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예전처럼 한 팀에서 한 명의 감독이 장기집권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와 같은 경우의 대표적인 예시는 26년 동안 맨유를 지휘한 알렉스 퍼거슨과 22년 동안 아스날의 지휘봉을 잡은 아르센 벵거가 있다. 한 팀에서 오랫동안 감독을 한다는 것은 그 시간 자체로도 충분히 낭만이 있다.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이 두 감독 중 3번의 프리미어리그 우승, 3번의 리그 컵 우승 그리고 7번의 FA컵 우승을 하며 22년간 1235 경기 736승 2298골을 만들어 낸 벵거 감독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트로피는 상관없다. 나는 내가 원하는 축구를 경기장에서 단 5분이라도 보고 싶다"
벵거는 축구 선수로 활동을 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때문에 32살의 이른 나이에 은퇴를 했다. 비록 선수로서의 큰 재능은 없었지만 현역 시절부터 다른 팀의 경기까지 분석하고 기록했던 그의 노력은 감독으로서 재능을 찾는데에 기반이 되었다. 그렇게 프랑스의 AS칸을 시작으로 AS모나코와 일본의 나고야 그램퍼스에서도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며 커리어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때문에 유럽에서 무수히 많은 러브콜이 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고 그는 그중에서 아스날을 선택한다.
그가 부임한 아스날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선수단 관리는 물론 체계적인 훈련 세션을 도입하고 세부적인 팀 전술도 구상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개인 식단까지 파고들었다는 점이다. 지금은 이러한 것들이 당연한 일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만 하더라도 일부 선수들의 반발심을 끌어올릴 만큼 혁신적인 시도였다. 하지만 팀이 점차 성적을 내기 시작하면서 선수들의 반발심은 믿음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렇게 퍼거슨의 독무대였던 잉글랜드는 벵거가 아스날에 온 이후 균열을 보였고 결국 그는 퍼거슨의 유일한 대항마가 되었다.
혁신적인 시도를 일삼던 그는 결국 '벵거볼'이라는 자신의 축구 철학을 클럽에 입히면서 팀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벵거와 함께하는 아스날은 더 이상 롱 볼에만 의존하는 뻔한 축구를 하던 팀이 아니었다. 역동적인 패스 앤 무브먼트를 통해 만들어 나갔던 아스날의 플레이는 전과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리그와 FA컵을 우승하며 더블을 기록하기도 했던 아스날은 마침내 03-04 시즌에는 전설의 무패우승이라는 신화까지 창조하게 되었다. 05-06 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도 진출했는데 아쉽게도 주전 골키퍼 레만이 퇴장을 당해버리는 탓에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빅 이어를 눈앞에서 놓치기도 했다.
화려한 경력을 쌓아가던 벵거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아스날이 오래된 홈구장인 '하이버리'를 떠나 새롭게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을 짓기로 한 것이다. 그로 인해 클럽은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선수단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경제적으로 상당한 제한을 받았다. 당연히 긴축 재정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벵거는 늪에 빠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늪에 빠지던 벵거는 그간 아스날에서 보여준 성과를 인정받아 여러 감독직을 제안받았다. 고국인 프랑스와 잉글랜드 대표팀을 갈 기회가 3번이나 있었고 레알 마드리드도 두 번의 제의가 있었다. 레알의 제안은 회장 '페레즈'가 보낸 것이었고 '갈락티코'의 감독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시간이 흘러 유벤투스와 PSG에서도 매력적인 제안이 왔고 심지어 퍼거슨이 은퇴한 맨유에서도 스카우트가 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벵거는 이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아스날을 떠나지 않았다. 위기에 빠진 아스날을 두고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클럽의 재정이 악화되자 벵거는 유망주를 싼 값에 데려와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유망주를 잘 키우며 꾸준히 유럽대항전에 진출해야 했다. 클럽이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게다가 잘 키운 선수가 라이벌 팀으로 떠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팔아야 했다. 클럽에 돈이 없었으니까. 때문에 벵거는 현실적으로 리그 우승이 아닌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목표로 잡았고 실제로 20년 연속으로 진출했다. 마침내 벵거는 클럽의 빚을 다 갚아냈다. 하지만 너무 긴 시간에 걸쳐 지쳐버린 벵거의 아스날은 점점 순위가 내려갔다. 결국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실패하자 고마움도 모르는 아스날 팬들은 연신 "벵거 아웃"을 외쳐댔다. 클럽 내부에 어떠한 힘든 일이 있어도 밖으로 표출하지 않던 벵거는 지쳐 보였다. "나는 훈련장, 경기장, 집이라는 작은 삼각형에서 살았다. 내 열정이 이기심을 만들었고 그것은 내 주변 사람들을 충분히 돌보지 못하게 만들었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아스날에서 헌신했던 그는 이 이상의 힘은 남아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벵거는 2018년 22년간의 아스날 생활을 마치고 조용히 런던을 떠나기로 했다. 클럽이 본인을 경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벵거는 아스날을 위한 마지막 배려로 로맨틱하게 '사임'을 결정했다. 그의 마지막 홈경기에서 상대팀인 번리의 선수들과 함께 아스날 선수들이 양 옆으로 줄을 서서 입장하는 벵거를 환영했다. 막상 그가 떠난다고 하자 그를 비난하던 팬들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기립하여 그동안의 노고에 대해서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주었다. 눈물을 흘리며 열렬한 환호를 하는 팬들에게 벵거는 마이크를 잡고 "아스날을 사랑하시는 여러분 팀의 가치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사랑과 지지를 담아서"라는 로맨틱한 말을 끝으로 아스날을 떠난다.
아스날의 전 부회장 데이비드 데인은 조용히 떠난 벵거를 보며 "큰 비판은 하지 않겠지만 벵거가 아스날을 떠날 때 아무 역할을 주지 못한 것은 큰 실수를 범했다고 생각한다. 아스날은 그를 위해 회장이나 무엇이 됐든 자리를 만들었어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먼저 맨유의 감독직을 내려놓은 라이벌 퍼거슨은 구너(아스날 서포터스)들을 향해 "벵거는 매년 아스날을 유럽대항전으로 이끌었음에도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아스날 서포터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며 일침을 가했다. 아스날을 떠난 뒤 벵거는 한 인터뷰에서 "난 어느 클럽이든 떠났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 유일한 결점은 아스날을 너무 사랑했다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아스날과 완전히 동일시했다. 하지만 이는 후회되는 실수였다. 지금은 내가 아스날에 가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일각에서는 벵거에게 '노망 난 늙은이', '만년 4위', '무관의 늪', '실패전문가'라며 비판 아닌 비난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스날이 지금의 명성과 역사를 만드는 데에는 벵거의 역할이 가장 컸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벵거가 아스날에서 이루었던 많은 업적 중 최고는 무패우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의 진심을 알게 된 이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다 벵거의 가장 큰 업적은 경기장 이전으로 인해 생긴 빚을 감당하며 클럽의 위치를 유지했던 것이다. 가끔은 상처뿐인 영광의 시간을 홀로 버텨낸 벵거 감독님을 사람들이 평가절하하는 모습을 볼 때면 기분이 나쁘기도 하다.
"하이버리는 나의 영혼이었고, 에미레이츠는 고통이었다" - 아르센 벵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