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1
* 이 작품은 소설입니다. 지명, 인물, 사건 모두 실제와 아무 관련 없습니다
피오르드 투어를 할 땐 중간 지점인 플람이나 구드방엔에서 반드시 하룻밤을 자야 된다고 했다.
노르웨이의 대자연을 제대로 느끼려면 그래야 한단다.
200km 남짓 이어지는 절경들을 하루에 다 돌아보는 1일 투어가 대세였지만, 우리 체력으론 간당간당 하단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 52살, 나 45살, 합쳐 100살이 눈앞이다.
“플람 지나고부턴 졸려서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걸?”
아이패드로 호텔예약 앱을 열면서 그가 말한다.
“그러면 일정이 꼬여. 노르웨이항공은 월수금만 운행해.”
1일 투어로 진행해야 베르겐에서 하룻밤 자고 수요일 오전에 덴마크로 가는 저가항공을 탈 수 있다.
“목요일에 가는 비행기는?”
난 핸드폰으로 항공기예약 앱을 구동한다.
“직항은 딱 하나 있어, 스칸디나비아항공. 근데 가격이 두 배야.”
두 사람이면 차액이 25만 원이나 된다. 피오르드 투어 가격과 맞먹는다.
“호텔은 있어?”
“플람에 객실이 딱 하나 남아있어.”
그가 아이패드를 보여준다.
동화 속 마을로 유명하다더니 무슨!
초원에 덩그마니 놓인 흰색 가건물은 꼭 마구간처럼 생겼다.
그런데 1박에 29만 원? 욕실도 공용이라고?
바가지 상술이라면 몰려들어 철퇴를 내려치는 대한민국 네티즌들에게 공격좌표로 찍어주고 싶다.
“여름 극성수기잖아. 자연보존을 위해 건물 수도 제한했대.”
더불어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싸다는 노르웨이.
“오늘부터 몸 만들자.”
추가 비용이 대략 60만 원이다.
피오르드의 절반을 온전히 즐기는 가격으론 너무 비싸다.
차라리 그 돈으로 보약 사 먹고 1일 투어에 도전하기로 결론 내렸다.
“그럼 화요일에 묵을 베르겐 호텔 알아봐.”
그에게 호텔 예약을 맡기고 나는 비행기를 확정하려는데 리액션이 없다.
어? 고개를 돌려보니 날 빤히 보고 있다.
“왜?”
“그냥. 지난번에도 이렇게 같이 여행일정 짤 걸. 같이 하니까 재미있네.”
행복한 듯도 하고 감개무량한 듯도 한, 아무튼 밝은 미소다.
“그러네.”
희미하게 웃었다.
속마음은 차라리 혼자 할 걸,이었지만.
유럽 냄새 가득한 사진들을 볼 때마다 계속 울컥울컥 하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숨기는 게 너무나 고역이었다.
'아이들'을 입양하러 북유럽으로?
이들'을 입양하러 북유럽으로?
새해 들어서부터 항공사 마일리지가 사라진다고 아우성이었다.
여름방학 동안 다시 유럽에 도전해서 남은 응어리를 말끔히 제거하고 오잔다.
그 지옥엘 또 간다고?
이젠 많이 괜찮아졌으니까 굳이 무리하지 말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괜찮아지기는 뭘. 지금도 홈쇼핑에서 유럽여행 상품 광고하면 바로 채널 돌리면서.”
그걸 또 주의 깊게 보고 있었구나. 체크체크.
그가 걱정할만한 행동은 하지 않기 목록에 적어둬야겠다.
그리고 당장 리모컨 선호채널에서 홈쇼핑들을 삭제해야지 마음먹었다.
실천할진 미지수지만.
“마일리지도 마일리지지만, 유럽을 그런 식으로 기억에 남기는 게 싫어서 그래. 네 말대로 진짜 괜찮아졌으면 또 가도 되잖아, 안 그래? 가자, 가자!”
내 꾀에 내가 넘어간다는 식으로 공격하겠다 이거지?
“자기 말마따나 여전히 상태가 그 모양인데 괜히 도전했다가 덧나면 어떻게 할 거야.”
그가 무서워하는 말을 던졌지만, 웬일인지 평소완 달리 깨갱하고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병을 얻은 곳에서 병을 치료해야지. 이열치열, 이독치독!”
됐다 손사래 치고 더 이상 응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넘어가나 싶었는데, 지난주에 다시 유럽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에 사들인 주방용품들 탓에 바닥을 보이는 생활비 통장을 들먹이며 초반에 차단하려는데, 그가 빨랐다.
“지난번에 백화점에서 본 그릇들도 사 오고. 이거였지, 아마?”
학회에서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어느새 아이패드를 눈앞에 쓱 들이댄다.
화면에 싱그러운 잎사귀가 가지런히 늘어서 있는 문양의 접시들이 가득했다.
앗, 이 완벽에 가까운 배열과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초록의 느낌은... 구...구스타브스베리 베르사[1] 아니십니까!
그의 손가락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나가자 화면이 바뀌었다.
오 마이갓! 작고 오돌토돌한 유리알들이 영롱하게 빛을 반사하는 이 유리그릇은 이딸라 카스테헬미[2]가 아니더냐!
“이거 항상 사고 싶어 했잖아. 현지 아웃렛에서 몇 세트만 사도 편도 비행기 값은 뽑는대. 그 자리에서 곧바로 박스포장 해서 한국으로 부치니까 여행 내내 들고 다닐 필요도 없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오니 왜 이렇게 쉽게 느껴지는 걸까.
