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주부로 업그레이드 됐습니다

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5

by 선우비

* 이 작품은 소설입니다. 지명, 인물, 사건 모두 실제와 아무 관련 없습니다


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4

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3

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2

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1



병원을 다녀온 뒤, 한 가지 결심을 했다.


‘게임을 만들자!’


캐릭터 디자인만 이십 년 해서 게임 프로그래밍과는 관계없이 살아왔지만, 이제부턴 나도 1인 개발자가 되기로 했다.

게임의 종류는 인생 게임.

주인공은 몸뚱이가 허접스런 중년 아저씨.

게임 시나리오는 단순하다.

주인공은 게임을 수행하면서 젊어지는 아이템들을 계속 모은다.

그렇게 계속 레벨업을 한 후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갱년기랑 합체한 화병’이라는 최종보스를 물리치는 것이다.

모바일 기기도 인터넷 접속도 필요 없다. VR처럼 귀찮게 기기를 장착하지 않아도 된다.

직접 몸으로 진행하는 체험형 게임이다.


“반드시 만렙 찍는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먼저 뱃살을 공략하기 위해 수영 강습부터 등록했다.

말랑말랑하고 귀엽다고 그가 좋아하는 부위였지만, 이제 그의 취향 따윈 상관없다.

나부터 살고 봐야지.


“자기 위장병 때문에 양배추로 만든 알약 먹잖아. 그런 화학제품 대신 녹즙기로 생양배추즙을 내서 먹으면 훨씬 효과가 좋대. 하나 살까?”


“그래? 그런데 그거 청소하기 귀찮다고 예전엔 싫다고 했잖아.”


또 홈쇼핑에서 뭔가를 보았군, 하는 표정을 애써 무시했다.

그건 중저가의 싸구려 제품이고 고가 제품은 청소하기도 쉽게 나왔다고 하자, 얼마? 가격을 듣더니 헉, 헛바람을 들이켠다.

그의 미간으로 갈등의 그림자가 떠오른다.


“자기 위장, 진짜 걱정 돼서 그래.”


결국 그의 허락이 떨어졌다.

대신 포항에 사는 즐거움 중 하나이자, 제철을 맞아 축제까지 하는 영덕 대게를 올해는 포기하기로 했다.


“박달대게 두 마리 안 먹으면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산 녹즙기로 아침엔 양배추즙을 짰지만, 저녁엔 젊어지는 주스를 만들었다.

토마토와 시금치가 주재료다.

지겹지 않도록 주말엔 이름 끝에 베리가 붙은 열매들을 첨가하는 등 변화를 줬다.

물 건너온 것들이라 눈이 똥그래지는 가격이었지만 젊어지기만 한다면야.


[주인공이 마법의 물병 +1을 획득했습니다.]


다이어트에 식단조절은 필수다.

집 근처 한의원에서 아예 체질에 맞는 다이어트 식단을 짜왔다.

냉장고에 한가득 붙어있던 배달음식 스티커?

쫙쫙.

문명발달의 최고봉이라 찬양했던 편의점 도시락?

바이바이.

대형마트에 가도 즉석요리 코너는 멀찌감치 돌아갔다.

그것들이 차지하고 있던 냉장고 칸엔 온갖 종류의 마스크팩이 들어찼다.

체육복과 팬티만 사던 홈쇼핑에서 이제는 화장품을 산다.


패션에도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추리닝은 이제 그만!’을 모토로 남성용 패션잡지를 여러 권 사서 공부했다.

세상에는 이렇게 멋진 옷이 많은데 그동안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살아온 게 억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백화점을 두 바퀴나 돌아도 지금의 몸매로는 맵시 나게 옷을 입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개 발에 편자[1]는 사양이다!

이건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나서 도전할 영역으로 남겨두었다.


몸은 그렇다 치고 마음은 어떻게 해야 젊어지는 걸까.

검색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작은 기쁨도 크게 느껴라, 매사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라 등등의 명언집, 마음이 젊어지는 육십 가지 방법 같은 자기 계발서들이 주르르 떴다.

종교 냄새나는 것들을 빼니 죄다 처세술 책이었다.

내용에 영양가가 있는가는 차치하고, 예체능을 선택했을 때부터 글자 많은 책은 싫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좀 땡기는군.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저절로 힐링이 된다는 잡지가 추천목록에 올라와 있었다.

이름은 킨포크.

샘플로 올라온 사진들만 봐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걸 정기구독 하자.


