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4
* 이 작품은 소설입니다. 지명, 인물, 사건 모두 실제와 아무 관련 없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혼자 담아두셨구나.
병이 안 나는 게 이상하지요.
“전형적인 화병 증상이네요.”
아무 이유 없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 심장을 옥죄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되면 어김없이 눈물을 쏟아내고야 맙니다, 까지만 듣고 의사가 말했다.
“혹시 최근에 크게 스트레스받으신 일이라도 있습니까?”
“크게는... 없는데요?”
첫 번째 거짓말.
정신과 의사가 어떤 식으로 질문을 던지는지는 인터넷을 통해 미리 알아봤다.
하지만 상담이 아니라 증상을 완화시켜줄 약만 원했다.
“하나도 없으세요?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회사에 다니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더 구질구질하게 여겨지는 건 싫으니까.
아무튼 두 번째 거짓말.
“거래처 때문에 짜증 나는 일이 좀 있긴 한데, 뭐 그 정도 말곤...”
그렇다면 여긴 왜 왔어요?라는 질문이 따라올 법한 어리석은 대답이었다.
뭐라도 둘러대야겠다 싶어서 새로운 거짓말을 떠올려보는데,
“예를 들면 부인이 외도한 사실을 알았다거나.”
갑자기 팍 치고 들어왔다. 순간 엉겁결에 시선을 피했다.
“그냥 찍었어요. 보통 그 나이 대 분들은 주로 그런 일로 찾아오시니까.”
의사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먼저 말하기 전엔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그게 심리 상담의 기본이겠지. 그 정도는 안다.
내가 풀어놓기 전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거짓말은 그만하자.
성별이 들통나지 않도록 단어를 고르며, 사실 어디 가서 말하기도 부끄러운 얘기인데...로 시작했다.
“지난여름에 유럽 여행을 갔었거든요. 한 달 정도...
런던으로 인(IN)해서 파리, 로마, 마드리드로 아웃(OUT)하는 코스인데, 런던에서는 그냥 다 좋았습니다. 뮤지컬도 보고 박물관도 돌아다니며 마냥 신났습니다.
파리로 넘어갔을 때부터 그 사람의 행동이 이상해졌습니다.
배가 아프다, 몸이 아프다 하면서 호텔에 혼자 있으려고 하더군요.
음식이 입에 안 맞나 해서 한국식당 갈래? 해도 싫다 하고, 그냥 저 혼자 구경하고 오래요. 좀 쉬면 괜찮아질 거라면서.
사실 한 달이나 되는 여행이라 그전에 일들을 끝내 놔야 해서 무리한 면이 있었어요. 슬슬 피로가 올 때가 되기도 했죠.
걱정되긴 해도 기왕 여기까지 온 것, 호텔에만 있으면 손해다 생각하고 혼자 거리를 쏘다녔어요.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냥 같이 쉬자 생각하고,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호텔로 돌아갔는데, 화장실 안에서 샤워를 하느라 제가 온 걸 몰랐나 봅니다.
침대 위에 있던 그 사람의 핸드폰에 알림이 뜨길래 봤더니 메신저로 추잡한 사진하고 문자들이 뜨는데...”
그때 갑자기 ‘그것’이 시작됐다.
뱃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화산이 분출하듯 확!
숨쉬기가 곤란해지고 마치 누군가가 심장을 손에 쥐고 짜는 것 같은 고통.
동시에 눈가가 시큰해지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물을 참으려고 오만상을 찌푸리자 의사가, 참지 마세요, 괜찮아요, 한 마디 했을 뿐인데, 그 목소리가 어찌나 부드럽고 온화하게 들리던지 부끄러움도 모르고 영일만 갈매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끄억끄억 거렸다.
의사는 손수건을 건네주고, 살짝 안고 부드럽게 등을 두드려주기도 했다.
전문가의 손길이 닿아서였을까.
‘그것’ 때문에 울고 나면 항상 비참하고 죽고만 싶었는데, 그때는 속이 확 풀리면서 개운하기까지 했다.
“혹시 이 이야기, 다른 사람한테 한 적 있어요?”
“없어요.”
“여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계속 혼자 담아두셨구나. 병이 안 나는 게 이상하지요.”
의사는 화병에 갱년기 증상이 겹쳐서 더 위험해 보인다고 진단했다.
“갱년기요? 이제 겨우 마흔 중반인데?”
“남자는 보통 오십이 넘어야 시작하는데, 간혹 빠른 분들도 있어요.”
젊어서는 친구들과 술 마시며 상대방 욕 실컷 하다 보면 저절로 풀어지지만, 갱년기가 되면 몸이 이겨내질 못한다고, 가만 두면 큰 병으로 발전할 수 있단다.
