그리고 대량 생산 등 영국식 '산업혁명'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사절단이 가장 큰 관심을 모았던 영국의 '입헌군주제'에는 많은 문제점을 느꼈다. 이후, 방문한 프랑스는 일본이 육군의 본보기로 배워왔지만, 이들의 유럽 순방 직전 터진 ’보불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7~1871.1)에서 '프러시아'(독일)에게 패하자 육군은 더 이상 관심이 아니었고, 패전국 프랑스의 '공화 정치'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1873년 3월, 사절단은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독일 제국의 '빌헬름 1세 황제'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를 만났는데, 황제의 위엄이 국민을 압도하고 있어서 부러움을 금치 못하고, '황제국가' 독일의 정치제도를 흠모했다. 특히, ‘비스마르크’가 사절단을 위해 베푼 만찬에서 연설하는 동안, 약소국은 국제법을 지키려 하나, 강대국은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면 지키나 불리하면 무력으로 짓밟는다라는 부분에, 특히 유신 정권의 실력자 두 사람 ‘기도’와 ‘오쿠보’는 등골이 오싹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 제국주의 실상을 실감하고 일본의 식민지화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이들은 귀국길에 비스마르크의 말을 되새기며, 일본이 통일 독일처럼 조속한 근대화를 이루려면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르는 것 (부국강병)이 절실하다라고 강하게 느껴, 이후 이들의 유신 정부 개혁의 지침이 되었다. 이 둘에게는 훗날 ‘사이고 다카모리’가 외쳤던 ‘사무라이 기득권’이니, ‘일본 전통 보존’이니 하는 것들은 너무나 하찮은 이슈로서 당장, 서구처럼 변하지 않으면 모든 기득권도, 전통도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절박한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끼며 이른바, 약육강식의 논리로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서구화'를 향한 발걸음    

메이지 유신에서, 본격적인 서구화는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한 1873년 이후에서야, 비로소 불을 댕겼다. 당시, 정체성 확보를 위한 ‘양이’ 운동이 치열하였지만, 그런 부분보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정말로 답답하게 느꼈던 문제는, 서구 각국의 의회, 대학교, 신문사, 방적공장, 조선소, 제철소, 목면 기계장, 맥주 공장 등등 자신들이 체험하고 느낀 기술 문명을 ‘어떻게 국민에게 알리느냐?’라는 것이었다. 


사절단의 일원인 '구메 구니타게'는 사절단이 둘러본 모든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 분석하여 '미구회람실기'라는 보고서를 발간하여 정부 관료는 물론, 일반인들까지도 열람할 수 있게 하였지만, 일본 유신 정부도 정치, 경제, 과학, 공학, 의료,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서구의 학문과 서양 백과사전을 전방위로 입수하여 허겁지겁 이들 학문의 번역과 전파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1874년에는 ‘도쿄 외국어학교’도 설립하였다.     


특히, 언어가 소통을 위해, 주요한 영어 단어나 어휘를 번역할 때, “어떻게 일본어 한자식 표현에 맞게끔 어휘를 선택해야 할까?”라는 문제였다. 예컨대, Democracy를 ‘민주’라고 옮기듯이 정치, 경제, 과학, 의료, 철학 등 거의 전 분야에서 엄청난 양의 전혀 생소한 말(어휘, 용어)을 자국어와 의미를 하나하나 맞추어 표현하는 일에는 경이로울 정도의 노력이 필요했다. 여담이지만, 일본의 이런 엄청난 노력 덕분에, 한국, 중국 등 한자 문화어권에서는 영어 어휘마다 한자식 표현으로 의미에 맞는 한자를 찾는 노력을 덜은 셈이 되었다.  


서양과의 격차를 조급하게 극복하려던 일본의 교육은 개념에 대한 이해보다 내용의 요약, 그리고 암기를 강조하였다. 예컨대, 미적분 등의 수학 문제는 개념에 따른 풀이보다 공식암기로 문제를 풀었고, 철학 등의 경우는 그 내면적 고찰보다 축약된 내용을 암기하여 단시간 내에 박학다식하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교육학적인 관점에서 암기위주의 수동적인 교육은 효율성은 증대되나,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는 응용력이 제한되었다.     


