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북방 이야기
북방의 위대한 영웅은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었다. 나는 그대로 석가군에 체포되어 뇌옥으로 압송되었다. 제국을 들뜨게 했던 승전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영웅에서 적과 내통하고 전쟁을 짜고 마무리 한 다음, 그 추문이 드러날까 두려워 석가의 당주를 벤 왕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나의 정적들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나를 죽일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애당초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니깐.
곡기를 끊었다. 뇌옥에서 나는 허기져 지쳐가는 와중에 오로지 그녀만 생각했다. 절망으로 가득한 삶속에서 오로지 나에게 한줄기 빛과 같았던 그녀… 나의 희망이었던 그녀가 죽었다. 그것은 더 이상 나에게도 더 이상 미련을 없게 만들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를 위해서는 그 무엇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왕자의 신분 따위는 그녀의 미소에 비하면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내 곁에 없었다. 어머니도, 그녀도… 내게 소중한 것은 다 나에게 오래 머물러주지 않았다.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곡기를 끊었다. 더는 그녀가 없는 이 세상에 미련이 없었다. 그때 그녀가 찾아왔다. 나의 원수… 명귀비였다.
“포기하는 건가요?”
순간 살의가 치솟았다. 그녀가 했던 말을 똑같이 나에게 내뱉는 망할 년… 하지만 나의 살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포기하지 말아요. 당신이 포기하면, 내가 곤란해집니다. 황위를 훔치기 위해 혈안이 된 석태후를 상대로 당신 같은 좋은 방패가 없는데 이렇게 무너지면 안 되죠. 일어서세요. 그리고 마음을 독하게 먹으세요. 내가 밉지 않나요? 그렇다면, 해야 할 것은 자살이 아니고 복수가 아니던가요?”
“하늘에 맹세하건데, 너는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나의 그녀가 죽은 것처럼 똑같이 불속에서 처참하게 죽여 버릴 것이다.”
“부디, 그 마음 변치 않길 바래요.”
나는 충군형을 신청했다. 죗값을 위험한 곳의 군역을 이행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는 나의 의사는 수용되었다. 나는 변방에 일개 병사의 신분으로 떠났다. 그리고 떠나며 맹세했다. 반드시… 돌아오리라. 그녀의 복수를 위해서.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제국의 변방에서 나는 수도 없이 죽을 기회를 넘기고 수도 없는 승리와 패배를 경험했다. 왕자라는 신분조차 고려되지 않는 곳에서 미친 듯이 싸우고 또 싸웠다. 오로지 그녀를 위해 죽지 않고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 노력이 나름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제국의 영웅이 되어 있었고, 충군형의 형기는 만료되었고, 수많은 병사들과 군부의 요인들에게 나는 절대적인 제국의 군신으로 추앙받고 있었으니깐. 그렇게, 나는 다시 황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무사히 돌아온 모습을 보니 기쁘군요.”
“이제는… 예전처럼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하는 명귀비를 보며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좀 더 증오를 세련되게 다듬을 필요가 있겠군요. 아직 멀었어요. 좀 더 강해지세요. 앞으로 그대는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여기서 주저앉아서는 곤란합니다.”
“또 무슨 계략을 꾸미는 거지?”
“기대하시죠. 그때까지 비밀로 남겨두도록 하지요.”
정말이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증오스럽다. 특히나 그녀를 닮은 그 말투는 더 내 마음을 분노하게 하였다. 나는 뒤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분란을 지켜보는 형을 외면하고 내 처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에는 큰 위기가 닥쳐왔다.
“석씨 일가가… 늑대들에게 관문을 열어줬다고?”
