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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수현 Sep 03. 2024

북방 이야기 : 절망 1

[소설]북방 이야기

고개를 들어 분묘를 둘러 보았다. 우리 한족의 황릉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초원의 한 언덕 밑에 위치한 무덤은 눈에 띄게 도드라져 보였다. 나는 계속 이곳의 위험을 경고하며 안전한 후방으로 철수를 주장하는 제장들에게 물었다.


“늑대들은… 원래 죽으면 새와 바람에게 실려 하늘로 돌아가게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조장과 풍장을 지낸다고 들었는데… 대체 왜 이런 무덤을…”


제장들과 신료들이 나의 눈치를 보다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들의 칸, 아니 그 개자식이 내린 유언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노예… 아니, 그분을 자신이 죽고난 다음 죽여서 순장시키라는… 그래서, 그 순장의 명을 따르기 위해 그들의 격식에 맞지 않게 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신료가 말한 이름… 내 일생동안 사랑해온 한 여인에 가슴아팠고, 절망속에서 구원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고, 죽어서도 늑대의 노예로 살아가도록 살해당한,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던 무력함에 고통스러웠다. 그 분노가 신료들에게 전달된 모양인지 그들은 연신 이곳이 병법 상의 험지라고 주장하면서도 더는 철수를 강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가슴속에 깊은 분노가 치솟았다.


이제, 네놈들이 그토록 두려워 하던 칸이 죽었다. 그리고, 내분에 휩쌓인 그들 늑대들의 일파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고 이제 그 자가없는 늑대들은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 그 칸의 서자, 그녀가 범해져서 낳은 그의 아들마저도 우리에게 출병을 통해 자신의 지원을 청하고 있다. 그런데 뭐가 두려워서 이리 추한 꼴을… 무능한 놈들, 네놈들이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그녀가 그런 감당하기 힘든 책임을 짊어지고, 결국 이토록 비참하게 죽지 않았으련만… 황후와 그녀의 외척, 석씨들이 대부분인 그 무능한 자들을 보며 나는 명령을 내렸다.


“숙영지를 건설하라. 금위군이 돌아올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린다.”


신료들의 불만속에 숙영지는 건설되고 나는 지시를 내린 금위군을 기다렸다. 그들이 돌아온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나는, 피갑칠을 하고 들어온 금위군을 보며 그들이 임무를 완수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말없이 그들에게 결과를 물었고, 그 뜻을 알아차린 병사들이 한 노파를 내 막사로 끌고 왔다.


“폐하… 어이하여… 어이하려 우리 수련족을 이리 핍박하시는 겁니까?”


노파는 피투성이가 되서 나를 보며 울부짖었다. 나는 그 노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늑대도 한족도 아닌 그들의 독특한 복식… 그녀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술을 부리는 부족, 수련족이고 그들중에서 지도자라 할만한 가장 사술이 강하고 세상에 영감이 뛰어나다 알려진 수련족의 새터니였다. 한때, 그들은 그들 특유의 사악한 술수로 한족의 제왕의 첩으로 들어와 세상을 어지럽혔고, 그래서 사람들의 박해를 받아 멀리 변방을 떠돌았다.


그런 그들 중에서도 특히 그들의 새터니는 특이한 힘을 가졌는데, 일생에 단 한번 정말로 사람들이 놀랄 사술을 부릴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그 능력은 천차만별이고 자신 외에는 그 능력이 무엇인지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고 하여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하지만… 이번 새터니의 능력은 우연찮게도 이 노파의 아들이 우연히 검문에 걸려 고문당하고, 그 와중에 필요도 없는 사실까지 나불거리느라 세상에 알려져 버렸다. 나는 그 능력을 가진 노파를 보며 말했다.


“그래, 짐은 한족의 황제다. 네가 수련족의 새터니라 들었다. 그리고… 그 능력에 대해서도 들었다. 일생에 단 한번 소중한 이를 위해서만 쓴다는 규칙이 있다고 했다지? 지금… 너는 그 능력을 써야 한다. 나를 위해서. 그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그 누구보다 더 소중한 네 년의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나의 말에…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다.