“지금 같이 사시죠? 잠시라도 떨어져 계실 수 있으세요?”
본래 화병은 그 화를 유발한 인물로부터 떨어져야 서서히 치료되는 병이라 했다.
“그건 좀...”
떨어진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의 외도를 알게 된 순간에도.
“그럼 두 분이 같이 오셔서 상담을 받아보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건 힘들죠?”
의사가 희미하게 웃었다. 다 안다는 듯이.
이곳에도 말하지 않고 오셨나요?
네에.
정신과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더 심하게 자책할 테고, 그건 우리 관계뿐 아니라 그의 위장에도 좋을 리 없다.
그날 이후 마치 연애 초기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끝없이 잘해줌으로써 지은 죄를 씻고 상처를 봉합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인데, 사실 당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나아지지 않아서 정신과까지 다녀왔어,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거기다 아무리 환자의 정보를 지켜준다고 하지만 이 좁은 동네에서 커밍아웃이라니,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면 몸과 마음을 젊게 해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음식과 운동으로 호르몬 밸런스를 조절하는 것도 좋구요. 혹시 하시는 운동이 있으신가요?”
“등산을 좀 하는데요.”
“전문적으로?”
“아니요. 보통 사람들 하는 정도요.”
운동이랄 것도 없다는 이야기다.
아저씨들의 등산이 원래 그렇다. 산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일단 한 잔, 꼭대기에서 한 잔, 내려와서 한 잔, 말하자면 우리에게 등산은 넓고 분위기 좋은 술집에서 하루 종일 퍼마시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헬스장을 다니시는 건 어떠세요?”
건강검진 마치고 나면 이번에는 반드시... 하면서 시도하지만, 역시 특유의 그 답답함이 싫어 금방 포기하게 된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도 바보 같다.
더 솔직히 말할까?
전형적인 사십 대 중반 아저씨에 게임마니아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나다.
몸뚱이 움직이는 게 귀찮아 죽는 인종이다.
스포츠? 좋아한다.
단 맥주 마시면서 TV로 볼 때만.
“그럼 수영은 어떠세요?”
팔다리 허우적거리다가 꼬르륵 가라앉는 거?
아주 어릴 때 오락실 게임으로만 해봤다.
“통통하신 분들이 의외로 물에 잘 뜹니다. 체형을 보아하니 잘하실 것 같은데, 한번 해보세요. 관절에 무리도 안 가고 살도 잘 빠집니다.”
그건 또 몰랐다. 솔깃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도 들으시고, 옷도 젊게 입으시고, 요즘 유행하는 것들도 따라 해 보시면 저절로 젊어진답니다. 갱년기 극복의 첫걸음이죠.”
그러면서 새삼 나를 위아래로 슬쩍 훑어보았다.
동네 미용실 아줌마가 바리캉으로 5분 만에 다듬어주는 투블록 머리, 배가 눈에 띄는 넉넉한 풍채, 사시사철 색깔과 두께만 다른 추리닝을 걸치고 신발은 오로지 운동화 아니면 슬리퍼만 신는 남자.
“꾸미시는 데 관심 없으시죠?”
끄덕였다.
미대 출신이라지만, 게임 쪽 DNA가 더 강해서 옷은 편한 게 장땡이다.
그래도 젊을 때는 폴로셔츠라든지 청바지도 종종 입었는데, 그를 만난 뒤로는 무조건 추리닝이다.
그나 나나 통통한 남자를 좋아하는데, 내가 양복 입은 덩치 큰 신사에 열광한다면, 그는 추리닝을 느슨하게 걸친 남자를 특히 ‘애정’한다.
요즘 예능프로그램에서 인기 많은 웹툰작가 ‘기안84’처럼 꾸미지 않고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남자가 매력적이란다.
난 절대 허술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욕망이다.
줄 세 개 들어간 추리닝 하나만 걸쳐도 좋다고 난리인데 굳이 다른 옷을 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둘이 오랫동안 붙어 다녔어도 주변으로부터 게이가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 한번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나 역시 의사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중에 패션 공부를 통해 알게 된 지식으로 묘사해 보면) 카멜색 터틀넥니트에, 복숭아뼈가 살짝 보일 정도로 단을 올린 브라운 계열의 치노팬츠, 맨발에 스웨이드 소재의 페라가모 드라이빙슈즈를 믹스해 가을이라는 계절감을 살린 게 포인트!
환자에게 부드럽고 차분한 인상을 줘야 하는 정신과 개업의에게 딱 맞는 코디였다.
우람한 뱃살과 절망적인 머리숱이 그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의사도 노력하고 있는데, 환자라면 더 적극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해보겠습니다. 그 정도는 해볼 수 있을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