“그렇습니다. 원정을 나가신 폐하는 예상치 못한 반란군의 기습에 그대로 전사하시고, 늑대들은 3왕자를 황제로 옹립하고 황도로 신속하게 행군하고 있습니다. 장성이 뚫렸습니다. 이제 곧 제국이 늑대들의 손에 넘어갑니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사상 최악의 변란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제국을 좌지우지하던 석씨일가… 그들은 이번에 자신의 외손이 황위에 오르지 못할 것이 확실해지자 저질러서는 안 될 짓을 저질러버렸다. 나는 왜 석태후가 그렇게 열심히 황제의 친정과 3왕자의 종군을 종용했는지 의아했었다. 그리고 결국 이런 식으로 제국의 위기가 닥쳐왔다. 이건… 정말로 위험하다. 황위가 빈 상태에서 이제 도성은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그러나 늑대들은 그 특유의 기동력을 살려 순식간에 황도로 쳐들어 올 것이다. 멸망이 촌각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다들 그렇게 멸망해 갈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다들, 진정하십시오. 사태를 침착하게 대처하도록 합시다. 지금은 제국에 위기입니다. 다들 우왕좌왕할 때가 아니라 합심하여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명귀비였다. 그녀는 의외로 침착하게 혼란에 빠진 중신들에게 정숙을 명했다. 그러나 그들의 혼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귀비마마 상황이 심각하옵니다. 지금은 그야말로 위기가 경각에 달린 상황입니다. 서둘러 태자마마와 귀비마마는 남쪽으로 피난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남경에서 서둘러 즉위하셔야 합니다. 황위를 비워둘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아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가 황제가 되던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치면 웃음거리만 될 뿐입니다. 태자와 나는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것은 옥좌에 누가 오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적을 막느냐 입니다.”
“하오나… 이미 적들이 근거리에 다가왔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우리에게는 제국의 군신이 여기 있지 않습니까? 그가 군을 지휘 할 것입니다.”
나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당황했다. 나… 나? 그리고 나와 그녀의 원한을 아는 중신들이 경악하는 사이 그녀가 연이어 명했다.
“지금 즉시 2왕자에게 모든 금군과 어림군, 그리고 도성방위군과 의용병의 모든 통솔권을 부여하도록 합니다. 2왕자, 그대가 대장군으로 제국에 남은 모든 병력을 이끌면 승산은 어느 정도라 생각합니까?”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그녀로서는 선택하기 어려운 결단을 내리는 그녀… 역시 만만히 않은 여자다. 하지만,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오로지 그것만이 유일한 제국의 살아날 방법이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마도… 반반 정도? 하지만 명귀비에게 여쭙겠습니다. 왜 저입니까? 내가, 군을 이끈다는 것은 당신에게 달가운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왜 나에게 그것을 맡기는 겁니까?”
그녀는 간단히 말했다.
“늑대의 아가리에 손을 집어넣을 사람이 필요하니깐 요. 늑대의 목구멍을 파고들어 늑대를 죽이던, 늑대에게 손을 잃던 나로서는 손해볼일이 없는 일이죠. 더 설명이 필요한가요?”
“아뇨. 필요 없습니다. 군대를 이끌겠습니다.”
사망하신 아바마마를 대신해 대리 자리에서 나를 불안하게 바라보던 형의 시선과 곁에서 수렴의 뒤에서 지껄이는 명귀비를 뒤로 하고 나는 조정을 박차고 나왔다. 군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이기고 돌아올 것이다. 그 가증스러운 년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전투는 대승리로 끝났다. 그들은 변함없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양익의 궁기병은 전방의 노예 보병들을 돌파하기만 하면 무의식적으로 양측 면으로 물러나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돌격을 감행했고, 늑대들과 그들과 손을 잡은 석가군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그리고 전쟁은 끝났다.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사람들의 연호를 나는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태자였던 나의 형은 난이 평정되고 황위에 올랐다. 상당히 많은 군의 간부들은 여세를 몰아 황도로 진격하자고 하였지만, 나는 그것을 거부하였다.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 복수로서 어울리지 않는다. 그년이 만들어준 기회를 가지고 복수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그것은 오로지 내 손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는 나를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이제 제법, 증오를 다스릴 줄 알게 되었군요. 장하네요.”