“겨우… 겨우, 그런 이유로… 저희 일족을 다 저를 제외하고 모두 도륙하신 겁니까? 고작… 타인의 과거를 보시기 위해서요?”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타인이라니… 짐의 정인이다. 짐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고 아직도 사랑하는 여인이다. 그리고… 짐이 구하지 못하여 절망속에 능욕당하며 살다가… 결국 죽어서도 그 늑대의 노예로 순장당하여 살해당한 여인이다. 나는… 그것을 내 가슴속에 깊이 새겨야 한다. 죽어도 늑대들의 복수를 잊지 않도록… 그리고, 그녀를 구하지 못한 내 어리석음을 스스로 자책하기 위해 나는 그것을 보아야 한다.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절망을 맛보며 죽어갔는지를…


함부로 혓바닥을 놀리지 마라. 내게는 천하의 일을 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 어서 준비해라. 나에게 그녀의 모습을 보여라. 그것이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일임은 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을 보아야 한다. 그녀가 이곳 늑대의 땅에서 그들의 칸의 노예로 범해지고 고문당하고 수치를 당하며 사그라졌던 그 광경을… 나는 보아야 한다. 그것이 나의 의무이고 네 년이 나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 더러운 수련족의 사술을 유일하게 좋은 일에 쓸 기회다. 그러니, 시행하라. 어서!!!”


나의 일갈에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나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것은… 왠지 모르게 분노를 담은 눈빛이었다. 이 노파가 감히… 거역할 셈인가? 내가 쓴맛을 보여주려고 하는 찰라… 그녀가 말했다. 흐트러진 자세와 태도를 바르게 고치고선.


“알겠습니다. 그것이 정녕… 폐하의 소원이시라면 명을 따르겠습니다.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수련족의 새터니로서 가진, 하늘로 부터일생에 단 한번만 사용하는 것을 허락받은 능력을 사용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러면 만족하시겠습니까?”


“흥… 계산이 빠르구나. 그래, 어서 해라. 그것만 해낸다면 내 너에게 후한 상을 내려 살려보내 줄 것이다.”


나의 말에 그녀는 왠지 모르게 차갑게 말했다.


“아뇨… 보상은 필요없습니다. 그리고, 생을 담보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시간만 하루를 주십시오. 그 능력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천지신명에 허락을 구하고 사용해야 하는 법칙을 거스르는 능력이옵니다. 그러니… 하루 목욕재계하고 심신을 맑게 해야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서… 폐하를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하겠습니다.”


“설마… 무슨 잔꾀를 부리는 건 아니겠지?”


“이제… 뛰는 것도 여의치 않은 노파입니다. 제가 할일은… 오로지 그것을 보여드리는 것뿐이라고 제 점괘에 나오는군요. 명을 따릅죠. 그러니… 시간만 하루 더 주십시오.”


나는, 참모들이 얘기한 현 위치가 지체하기에는 지나치게 깊숙히 들어왔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하루의 시간은 늑대들의 행군 속도를 생각해보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시간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참모들의 우려처럼 늑대들이 우리의 북진에 자극받아 잠시 내전을 멈추고 단결한다고 해도, 이미 여러 개의 분산된 금위영으로 늑대들에게 내가 있는 위치를 숨기고, 전방에 산개한 부대들로 인해 내 소재를 정확히 모르는 그들이 이곳으로 직결 기습하지 않는 한… 그들의 공격은 성공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허락했다.


“좋다. 하루의 시간을 주겠다. 가서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오라.”


