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계의 낭만을 찾는 첫 번째 시간이다. 미리 예고했던 대로 포지션 별로 쓰고 있다. 때문에 이번 순서는 당연하게도 골키퍼이다. 내가 축구를 봤던 이래로 위대한 골키퍼는 많았다. 전무후무한 메이저 대회 3연패를 달성한 스페인과 레알 마드리드의 이케르 카시야스, '스위퍼 키퍼'라는 골키퍼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독일과 바이에른 뮌헨의 마누엘 노이어. 하지만 내가 생각할 때 골키퍼 중 순수 낭만 1 티어는 이 선수다. 바로 아주리군단과 유벤투스의 레전드 잔루이지 부폰.
부폰은 파르마의 유스팀을 거쳐 프로팀에서 골키퍼로 데뷔했다. 그리고 데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주전자리를 꿰찼다. 어린 나이에 심적인 부담감이 있었을 법도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이겨내고 피치 위에서 실력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아주리 군단의 부름을 받기 시작했다. 후방이 든든해진 파르마는 이때부터 팀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작은 거인' 파비오 칸나바로, '프랑스의 돌' 릴리앙 튀랑 등과 함께 98/99 시즌 코파 이탈리아와 유에파컵 우승을 일궈냈다. 그렇게 차근차근 본인을 증명하던 부폰은 리피 감독이 있던 유벤투스의 부름을 받게 된다. 이때 부폰은 자신을 키워준 친정팀에게 큰 이적료를 안기고 떠났다. 이적료는 자그마치 700억이었는데, 이는 요즘 미쳐버린 선수 이적료에 견주어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오히려 20여 년 전에 저 정도 금액을 받았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유벤투스에서 탄탄대로만 걸을 줄 알았던 부폰의 찬란한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팀이 '칼초폴리'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칼초폴리란 2000년대 축구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스캔들을 뜻하는데, 전 유벤투스 단장이 외압을 넣어 승부조작을 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유벤투스는 2부 리그 강등이라는 큰 징계를 받았다. 때문에 언론들은 부폰을 비롯한 스타들이 커리어를 위해 팀을 떠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팀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떠나지 않았고 1 시즌 만에 팀이 다시 세리에 A로 복귀하는데 일조했다. 1부 리그로 복귀한 유벤투스는 다시 자리를 잡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결국 11/12 시즌 '무패우승'을 달성했다.
월드컵을 포함해 많은 우승컵을 들어 올린 부폰이지만 유독 챔피언스리그와는 인연이 없었다. 쉽게 말해 리그에서는 꽃길을 걸었지만 별들의 전쟁이라 일컫는 챔피언스리그에서는 가시밭길만 걸었다는 것이다. 조별리그를 통과하더라도 토너먼트 탈락이 빈번했고 기적적으로 찾아온 결승에서는 모두 패배했다. 빅이어를 꼭 들고 싶어 했던 부폰의 간절한 바람은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유벤투스와의 계약이 종료되는 시점에 부폰은 출전시간을 위해 현재 이강인의 소속팀 파리 생제르망으로 이적했다. 이때 부폰은 "오늘이 유벤투스에서 보낸 17년의 마지막 날이다. 17년간 친구, 눈물, 동료, 승리, 패배, 트로피, 대화, 분노, 슬픔, 행복 등 어떠한 것도 잊을 수 없다. 모든 것을 갖고 가겠다"라는 낭만이 가득한 말을 남기고 정든 팀을 떠났다. 마치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처럼.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부폰은 1년 뒤에 다시 유벤투스로 돌아왔다. 이때 유벤투스의 경쟁자는 맨체스터 시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이 있었는데 부폰은 높은 금액을 거절하고 친정팀으로 돌아오는 것을 선택했다. 게다가 이때 선택한 등번호는 파르마 시절 사용했던 77번이다. 축구 팬의 시선으로 봤을 때 정말 의미 있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는 말은 부폰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은 유벤투스에서의 자리가 없음을 인정하고 자신이 커리어를 시작한 파르마로 돌아갔다. 그리고 2023년, 처음 운동장에 들어갔던 그 팀에서 은퇴했다. 여담으로 부폰의 은퇴 과정에서도 낭만 점수를 채워주었던 일화가 있다. 요즘 축구판에 낭만이 사라지는 데에 크게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리그는 크게 두 곳이 있다. 중국과 사우디. 이 두 리그는 선수들에게 천문학적인 연봉을 제시하며 팀으로 합류시키고 있다. 시간이 지나 부폰도 은퇴할 나이가 되었지만 사우디의 러브콜을 받았다. 역시 나이를 고려하면 거절하기 힘든 액수의 연봉이었다. 하지만 그 거액의 연봉을 포기하고 자신이 프로 커리어를 시작했던 파르마에서 은퇴하는 선택을 했다.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파르마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실 거절한 이유 중에는 돈을 많이 벌어둔 것도 있겠지만 부폰은 돈 대신 낭만을 선택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아는 부폰은 그렇다. 물론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못 막을 공은 막지 않는다" - 잔루이지 부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