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때 달라지는 거짓말이 준비되어 있다

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2

by 선우비

* 이 작품은 소설입니다. 지명, 인물, 사건 모두 실제와 아무 관련 없습니다


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1




“오늘은 영어 학원 알아볼 거지?”


녹즙기로 짜낸 양배추즙을 한잔 쭉 들이키더니 아, 살겠다~ 숨을 푹 내쉬고는 곧바로 잔소리 시작이다.


“으응, 그래.”


미적지근한 대답.


“확실히?”


으으응. 말투가 저절로 늘어진다.

다니기 싫어... 영어 학원 따위. 사십 대 중반의 나이에 어학 공부 싫어.

요즘은 각종 여행앱과 번역기, 구글맵만 있으면 여행사 가이드가 없어도 충분히 해외여행을 할 수 있다.

지난번 서유럽여행도 그렇게 했다. 영어 메뉴판이 없는 식당에 가도 걱정 없다.

먼저 가본 블로거가 올려둔 음식 사진을 통째로 저장해두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플리즈~ 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마주한 음식들은 어딘가 레토르트 식품 같은 맛이 났다.

사진으로만 봤던 음식인데 이상하게 먹어본 것 같아, 막상 눈앞에 차려지면 신선함이 떨어졌다.

어떨 땐 사진보다 형편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동양인이라고 일부러 대충 만들어주는 거 아냐? 인종차별 아니냐고! 우쒸우쒸 거리면,


“다들 보정앱으로 뽀샤시하게 만든 사진만 올리니까 그렇지. 너도 페이스북에 음식 사진 올릴 때마다 그러잖아.”


그가 정답을 알려줬지만 그래도 뭔가 당한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결국 타인의 경험을 복사하지 않고 직접 부딪치다 보면 더 재미있고 알찬 여행이 되겠다, 지난 유럽여행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영어 공부를 하자!”


여행 직후엔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막상 실천하려니 세상 지긋지긋한 게 또 영어 공부 아니겠는가.


“학원도 가고 수영도 하려면 많이 피곤하겠다.”


학원에 가는 것을 확정한 상태로 몸 걱정까지 해준다.

직업이 교수라 그런지 배움을 독려하는데 가차 없다.


“알았어, 알아볼게. 뭐 어쩌면 정신없이 움직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체념의 말이었는데, “아아...” 그는 한번 곱씹는 눈치다.

아직도 여행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 거니? 묻고 싶은 얼굴.


“그동안 너무 놀기만 했으니까.”


얼른 둘러댄다.

별 거 아냐, 별 거 아냐, 과대해석 하지 마.


“그리고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시간 되시는지 물어보는 것도 잊지 마.”

“북유럽도 간다면서 또 여행은 무슨. 그건 패스하자.”

“어떻게 그래. 칠순 잔치 대신이잖아. 제주도만 다녀오는 것도 미안한 일인데.”


당신 돈 쓰는 게 미안해서 그러지. 엄마는 당신 돈으로 가는 줄도 모른단 말이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알았다고, 웃는 얼굴로 배웅했다.

그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얼굴로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녀올게, 현관문을 나선다.

요즘, 여행 계획 짜도 괜찮은 거지?

‘그것’은... 괜찮지?라고 묻고 싶은 얼굴.

대답은 “이젠 괜찮아”로 정해놓고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그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묻지 않는다.

괜히 화제로 올려 마음을 쓰지 않게 하려는 배려겠지.

그가 제일 싫어하는 말, 타초경사(打草驚蛇).[1]


“인생, 가만 보면 결국 가야 할 곳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어. 생긴 대로 살게 되는 거지. 그러니 무리하지 말자. 좋은 게 좋은 거다. 사는 게 다 그렇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 가훈 같은 거다.

비겁하고 쪼잔한 표어지만, 교수님 말투로 말하면 제법 그럴듯하게 들린다.

연애 초반에는 그게 뭐야, 겁쟁이 늙은이 같아, 반발했지만, 이젠 안다.