그녀는 병사들의 부축을 받아 늙은 몸을 일으켜 막사를 나갔다. 나는… 나가는 그녀를 보며 다른 사람들도 다 내보내고 막사에 홀로 남아 공허한 마음을 다스렸다. 마음의 한편에서는 그녀가 겪었던 절망의 시간을 수련족 새터니의 능력을 통해 내 눈으로 목격하며 그녀가 겪은 고통에 아파할 것이 두려웠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이 되어서도 일생 나를 걱정하며 나의 안위를 위해 알게 모르게 노력해준 그녀를 보며 감격할 것에 기뻤다.


그러면서… 나는 어느덧 과거의 회상에 빠져들었다. 서글픈 일이다. 내가 직접 목격한 일들은 이리 생생하게 내 뇌리에 바로 방금전에 있었던 일처럼 떠오르는데… 내가 보지 못한 그녀의 절망의 시간은 그저 듣고 멀리서 본 것만으로 알수 밖에 없다니… 나는 마음속 깊이 탄식을 내뱉으며 그녀를 처음 만났던 시간을 회상했다. 그것은, 황성에서 유달리 시리도록 푸르던 여름의 환상과도 같은… 나의 어린 시절에 가장 강렬한 기억이었다.


“태자마마를 뵙습니다. 유화라 하옵니다.”


“아… 아, 이제야 보게 되는군요. 나의 정혼녀…”


나는 황성에 와서 선황계 예를 표하고 이어서 나를 보며 예를 갖추는 그녀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는 그야말로 미의 여신이 강림한듯한 아름다운 외모와 하얀 피부, 그리고 칠흑 같은 머리결을 가진 절세의 미녀였다. 그 말로만 듣고 막연히 상상만 하던 그녀의 본 모습에 나는 내 빈약한 상상력을 저주했다. 그것은, 내 망상속에 모습과는 비교도 하기 힘든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니깐. 툭하면 석씨 일가에서 내 정비로 들여야 주장하는 그네들의 박색인 딸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미모 뿐만 아니라 그녀는 마음가짐과 지혜도 뛰어난 여인이었다. 우리 한족의 북방의 수호신으로, 오랫동안 영원성에서 주둔하며 북방군을 이끈 제국의 충신이며 명장인 유림 장군의 여식인 그녀는, 자신의 부친을 닮아 재기넘치고 박식하며 사람들의 위에서 서는 것에 부끄러움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장차 이 제국의 황후로서 손색이 없는 그릇이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해주신 선황에게 감사드렸다.


원래대로라면, 나의 정실의 후보도 당연히 권신이 되어 제국의 조정을 휘두르는 석씨 일가에서 지명한 그 계집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부황은 그런 원칙을 무시하고 대신에 석씨 일가가 눈엣 가시처럼 여기던 유림 장군의 딸을 나의 정실로 지목하였다. 그것은 석씨 일가의 권세에 견제를 하고, 대신에 아들이 없는 유림 장군이 또 다른 석씨일가가 될리는 없기에 가능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런 정치적인 의미를 배제하고라도 나로서는 그저 제국의 영웅의 딸이자, 내가 꿈에 그리던 그녀와 맺어진다는 사실에 기쁠 따름이었다.


그리고, 공식적인 부황에 대한 예와 동행한 유씨 일가의 집사와 군인들의 보고가 끝나자, 부황께서는 내 맘을 아시는 듯 특별히 나에게 명하셨다.


“그러고 보니, 나의 며느리 후보는 황성이 처음이라고 했던가? 공식적인 일은 번거로우니 신경쓰지 말고, 오늘은 편안히 도성을 둘러보며 구경을 하도록 하면 좋겠지. 그리고, 거기 태자가 동행하면 어떤가? 우리 북방의 선녀에게 정혼자로서 직접 안내를 해주도록 하라. 특별히 오늘 수업은 하루 쉬는 것을 허락한다. 어떠냐? 하겠느냐?”


거절할 리가 만무한 어명이다. 나는 조금 수줍어 하는 그녀와 함께 도성을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호화로운 황성의 풍경을 보면서 감탄한 얼굴을 보였다.


“대단하군요. 소녀가 북방에 늑대와 인접한 땅에 살아 이리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이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금빛이 빛나는 것이 설마… 정말로 금은 아니겠지요?”