어쨌든, 막부 말기~ 유신 초기까지가 당시 일본 역사상 해외 정보 도입에 가장 적극적인 시간이었다. 예컨대, 1873년, 일본이 구미 각국에 파견한 유학생은 총 373명까지 증가했다. 이들의 교육지원비로 당시 문교부(교육부)는 예산의 18%를 사용하였고, 그 밖에도 거액을 지불하며 추가로 300여 명의 외국인 고문단과 외국인 기술자 240여 명을 초청하여 서구 문명의 흡수에 박차를 가하였다. 외국인 초빙에는 큰돈이 들였지만, 이들로부터 배운 기술은 일본의 서구화를 촉진시켰다.      


특히, ‘이와쿠라’ 사절단 이후의 변화는 다양하다. 이들은 견문만 넓힌 것이 아니라 인맥도 쌓았다. 사절단이 미국에 데려간 유학생 중 '가네코 겐타로'는 허버드 대학에 입학한 후 '시어도어 루즈벨트'라는 학생과 절친한 사이가 되어 친분은 계속 이어지다 30여 년 이후,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미국 대통령이 되자, 조선 문제에 대해 '가쓰라(일본 외상)-테프트(미 국무장관)' 조약을 체결할 때나, 러-일 전쟁 이후 휴전을 중재하였던 미국이 일본에 유리한 조건으로 러시아를 압박한 일들이 모두 '가네코'와 '루즈벨트'의 친분의 결과였다는 사실이다.   

상투를 자른 '이와쿠라와 도모미'와 '오쿠보 도시미치'(출처: 중앙포토)상투를 자른 '이와쿠라와 도모미'와 '오쿠보 도시미치'(출처: 중앙포토)

이들은 또한, 서양식 문화 풍습을 일본식으로 도입할 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양복대신 전통의상과 상투를 고집하던 '이와쿠라'는 양복을 입고 이발과 면도를 하였으며, '오쿠보'나 '기도'도 신분에 따라 복장이 다른 일본과 달리, 지위고하에 무관하게 '양복'이라는 옷을 입는 것과 남녀평등의 에티켓 등에도 많이 놀랐다. 실제, 이들은 양복을 즐겨 입었고, '오쿠보'는 그의 심벌이랄 수 있는 멋진(?) 얼굴 수염을 길렀다. (가발 수염이라는 설도 있다)  


부국강병책

'이와쿠라' 사절단 이후 추진된 메이지 정부 개혁정책을 보면, 대외적으로는 과학 기술 등 서양문물을 적극 도입하고, 대내적으로는 농지개혁이나 조세 개정, 식산흥업 등 경제력을 증강하고, 군사력 강화를 위해 군비 증강, 군제 개혁, 징병제 등에 초점을 두어, ‘부국강병’을 추구하였다. 


특히, ‘군국(軍國)’의 근간인 육군의 경우, 처음에는 유럽을 석권하였던 '나폴레옹'을 영웅시하여 프랑스를 본받았으나, 보-불전쟁(1870-1871)에서 독일(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이기자, 이후부터는 독일을 본보기로 군사력 증강에 임하였다. 해군의 경우도 '넬슨'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나폴레옹 해군을 격파한 데 대한 경외심에다가, '사쓰에이' 전쟁을 경험한 사쓰마가 해군 건설을 주도한 탓인지 처음부터 영국을 강하게 본받았다.      


하지만, 조그마한 군함조차 없었던 일본에서 ‘해군 육성’이라는 발상은 전혀 뜻밖이었다. 더구나, 대부분 사무라이들의 창검술, 기마술에 대한 집착은 거의 종교적일 정도이었으니까... 그렇지만, 1853년 미국 함대의 ‘도쿄만 진입’으로 전 일본이 놀란 터라, 조금이라도 국제감각을 가진 하급 무사들은 해군 양성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막부가 ‘대함건조’를 못하게 한 규정 철폐를 촉구하였다.   