나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북방의 방어를 위한 군의 최고 책임자의 자리를 요청하고 황도를 떠났다. 황제는 만류하였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오랜만에 도달한 북방의 땅에서 그녀를 만났던 곳에 가 나는 그녀를 애도하며 어느새 그녀를 만난 지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을 알았다. 그것은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나는 여전히 잊히지 않는 그녀를 추억하며 무너진 장성의 방어진을 구축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를… 잡아오라고 하더냐? 그년이 그러더냐?”
어명을 들고 온 황실의 사자는 변방의 장군에 불과한 나의 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혹정이 이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병약해도 온화하여 통치에 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 형은 상당히 모친에게 휘둘렸는지 대단히 가혹한 정책을 이어갔다고 했다. 상당히 많은 군부의 인재들과 관료들이 숙청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하고 피를 보는 나날이 이어졌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대부분 간접적이나마 과거 석태후와 석씨 일가에 협력한 이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원죄가 있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식의 가혹한 숙청은 반발을 부른다. 그들은 그래서 나에게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행동에 결국 황실은 나에게도 손을 뻗어왔다. 예상치도 못한 재상의 자리에 봉하니 서둘러 병력을 남겨두고 황도로 돌아오라는 조칙을 들고 왔을 때 나는 사자들에게 그렇데 내뱉었다. 그리고 나의 측근들은 결국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의견을 같이 했고 봉기를 주장했다. 결론은 어렵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힘도 그리고 정당성도 가진다. 황권을 능멸하는 계집을 벌하겠다는 나의 봉기 사유는 의외로 수많은 동조자를 불러 모았다. 진압군마저 우리 측에 합류하는 흐름 속에서 나는 순식간에 황도로 쇄도했고 반란은 성공하였다.
“황제는 신병을 확보하여 구금하였습니다.”
“명귀비는?”
“그… 저항하고 있습니다. 황후전에서 남은 잔당들과 함께 항복하라는 요구에도 수용하지 않고 농성중입니다.”
“끌어내어라. 겨우 환관들과 상황 파악을 못하는 멍청이들뿐이잖은가?”
“하오나, 그 저항이 문제가 아니라, 황후전이 문제입니다. 황후전에 그들은 잔뜩 기름을 치고 싸리나무를 쌓아두었습니다. 들어오면 자결하겠다는 식으로 저항하고 있어 섣불리 진입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나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요망한 년… 나에게는 세련된 증오를 보이라고 하더니, 어찌 이토록 추하게 저항하는가? 마치 죽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좋다. 그렇다면 죽여주마. 원래 내가 너를 죽이려던 그 방법으로 죽여주마. 나는 비정하게 명했다.
“그래? 그러면 수고를 덜었구나. 태워라.”
“네? 하… 하지만…”
“불을 붙여라. 제가 살고 싶으면 기어 나오겠지. 살기 싫다면 그대로 내버려 둬라. 그게 그년의 운명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멀리서 황후전의 불길이 오르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대여… 나의 아내여… 보고 있습니까? 그대의 복수를 마쳤습니다. 이제는 마음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며 저 하늘 어딘가에 있을 그녀를 추모하였다. 그년은 결국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예상했던 대로인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불길이 꺼지고 전소된 황후전을 조사한 병사들이 곧 나에게 보고를 하러 왔다.
“수고했다. 시신은 어떻게 되었느냐?”
“수거하지 못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확인되지 못했습니다. 상당히 화재가 심해 안의 시체들이 다 심하게 훼손되어 확인이 어렵습니다.”
“그러면 아직 사망을 확인하지 못한 것 아니냐? 어찌 안심한단 말인가? 혹시나 빠져나갈 비밀통로 같은 것이 있다면 살아 있을지도 모르잖느냐?”
“황후전에 화재를 조사하며 비밀통로를 발견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명귀비가 살아있지는 않을 꺼라 생각됩니다.”
“어째서?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유품을 확인하였습니다. 수거한 유품 중에서 명귀비가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다는 장식품을 시녀를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절대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다는 그 유품이 발견된 걸로 보아 시체들 중에 있을 것이 확실합니다.”
“유품? 그것이 무엇이냐?”
나는 그쯤에서 적당히 사인을 확인하고 조사를 종결지으려 하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병사의 말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붉은 호박 노리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