“하하하. 왜 아니라고 생각하나? 부황께서 폐주를 몰아내시고 황실에 위엄을 세우시고자 할 때 만드신 금당각은 정말로 금박을 입힌 건물이지. 석양이 지는 무렵에 보면 눈이 부시고 그 붉은 빛이 아름다워 절로 황실의 권위에 감탄하게 되지.”


“아, 네… 과연… 저 화려한 건물은 확실히 범인들에게는 감히 쳐다보기 힘들 정도군요.”


“하지만, 익숙해져야 하오. 이제 내가 황위에 오르면 저곳은 그대의 거처가 될 테니… 저곳은 황후를 위한 거처, 앞으로 그대가 머무르게 될 곳이라오.”


그녀는 나의 말에 조금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저 장소에 가장 잘 어울리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조금 난감해해 하는 그녀의 북방의 소박함에 또 한번 반해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즐겁게 아름다운 도성을 거닐며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이제 슬슬 그녀의 숙소로 돌아오려고 할 때 쯤이었다.


“죽여! 죽여!!!”


“어이, 제대로 밟으라고. 저 자식 아직 눈빛 안죽었어.”


어디선가 격한 난투가 벌어진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저곳은…”


“아, 저긴 황실의 방계 황족 자식들과 명문대가의 자제들, 그리고 외국에서 보내진 귀빈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인질이라 불리는 자의 자제들을 모아두고 교육을 시키는 학당이요. 보아하니, 흔한 싸움인듯 하군요. 그대는 관심가질 필요없소. 그러니 이제 돌아가서 저녁 만찬을… 어? 유화, 어딜 가는 것이요?”


“그냥 두고보기 그렇습니다. 한번 가보도록 하시죠.”


정말이지… 못말릴 나의 정혼녀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따라 갔다. 그곳에서는 바닥을 나뒹구는 한 소년과 그들을 구타하는 방계 황족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태자로서의 위엄을 보여줄 기회라 생각하고 일갈했다.


“이놈들… 감히 어느 안전에서 난동을 부리느냐? 그만두지 못할까?”


“어? 태자마마…”


그들은 순식간에 폭행을 멈췄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물었다.


“이게 무슨 난동이더냐? 학문의 장이어야 할 학당에서 이 무슨 짓이냐? 여기 북방에서 온 귀인에게 보이기에 부끄러워 내 얼굴을 들수가 없구나. 네놈들이 경을 쳐야 정신을 차릴터냐?”


“하… 하오나, 마마. 저희는 정말로 억울합니다. 이 망할 늑대새끼가 제 주제도 모르고 한족 여인을 범하려 들었습니다. 그걸 보고 용서할 수 없어 달려들었는데, 사과하기는 커녕 오히려 덤비는 이 놈의 망발이 어처구니 없어 하던 중입니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바닥에 나뒹굴던 소년을 바라보았다. 구타당해 상처투성이에 피를 흘리면서도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보는 그 소년… 그것이 내 일생의 악연이자 나와 그녀의 원수가 되는, 늑대의 칸, 쿠타이와의 첫만남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가 그렇게 될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그가 당대의 우리와 우호를 도모하는 칸과 대립하는 칸의 동생의 서자이며, 그런 칸의 동생을 눈엣가시로 여긴 칸이 그의 여자를 빼앗고 그를 죽였고, 그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어미를 따라 칸의 양자가 되었다가 화평을 위한 인질로 제국에 보내졌다는 것이었다.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곳 학당에서 흔치 않은 늑대의 복식을 한 소년이라면 그가 유일하니 알고 있었다. 늑대와의 평화가 이어지며 그들은 나름 우호의 표시로 사절들을 보내 도성에 상주시켰고, 우리 제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인질로서 칸의 일족도 보내왔는데, 무슨 변고가 생기면 죽여도 무방한 인질의 특성상, 그는 늑대들에게서도 그리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다. 아니, 어쩌면 사절로 주재중인 늑대의 사자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외교적 양보의 의미로 그 소년을 죽여도 좋다는 동의를 할 수 있게 권한을 받은 상태였으니, 그 소년은 늑대들에게 있어서 버리는 패와도 같다고 할 것이다.


