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많이 지났고 왕이라 불리던 선수는 은퇴했다. 왕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한 클럽은 옛 영광을 뒤로한 채 길고 긴 터널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팀이 헤매는 사이 다른 팀들은 빈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날 뛰었다. 그렇게 2대 왕은 첼시에서 '첼자르'로 불리는 에덴 아자르가 차지했고, 3대 왕은 리버풀과 이집트의 '파라오' 모하메드 살라가 차지했다. 그렇게 2대와 3대의 왕이 탄생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초대 EPL의 왕'으로 군림하고 왕이라는 칭호가 가장 잘 어울렸던 그 선수가 그립다.
'킹 앙리(King Henry)'
앙리가 처음부터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냉정하게 그의 은사가 아니었다면 그저 스쳐가는 유망주에 불과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런던으로 오기 전에는 이탈리아의 유벤투스에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의 플레이를 보고 장점이 없는 망한 유망주라는 평가를 내렸다. '아르센 벵거',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나코에서 앙리를 지도한 경험이 있는 벵거는 그를 영입하기로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벵거의 결정에 의아해하며 의구심을 품었다. 하지만 벵거는 주위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앙리에게 윙에서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변경할 것을 권유한다. 앙리는 윙포워드로 뛰고 싶었지만 "너보다 발도 느리고 키도 작은 이언 라이트도 100골은 넣었다"라는 마틴 키언의 조언을 듣고 자신감을 찾아 포지션 변경에 도전하기로 했다. 앙리가 가지고 있던 윙어로써의 빠른 스피드와 스트라이커로써의 골 결정력을 알아본 벵거의 안목 감춰져 있던 왕의 자질이 수면 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앙리는 아스날에 있던 8번의 시즌 중 절반인 4번이나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중에서는 한 시즌에 리그 24골 20 도움으로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초로 20-20을 달성하기도 했으며 그 기록은 아직도 프리미어리그의 유일한 기록이다. 게다가 그가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몸 담았던 아스날은 여전히 프리미어리그 유일의 무패우승팀이다. 왕이라는 칭호가 가장 잘 어울렸던 그는 375경기 228골 92 도움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그를 상대하기 전날이면 걱정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곤 했다. 내게 이 정도의 공포를 안긴 상대는 티에리 앙리뿐이었다" - 존 테리
"앙리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단 하나다. 악몽" - 쿠디치니
"우리는 그냥 앙리에게 볼을 주기만 하면 된다" - 데니스 베르캄프
"앙리는 기술적으로 타고난 선수다. 그와 함께라면 아트사커를 완성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지네딘 지단
"앙리가 역대 최고냐고? 당연한 말은 답하지 않겠다" - 조세 무리뉴
"그는 단순히 골만 넣는 선수가 아니다. 그는 게임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다. 그의 영향력은 상상 그 이상이다" - 패트릭 비에이라
이처럼 축구계에 여러 인물들에게 헌사를 받고 아스날의 수많은 역사를 썼던 앙리였지만 한 가지 한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바로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 '빅 이어'를 들어보지 못한 것. 때문에 빅 이어를 갈망하던 그는 결국 이적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때 팀을 뒤로한 채 꿈을 향해 떠나는 앙리를 비난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팬들은 본인의 최전성기를 팀에서 보내줘서 고마워했으며, 우리와 함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꼭 은퇴 전에 꿈을 이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앙리는 팬들에게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이적이 결정된 후에 펑펑 울었습니다. 이 말을 하는 것에는 후회는 없습니다. 전 아스날을 사랑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나 곁에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스페인으로 떠났고 결국 그는 꿈에 그리던 빅이어를 들어 올리게 됐다.
앙리와 아스날이 이별한 지 5년이 지난 시점, 전성기가 훌쩍 지나 황혼기에 접어든 시점에 앙리가 꿈을 이루고 아스날에 돌아왔다. 2개월 단기 임대였지만 위기에 빠져있던 아스날을 위해, 도움이 필요할 때 곁에 있겠다던 말을 지키러 온 것이다. 이때 전성기가 다 지난 35세의 노장 공격수를 영입한 벵거의 선택은 그 누구도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이때 앙리는 "나는 이곳에 영웅으로 온 것도 아니고 무엇을 증명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나는 단지 도우러 왔을 뿐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앙리가 돌아온 후 있었던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FA컵 경기. 답답하게 흘러가던 경기 후반, 앙리가 몸을 풀고 교체 선수로 들어왔다. 팬들은 앙리를 연호하며 왕의 귀환을 축하했다. 투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앙리는 자신을 잊지 않은 팬들을 위해 결승골을 터뜨렸다. 그리고 모나코에서 자신을 데뷔시켜 주고 유벤투스에서 망한 윙어였던 자신에게 왕이 될 기회를 준 평생의 은인 벵거를 향해 달려가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골의 순도도 높았지만 전성기 시절 자주 보여주던 앙리다운 골이었다. 왼쪽에서 반대편 포스트를 보고 깔아서 감아 차는 전매특허 기술로 득점에 성공했다. 축구를 사랑하고 아스날의 골수팬인 나는, 그 순간을 실시간으로 보았다. 그리고 넘치는 낭만을 주체하지 못한 채 이내 눈시울을 붉혀버렸다. 내가 축구를 보는 이유를 단 한 장면만 뽑으라면 지체 없이 이 장면을 고를 것이다.
"그는 비록 청동이 됐을지 몰라도 여전히 금빛 순간들을 만들어냅니다!" - 앙리의 복귀골 당시 현지 해설
"앙리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뛰었으며, 팬들을 실망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가 골을 넣었을 땐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 경기가 끝난 직후 아르센 벵거의 인터뷰
"저는 선수시절 수많은 빅게임들을 뛰어 왔습니다. 프랑스를 위해, 바르셀로나를 위해, 모나코를 위해 그리고 아스날을 위해. 하지만 그중 어떤 날을 비교하더라도 그날 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룻밤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아스날로 돌아와 리즈를 상대로 골을 넣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 티에리 앙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