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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귀여운 것들

동유럽 포토로그

by Beige 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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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보낸 느릿한 하루의 기록


여행의 첫날밤은 언제나 낯설다. 낯선 시간, 낯선 공기, 낯선 리듬. 작년 런던에서도 그랬다. 시차 적응에 실패한 우리 가족은 새벽같이 호텔 로비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가로등 불빛 아래 그림자처럼 늘어진 가로수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서로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그 새벽의 정적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이번, 또다시 유럽. 8시간이 늦은 이 땅에서의 첫날 저녁, 우리는 또다시 피곤함에 지쳐 깊은 잠에 빠졌고, 그러다 눈을 떠보니 고작 새벽 1시. 서로 깰까 조심스럽게 핸드폰 불빛만 켜놓은 채 누워 있던 그 밤, 모두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내일 일정에 지장 없을까?’ 라는 걱정. 그 조용하고 어딘가 따뜻했던 정적 속에서 엄마가 먼저 일어나 우리를 깨웠고, 그 새벽 4시, 시장한 우리는 조용히 주방으로 모여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 국물의 소리는 자정의 공기를 깨며, 무언의 위로처럼 우리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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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의 첫 여행지는 프라하였다. 숙소 근처에서 타는 트램은 프라하성까지 쉽게 데려다주었다. ‘동유럽에서 트램이라니.’ 이 낭만적인 조합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했다. 프라하성까지는 1.5km 정도였지만, 언덕 위에 위치한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 가족은 트램을 타기로 했다. 풍경을 천천히 누리는 그 여유는 여행에서만 가능한 호사니까.




봄기운이 만연한 프라하. 길가엔 꽃이 흐드러지고, 나무마다 새순이 반짝였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프라하성은 우아하게 솟아 있었다.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로 학생들이 무리지어 지나갔다. 수학여행 중인 듯, 인솔 선생님을 따라 우르르 이동하는 아이들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들에게 프라하성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에게는 감탄이었고, 이들에게는 일상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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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웅장했다. 중세의 고요한 기운이 건물마다 스며 있었고, 붉은 지붕의 도시가 저 멀리 펼쳐지는 풍경은 말 그대로 그림 같았다.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프라하성 그 자체가 아닌 ‘그 뒤’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유명한 포토스팟인 성 외부의 스타벅스 앞 낮은 성벽에서 사진을 찍고, 이번엔 걸어서 내려가 보기로 했다. 그 선택이 이렇게 빛날 줄은 몰랐다. 트램을 타고 내려갔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작은 세계가 그 골목길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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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성의 뒷골목은 작고 귀여운 것들의 천국이었다. 앤티크한 문양이 새겨진 도어벨, 파스텔 톤의 외관을 가진 상점들,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손바닥만한 쿠키와 주방 소품들. 문득문득 고개를 돌릴 때마다 새로운 간판이 나타나고, 창틀엔 계절 꽃들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느 가게 앞에서는 잠시 발을 멈췄다. 바깥에 놓인 테라스 테이블은 낡았지만, 그 낡음마저 근사했다. 누군가의 오래된 일상이 묻어 있는 듯한 그 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찻잔에 담긴 햇살, 그리고 벽에 비친 나무 그림자. 이 작은 순간들이 이 도시를 더 사랑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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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가 프라하성을 방문할 예정이라면, 꼭 말하고 싶다. 트램으로 올라가더라도, 내려올 땐 꼭 걸어야 한다고. 스타벅스 언덕에서부터 이어지는 골목길은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 골목은 누군가의 하루였고, 오늘은 우리의 여행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여행의 진짜 매력은 거대한 성이나 유명한 명소보다, 그런 장소에서 마주치는 작고 소소한 것들에 있는 것 같다. 잘 보지 않으면 지나칠 만큼 작지만, 한순간 가슴을 데우는 귀여운 것들. 우리는 그런 것들로 이 여행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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