“그렇게 많이 사서 뭐 하게.”
관심 없는 척 퉁겨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딸라의 떼에마 접시에 파스타를 올리고 카스테헬미 그릇에 피클을 담은 테이블 세팅이 절로 떠올랐다.
알바알토[3] 꽃병엔 노란 프리지어가 담겨있겠지?
가끔 대단위 손님이 집에 오니까 한두 개로는 모양이 살지 않는다.
역시 각각의 라인을 세트로 가지고 있어야...
“갈 거지?”
마법의 지팡이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는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그릇들의 환영에 취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던 거다.
“다 쓸어 담아 오자고!”
환희에 넘치는 그의 목소리가 방안 가득 울렸다.
그렇게 핀란드에서 시작해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로 이어지는 3주간의 북유럽여행이 결정된 것이 지난 주였다.
그릇 욕심에 간다고 했지만, 사실 그의 말마따나 최근 들어 상태가 많이 좋아지기도 했고, 사건이 있었던 서유럽이 아닌 북유럽이기 때문에 설마~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럼 자기가 노르웨이와 덴마크 맡아, 내가 핀란드랑 스웨덴 맡을게.”
이번에는 같이 계획을 짜자는 그의 말에 못 이기는 척 구역을 나눠 여행 공부를 하자고 제안한 것도 나였다.
구스타브스베리 아웃렛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입양’하는 상상에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아웃렛까지.
첫 여행지인 헬싱키의 호텔을 찾기 시작할 때부터 ‘그것’[4]이 시작됐다.
유럽 호텔들의 광고 이미지 사진들이 대체로 엇비슷한 것이 원인이었을까?
애써 잊고 있었던 ‘파리 호텔’의 모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식은땀이 나면서 호흡이 거칠어졌다.
괜찮아, 괜찮아, 심호흡을 하며 일단 펼쳐놓은 호텔 검색창을 닫았다.
그러자 그전에 열어두었던 이딸라 아웃렛 사진들이 화면에 나타났는데... 이건 뭐지?
‘그것’이 서서히 사라지는 게 아닌가.
뭐냐, 이 속물적인 반응은.
아무리 요즘 그릇에 미쳐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의 치료약이 겨우 그릇 사진?
농담이지?
나란 인간, 이토록 싼 영혼의 소유자인가, 허탈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뭐, 다행이네. 이제 다 나았다!”
기뻐하며 다시 호텔 예약 페이지를 열었는데, 그럼 그렇지.
인간의 뇌가 그렇게 허술하게 관리될 리가 없지.
섭섭할까 봐 다시 왔어, 약 올리듯 맹렬하게 ‘그것’이 시작됐다.
그 이후 지금까지 쭉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물질하는 해녀처럼 여행 정보 사이트들을 헤엄치다, ‘그것’이 시작되면 재빨리 물 밖으로 나와 산소를 공급하듯 그릇 사진들을 보며 거친 숨을 몰아쉰다.
시작되면 그릇 보고, 시작되면 그릇 보고.
정말 조잡하고 환멸스럽다.
이렇게까지 해서 가야 하나, 포기할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차, 어젯밤 마치 최종보스의 등장처럼 한동안 꾸지 않던 ‘유럽 꿈’까지 꿨다.
어두컴컴한 유럽의 성 안을 이리저리 헤매지만 그는 없다.
‘밖으로 나가야 돼!’
출구가 어디냐고 묻지만, 현지인들은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그는 어디로 간 걸까.
“What? What?”
조롱하는 표정으로 정확하게 발음하라고 윽박지르는 사람들 앞에서 EXIT란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땀만 삐질삐질 흘리는데... 영어가 유창한 그는 어디에도 없다.
소스라치며 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땀범벅에 눈물까지 흘렸는지 얼굴도 젖어 있었다.
이건 가지 말라는 계시, 그 끔찍한 고통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될 거라는 신호였다.
혹시 그가 깨지는 않았나 걱정하며 옆자리를 살폈다.
없다?
‘아, 어제 개강총회에서 한잔 했다고 했지.’
거실로 나가보니 역시나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자고 있었다.
평소에도 상태가 별로였는데 그날 이후 그의 위장은 끊임없이 위험신호를 보내왔다.
술 몇 잔 들어가면 자다가도 위액이 넘쳐서 밤새도록 소파에 앉아 잠을 자야 했다.
역류성식도염 약을 먹어도 그때뿐이었다.
내 정신처럼 그의 위장도 형벌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유럽여행이라는 처방은 그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꿈 이야기는 하지 말자, 다시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1] 한국 주부들에게 인기 있는 스웨덴 생활 자기 브랜드 <구스타브스베리>의 라인 중 하나로 녹색 잎 무늬가 특징이다.
[2] 역시 북유럽 디자인 그릇인 <이딸라>의 한 라인.
[3] 이딸라 라인 중 하나. 한국에서 유리꽃병이 인기다.
[4]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차오르며 심장이 아파오는 증상, 흔히 ‘울화병’이라 칭하는 증상을 이 커플은 ‘그것’이라고 부른다. 이는 마치 해리포터 세계관 속 마법사들이 악당 ‘볼드모트’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걸 두려워하며 ‘그 사람’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다. 직접적으로 호명하지 않음으로써 문제를 덜 심각하게 느끼려는 심리적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