[주인공이 힐러를 동료로 획득했습니다.]


녹차나 홍차, 보이차, 허브차, 꽃차를 마셔봐라, 로즈마리나 유칼립투스 향기로 집안을 채워봐라, 요가 매트를 사서 스트레칭을 해봐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클래식을 들어라,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아이돌 춤을 따라 해라 등등.

일단은 스트레칭과 아이돌 춤부터 시작했다. 몸으로 하는 건 돈이 들지 않으니까.

스트레칭은 초반엔 눈물 쏙의 연속이었지만 효과가 바로바로 나타나니 하는 맛이 나고 수영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아이돌 춤은 빅뱅의 ‘뱅뱅뱅’을 따라 하다 손목을 삐끗하고는 곧바로 포기했다.


[주인공이 유연성 +1을 획득했습니다.]


얼마 전 신문기사를 읽었는데, 우리나라에서 나이 대비 최강의 젊음을 유지하는 집단은 신도시 30대 주부들이란다.

그들은 오전엔 아로마 향이 가득한 집안에서 클래식을 틀어놓고 요가를 하다가, 오후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킨포크 잡지를 읽으며 차를 마신다고 적혀 있었다.

알고 보니 검색에 나온 대부분의 충고가 그들을 타깃으로 한 광고였다.

뭐 어때. 젊어지기만 한다면야.


[주인공이 신도시주부로 업그레이드 됐습니다.]


그는 변화된 내 모습에 당황한 듯했다.

신도시주부 코스프레는, 그의 말대로라면 ‘끼 떠는 게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는 ‘끼순이(여성스러운 게이를 가리키는 은어)’와 어울려 노는 것은 재미있어했지만, 자신의 파트너로는 절대로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토록 사회적 차별을 당하는 만큼 무조건 ‘남자다운 남자’만 좋아하기로 마음먹었다나?

뭐가 남자다운 건데?

일단 목소리가 중저음에 몸매는 씨름선수에 가깝고... 한마디로 ‘딱 봐도 남자다 싶은’ 남자다.

솔직히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속궁합이 잘 맞았던 거다.

하지만 이젠 안다.

진정한 남자다움은 그깟 덩치나 말투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 영혼이 박살 난 그 사건 이후, 남자를 보는 내 눈은 많이 달라졌다.


“라벤더 향이 좋아, 시트러스 향이 좋아?”


향기 캔들을 고르며 물었지만 그는 캔들을 사는 행위 자체가 거북하다는 표정이었다.


“난 인공 향 별론데.”


“그럼 천연 오일로 살까? 비싸지만 그게 더 좋겠다.”


“아니야. 이걸로 사. 귤 냄새나는 거, 이게 좋겠네.”


이런 대화 패턴이 늘어났다.

어쨌거나 그는 이제 내 의견에 ‘노(NO)’를 하지 않는다. 가급적 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건 다 들어주려고 한다.

지나가는 수입차를 보고, “명색이 교수인데, 우리도 이제 외제차 정도는 타줘야 하는 거 아냐?” 하면, “그래, 한번 알아보자.”라고 대답한다.

농담이 통하질 않는다. 노력하는 모습이 안쓰러운 정도다.

하지만, 내 코가 석자다.

지금 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치료행위니까.

이게 다 당신 때문이잖아!

발끈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게 아닐까 싶었을 때 효과가 나타났다. 아주 미약하지만 있었다.

‘그것’의 출현은 여전했지만, 예전처럼 눈이 짓무를 때까지 울거나, 눈물이 멈추면 딱 죽고 싶을 만큼의 우울증이 찾아온다거나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나 갑자기 울음이 터지는 증상은 사라졌다.

기특하게도 그가 출근하고 난 후, 혼자 있는 시간이 되어서야 ‘그것’이 시작됐다.

“요즘 ‘그것’은 어때?” 그가 물으면, “응. 이젠 사라졌나 봐.”라고 거짓말을 해도 될 정도였다.


거짓말이면 어때.

진짜로 괜찮아지고 있는 거 같잖아.

본래 나이를 먹으면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젊었을 때처럼 자고 일어나면 싹 사라지듯이 금방 낫질 않는다. 서서히, 조금씩 증상이 완화되는 법이다.

게임을 계속 플레이하다 보면 언젠가는 최종보스를 물리칠 수 있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1] 개 발에 편자: 가진 물건이나 입은 옷 등이 제격에 어울리지 않아 우스꽝스러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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