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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미키 17> 후기

by 조앤 Mar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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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有


1. 미키 17


“왜 아무도 미키 17에게 ‘사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고 묻지 않는 걸까?” - 영화 미키 17을 보며 내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모두가 미키 반스와 그 복제체에게 ‘죽는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라는 무례하고 멍청한 질문을 던진다. 물론,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그야 우리 모두는 ‘죽음’이란 두려움을 안고 사니까. 죽고, 또 죽어도 계속 반복해서 복제되는 그에게 그 이유를 찾고 싶은 거겠지.


“미키 죽음은 어떤 느낌이야?” 그들은 묻는다. 조롱을 위해, 세상을 떠난 친구의 기분을 이해하기 위해,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미키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대답할 수 없다. 그야 그도 그 ‘죽음’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키의 죽음은 절차의 일부, 연구 과정의 부속물이며 자신 또한 저장된 기억을 통해 살아날 것을 안다. 한 번에 죽기를 바라는 그에게 정녕 우리는 죽음에 대해 물을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죽는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죽지 않는다. - 이 단순하고 명료한 문장을 미키와 우리 중 어느 쪽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미키는 말한다. 죽음은 언제나 두렵다고. 다시 살아날 것이란 걸 알아도 여전히 괴롭고 아프다고. 그럼에도 불쌍한 미키는 죽는 걸 반복한다. 동정과 멸시 그리고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곳에서 살아가기를 결정한다. 고통받고 죽고 소멸하고 태어난다.


소심한 실험체에게 우리는 무얼 물어야 할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미키 산다는 건 어떤 의미야?”


-너는 어째서 그 무수한 고통과 멸시 속에서도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거야? 미키. 우리는 왜 살아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죽음과 삶을 반복해 온 그에게 우리가 질문해야 할 건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특히나, 미지의 행성에서 정착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죽음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삶을 살아갈 용기, 의지 혹은 삶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답이다. ‘살아가자.’ 아니. 삶은 아름답지 않다. 그럼에도 아주 조금은 괜찮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키와 관객, 모두에게 묻고 싶다.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미키 17은 결국 모든 것을 이겨냈다. 미키 1부터 미키 16까지 그리고 미키 18이 그랬듯이 결국 살아가기를 택했다. 그는 원대한 꿈을 품기보단 당장의 현실에 버둥거렸고, 항상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이 또한 자신의 벌이며, 자신은 그 벌을 충분히 수행한다고 믿어왔다.


그는 말한다.


"나도 이제 행복해져도 괜찮겠지."


어린 시절 트라우마였던 붉고 큰 버튼을 누르며 자신의 옥쇄로부터 해방된다. 여럿의 도움으로부터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2. 미키 18


소심하고 찌질한 미키 17과 달리 미키 18은 정반대의 성향을 갖고 있다. 다혈질에 폭력적이고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달고 산다. 자신에게 생체실험을 자행하고 괴로움을 구경하며 목에 주사를 꽂는 이들에게 “만찬에 감사합니다.” 따위의 소리를 내뱉는 미키 17과 달리, 미키 18은 그들에게 총을 겨눈다. 미키 17을 싫어한다던 미키 18은 ‘저녁만찬’의 진상을 들고 불같이 화를 낸다. “죽여버리겠어.” 총을 챙겨 방문을 나선다. 미키 18. 그는 왜 그렇게 화를 냈었던 걸까.


그는 계략을 꾸리고 현명하며 전략적이다. ‘잘못’ 프린트되지만 않았더라면 그가 최후의 미키가 됐을지도 모른다. 훌륭히 작전을 성공시키던, 혁명을 일으키던, 그는 모든 미키 중 유일한 ‘또라이’로서 기나긴 연결고리를 끊어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는 죽음과 삶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변수는 또 다른 자신, 일찍이 죽은 줄 알았던 착해 빠진 미키 17이다. 몇 번이고 자신을 배신한 친구의 ‘너를 13조각 내는 영상을 사채업자에게 보내서 나의 안전을 보호해도 될까?’라는 부탁을 들어주려는 미키 17, 멸시에 감사를 전하는 미키 17. 그에게 있어서는 최악이자 최선의 선택이 ‘그’와 함께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미키 17도, 미키 18도 모두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미키 17과 미키 18의 차이점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했는가 그러지 못했는가에 대한 점이다. 이 모든 일은 자신에게 내려진 벌이라 생각하는 미키 17과 그 또한 기술 결함의 문제라고 믿는 미키 18. 이 차이점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악독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미키 18은 그럴 수 있었고, 미키 17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항상 분노한다. 멍청하고 순진했던 과거의 자신들을. 그리고 여전히 어리숙하고 착한 눈앞의 또 다른 자신을 대신하여 화를 낸다. 이제 변화를 꾀하기라도 하듯이, 자신들을 위해 총을 잡는 걸 택한다.


미키 18은 끝내 케네스 마샬을 죽이고 만다. 망설이고 망설이며 자신의 몸에 달린 폭탄을 터뜨리려 한다. 케네스 마샬은 말한다. “너도 똑같이 두려운 거였어. 너도 인간이었어. Come here boy.” 그 말과 동시에 미키 18은 함께 자폭을 선택한다. 마마 크리퍼와 약조한 주코와 한 사람 분의 죽음을 위해서였다.


나는 그가 살아남기를 바랐다. 분노로 가득한 주제에 그 역시 삶에 열망을 품지 않은 것 같았기에 그가 좀 더 삶을 사랑하길 바랐다. 다만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렇기에 18명의 복수와 한 명을 위한 미래를 남겨두었다. 모든 미키는 하나이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3. 나샤 배랫지 (+그 외)


참 어려운 사랑을 했다. 연인의 죽음과 고통을 보고 견디는 멍청하지만 사랑스러운 사랑이다. 그녀는 유일하게 미키를 위해 화를 낸다. 공감하고 분노하며 기꺼이 그를 사랑한다. 연인의 불사조 같은 행보를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17번이나 죽고, 살아나기를 반복하는 것을 지켜만 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 공상과 상상을 바탕한 사랑이었기에 가능했던 사랑이었다.


“쟤는 미키 반스야! 당신은 평생 이 의미를 모르겠지.”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나샤는 보호장비를 껴서라도 미키가 들어있는 독가스방에 들어가 그의 마지막을 지켜준다. 모두의 만류에도, 그에게 홀로 죽는 외로움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녀는 현실 앞에서 무력하다. 여전히 죽음이 두려운 한낱 인간이고, 아무런 힘이 없는 피지배층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이 연민하는 이를 위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의를 위해 싸움을 선택한다. 그녀는 여전사다. 태생적인 반항가이며 사회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느낀다.


그녀를 사랑하는 동료들 또한 미키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건 명백한 가혹 행위야."

"찍겠습니다. 32K 화질로."


그래. 그런 것이다. 모든 선인이 침묵하지는 않는다.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것이 너무 조용하고 고요해서 우리 중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결코 그들은 침묵하지 않는다.


대단했다. 그들의 사랑과 혁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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