인생의 진리가 조금은 포함된 말이란 것을.


청소기 돌리고 요가 자세 몇 개 하고 나니 어느새 수영하러 갈 시간이다.

막 수영복을 챙기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것’이 시작됐다. 새벽꿈도 그렇고, 할 때가 됐다.

그래서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강도가 세서 잠시 소파에 누워 맘껏 울었다.


“심하게 울컥하면 그때 방문해 주세요.”


보통 개인병원은 시답잖은 이유를 내세워서라도 반드시 다음 약속을 잡으려고 하는데, 거기는 달랐다.

정신과는 원래 그런가? 아니면 다시 올 손님으로 보이지 않았던 걸까?

나 역시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싫고, 처방받은 약도 졸리기만 할 뿐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어서 더 이상 가지 않았다.

그래도 의사가 경고한 말이 무서워 정말 안 좋아지면 가봐야지 하고는 있었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이 울긴 했는데, 이 정도면 더 심해진 건가?

에잇, 잘 모르겠으니 가지 말자.

울고 나니 좀 풀린 것도 같고.

예전 같았으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띵띵 해졌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여행 가서 눈물 터져도 아웃렛 쇼핑을 못할 정도만 아니면 되지 뭐,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거짓말이 준비되어 있다.


오전 10시 타임 수영 강습엔 남자가 나 혼자다. 예닐곱 명의 회원이 모두 육칠십 대 엄마뻘이다.

그동안 이 시간에 강습 신청한 남자회원들이 얼마 안 가 그만두길 반복했었나 보다.

물놀이 시설 옆에 구색 맞추기로 만들어 둔 곳이다 보니 일반적인 수영장보다 레인이 좁았다.


“그깟 살갗 좀 닿는다고 병 옮는 것도 아닌데.”


할머니 한 분이 투덜거렸다.


“남자들이 그런 거에 더 예민하다니까 글쎄. 우린 털끝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데.”


행여 간만에 찾아온 남자 회원이 그런 이유로 타임을 변경할까 봐 걱정하는 말투였다.

같은 여자끼리 수영하는 게 훨씬 편할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나이 많은 여자들만 있다고 괜히 피하는 거 같아서 기분 나빠 그러지.”


그렇단다.

걱정 마세요, 남자보단 여자 앞에서 수영 팬티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게 세상 편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왜 이 시간에 수영을 해? 낮에 일 안 해? 결혼은 안 했어? 어느 아파트에서 살아? 혼자 살아?

첫 수업 끝나자마자 질문이 쏟아졌다.

사생활 질문은 안 받습니다, 할까 했지만,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끼리 데면데면하면서 지내기 싫었다.

더군다나 요금할인 때문에 삼 개월 치를 선불로 낸 상태라 텃세에 치이기라도 하면 나만 손해다.


한번 갔다 왔어요,라고 할까, 사별했어요,라고 할까.

사실 이런 경우 그룹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거짓말이 준비되어 있다.

더 젊어서는 아직 인연이 없다며 헤헤 웃기만 해도 먹혔지만, 사십 중반이 되다 보니 상대방의 호기심을 차단할 보다 정교한 답변들이 필요해졌다.

더군다나 동네에서 갈 수 있는 곳이 빤해서 그와 같이 다니다 회원들과 마주칠 수도 있다.

맨날 같이 다니는 그 사람은 누구야?라는 질문까지 커버할 수 있는 완벽한 답변이라면?


“이혼하고 너무 힘들어서 이것저것 다 때려치우고 사촌형 네 집에서 신세 지고 있어요.”


이러면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안쓰러워하는 시선은 어쩔 수 없지만 당당히 말할 순 없잖은가.

실은 올해로 게이 동거 9년 차를 맞이한 전업주부랍니다.


[1] 타초경사: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한다. 넘어가도 될 걸, 일을 벌여 오히려 손해를 본다는 의미의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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