  

'고베' 해군조련소'고베' 해군조련소

이들의 관심에는 말뿐이 아니라, 적극적인 실행도 따랐다. 예컨대, 1864년부터 3년 동안 막부가 9척의 증기선을 구입하는 동안, 막부는 ‘고베’에 해군 ‘조련소’(훈련소)를 설립하여 해군 간부를 양성하였으며, 조슈번의 리더 ‘기도 다카요시’는 자체적으로 조선소를 건설하여 함선을 제작하였고,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주군 ‘나리아키라’가 자체 증기선 제작에 열을 올리다가, 8척의 증기선을 구입하는 모습을 목도하였다. 그리고, ‘사카모도 료마’가 따랐던 ‘가쓰 가이슈’는 ‘일본 해군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해군 건설에 공을 들였다.      


이러한 관심과 노력 덕분에, 해군 건설은 자연스레, 유신 정부 권력자 사이에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1871년에 사쓰마 해군을 근간으로 일본해군이 설립되었다. 사무라이 출신의 해군 진출은, 1895년 청일전쟁 시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황해해전에서 청나라의 북양함대를 대파했던 사쓰마 출신 ‘사토 스케유키’의 경우, ‘보신전쟁’에서 막부 파와 싸운 이후, ‘가쓰 가이슈’의 코베 해군 조련소에서 ‘사카모도 료마’ 등과 포술과 항해술 등을 교육받고 최초 일본 해군 대위로 임관하였다. 일본식 열정이 20여 년이 지나서야 크게 꽃을 피웠다.     


또한, 1905년 러시아 ‘발트함대’를 격파한 사쓰마번 출신 ‘도고 헤이하치로’도 해군 장교가 된 뒤, ‘사이고 다카모리’의 추천으로 1871~1878년까지 8년 동안 영국 ‘포츠머스’에서 관비로 유학하며 영국 해군을 연구하였고, 청일전쟁 간에는 전함 ‘나니와’ 함장으로 참전하였고, 러일전쟁에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참전하였다.      

일본 해군은 처음에는 메이지 유신 이전의 경력을 인정하여 각 장교에게 맞는 계급을 주었지만, 본격적인 해군사관 양성은 1888년 ‘히로시마’ 근교 ‘에타치마’에 ‘해군 병 학교’(간부후보생 양성소)가 설립되면서 부터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150여 명 정도의 생도가 3~4년간 교육 후 해군 장교로 임관되었다. 영국의 교육과 기술지원으로 인력과 장비에서 보잘것없었던 구식 수군이 근대적 해군으로 탈바꿈하여 미국까지 공격하게 된다.

   

19세기 조선과 청나라, 일본 등 동양 3국에서는 서양문물에 대한 욕구가 강하였다. 청나라는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 조선은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생각으로 모두가 자국의 정신문화를 지키면서 서양문물을 배우겠다는 주장은 일치했다. 하지만, 각국이 실행에 옮긴 중국의 양무운동, 일본의 메이지 유신, 조선의 개화운동은 국가적 관심 여부에 따라 과정이 달랐듯이 결과 또한 전혀 달랐다.      


특히, 일본의 모습은, 중국 청나라가 ‘1, 2차 아편전쟁’(1840~1842년과 1856년)과 ‘태평천국의 난’ (1850~1864년, 한족의 등용과 군사제도 개편)을 거치며 비슷한 개혁을 시도하였던 ‘양무운동’ (중체서용) 방식과는 많이 달랐다. 청국의 개혁이 서양의 문물을 들여와, 유학생보다는 외국인 교관들을 초빙하여 진행하였다면, 일본은 아직도 정권이 불안정한 가운데서도 서양과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려고 나간, 고위관리들이 직접 서양의 문물을 보고 배워, 황권강화와 개화론을 앞세운 부국강병책으로 나아갔다는 점이 차이점일 것이다.      

이런 차이를 보면 일본이 비록, 서양에 의해 강제로 개국되었지만, 20여 년이 채 안 되어, 전통적인 인습과 중화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서구문물을 차용하며 새로운 일본으로 변신한 점이 놀랍다. 그 비법은 아마도, 국가 대사를 결정하는 최고급 관료들이 무려 2년 가까이 미국 등 주요 서구 열강의 모습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배워온 지식을 '근대화' 개혁의 원동력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근대화'의 현장에서 현장 감각 없는 비전문가가 의사결정을 좌우하였던 중국은 각종 전쟁에서 쓰디쓴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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