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취집’이 목적인 사람들이 생겨나는 거구나

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3

by 선우비

* 이 작품은 소설입니다. 지명, 인물, 사건 모두 실제와 아무 관련 없습니다


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2

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1



서울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시에는 몰랐다.



마침 다니던 회사가 망했을 때 그가 동거를 제안했다.

그저 그런 미대를 나와 그래픽 디자이너로 취업전선에 나선 뒤로 벌써 세 번째였다.

그나마 게임이 완성된 뒤에 망해서 상여금을 건진 것만도 다행이었다고 할까.

게임 업계가 원래 그렇듯 망하기도 잘 망했지만, 새 직장을 구하기도 쉬웠다.

경력직이라 원서만 넣으면 아무 데나 오케이였다.

직업에 대한 열정 같은 거 식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참에 좀 쉴까 생각 중이야. 이번 방학 때 같이 여행이나 갈까?”


장거리연애가 햇수로 2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직업 특성상 낮과 밤, 평일과 주말도 구분이 없던 탓에 같이 해외여행 한번 못 갔던 게 항상 미안했었다.


“여행은 됐고, 이참에 여기 내려와서 좀 살다가 올라가. 밤마다 외로워 죽겠다!”


그는 포항에 있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본가도, 나도 서울에 있어서 데이트는 항상 서울에서 했다.

데이트라고 해봐야 밥 먹고 PC방 가고, 술 먹고 PC방 가고, 모텔에 가서 각자 모바일 게임 좀 하다 섹스하는 게 전부.

내가 시간을 쪼개서 데이트하는 사정도 있었지만, 온라인 게임 동호회에서 눈이 맞은 커플이라 사실 이 이상의 데이트는 필요도 없었다.

“다른 커플들은 맛집도 찾아가고, 카페도 가고, 영화도 보고, 미술관도 간다던데, 우린 왜 이 모양일까?”


미안함 두 스푼 담은 자조적인 나의 한탄에,


“난 괜찮은데? 넌 싫어?”

“난 좋고 싫고가 없지. 항상 시간에 쫏겨다니는데. 자기한테 미안해서 그러지. 직전에 사귀었던 그 형이랑은 전국팔도 돌아다니면서 맛있는 거 사 먹고 다녔다며.”


그의 전 애인도 같은 온라인 게임 동호회 회원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 연상에, 성격 좋고, 직장 좋고, 동호회에서 평판도 좋고, 월급도 많고, 얼굴이랑 목에 쥐젖도 많고, 여드름도 많고, 허벅지 튼살도 많고, 똥도 많이 싸고...


“걔도 하도 여기저기 끌고 다녀서 따라다닌 거지, 난 사실 피곤했어.”


많이 배운 사람답게 정답을 잘 알고 있는 남자다.


“그럼 한 달 정도 같이 있을까?”


그동안 나를 배려해준 그를 위해서, 그리고 나도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딱 한 달!

그런데 한 달이 두 달 되고, 어쩌다 보니 반년이 훌쩍 넘어갔다.

속궁합은 잘 맞아도 생활궁합은 안 맞는 커플도 많다는데, 우린 둘 다 최고였다.

방 하나를 게임룸으로 만들어 더는 PC방에 갈 필요 없이 휴일이면 함께 판타지 세계들을 탐험했다.

외식과 배달 음식에 물릴 때 즈음, 심심해서 요리에 도전을 해봤는데, 생각보다 실력이 쑥쑥 늘었고, 감사하게도 그는 무엇을 던져줘도 잘 먹는 입맛을 가졌다.

둘 다 뽀송뽀송한 느낌을 무척 좋아해서 무언가를 씻고 말리는 모든 행위를 사랑했다. 당연히 위생이나 청소 문제로 싸운 적이 없었다.

꼴에 미대 출신이라고 난 집 꾸미기에 일가견이 있었고, 그는 남중-남고-공대 코스를 밟은 남자답게 사용자 매뉴얼만 있다면 못 다루는 기계가 없었다.

알고 보니 우리는 생활하면서 발생하는 트러블의 대부분을 자체 해결해 버리는, 모든 부부들이 꿈에 그리던,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대부분 제공해줄 수 있는 최강의 부부였다.

“생활비 풍족하게 줄 테니까 차라리 재택근무 프리랜서로 사는 건 어때? 캐릭터 디자인하는 일이야 컴퓨터만 있으면 여기서 해도 되잖아.”


어느 날 그가 제안했다.

이제는 한시라도 떨어져선 못 살 것 같다고, 평생 같이 살고 싶다고, 이참에 서울에 있는 거 다 정리하고 이곳에 정착하라고, 일종의 프러포즈였다


“외주로 일 받으면 여기서 해도 되긴 하는데... 그렇긴 한데...”


사실 나 역시 떨어져서 연애할 때보다 함께 살면서 그를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생각을 안 해 본 게 아니었다.

다만 하루가 멀다 하고 기술이 휙휙 바뀌는 게 디자인업계다.

현장으로부터 멀어져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일거리가 들어오기나 할까?


“괜찮아, 괜찮아. 사치만 안 하면 내가 혼자 벌어도 우리 둘 잘 살 수 있어.”

회색빛 도시에서 야근과 밤샘을 밥 먹듯이 하다가 가끔 만나 모텔 가는 생활을 계속할 거냐, 아니면 공기 좋은 곳에서 프리랜서로 여유 있게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 아침밥을 먹겠느냐였다.

유일한 걸림돌인 돈 걱정이 사라진다면?

아, 이래서 ‘취집’이 목적인 사람들이 생겨나는 거구나, 싶었다.

“그렇게 해볼까?”

서울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작은 도시인 포항에서 산다는 것, 직장이 포함된 사회생활에서 이탈이 의미하는 것을 당시에는 잘 몰랐다.

알았다 하더라도 그게 중요했을까?

‘영원한 사랑’이라고 아로새긴 커플링이 각자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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