외교는 중요하지만, 우호국도 아닌 적성국에서 온 인질에다가, 그런 사정이 있는 소년이니 아마도… 형식적인 교육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학당에는 보내졌지만 한족 동문들의 괴롭힘이 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들도 억울하다 항변을 하니 사정을 들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나의 뒤에서 그것을 기이하다 보고 있는 그녀에게 내 현명한 판단을 보여줄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에게 물었다. 양쪽의 말을 다 듣는 것은 위에 선자의 의무니깐.


“정말이더냐? 네 동문들의 말이 정말이더냐? 내게 사실을 고하라.”


그러나… 그 자식은 정말로 늑대였다. 상처투성이에 늑대치고는 호리호리한 몸이 비틀거리면서고 나를 오히려 노려보며 빈정거렸다.


“흥… 사실을 말하면, 그걸 그대로 믿을 것인가? 어차피 한족은 한족끼리 편을 들 것을…”


이 자식이… 나는 조금 노기가 치미는 것을 느끼고 말했다.


“네놈이 할말이 없으니 그런 것이겠지? 어딜 한족이 서로 편을 드는 등의 망발을 하느냐? 듣자하니 한족의 여인을 네가 범한 모양인데… 그러면 딱히 들어봐야 의미는 없겠군. 빼도박도 못할 사실이니 네놈이 늘어놓는 말은 그저 변명에 불과하겠지.”


“내가 말한대로지 않은가? 내 말을 들어볼 필요도 없이 그들의 편을 들고 있군. 어차피 늑대를 모르고 이해할 생각도 없는 네놈들 한족들이 무슨 말을 하든 들을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니, 나는 늑대를 안다. 나는 영원 태수 유림의 딸이다. 그리고 북에서 내어나 북에서 자라 늑대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니… 내게 너희 풍습을 변명의 근기로 삼지 마라. 사실대로 고하라.”


나는 내 앞에 당당히 나서는 그녀의 모습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 어린 늑대도 조금 당황하는 듯 하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구제불능이었다. 그런 그녀의 말에도 여전히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나는… 늑대들의 방식대로 행했을 뿐이다. 늑대들에게 환처는 당연하다. 계집에게 좋은 씨를 내려주는 것이 늑대의 풍습이라 그리 한건데 뭐가 문제지? 내가 설령 신내림받은 계집을 안아도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가 모두 바보라고 생각하나? 설마하니 늑대들이 수시로 행하는 아내를 교환하는 환처의 풍습도 모를까 보냐? 그리고 신내림 계집을 안다니… 늑대들이 유일하게 함부로 손대선 안된다고 신성히 여기는 여인이 바로, 그들의 무녀인 신내림 처녀들이다. 그런 여자들까지 안는다는 망발이나 지껄이는 놈이라니… 정말로 구제불능인 놈이군. 그리고 누굴 바보로 아나? 설마하니 그 정도도 모르리라 생각하고 말하는 건가? 정말이지… 용서가 안되는 놈이군.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말에 인상을 찌푸릴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래… 그녀도 이 녀석의 말에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확신했다. 이 자식은 구제불능의 쓰레기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질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은, 이 자식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교만하고 건방진 놈 같으니… 감히 자기가 외교적 면책 특권이라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닌 나 제국의 태자 앞에서? 나는 놈을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를 구타하던 이들이 내게 말했다.


“보십시오. 아주 어쩔 도리가 없는 놈이지 않습니까? 욕을 본 한족 처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 놈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마께서 잠시 눈감아주시면, 형조에서 쓸데없는 재판이나 하는 대신에 그냥 저희가 이 놈을 손보도록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거… 구미가 당기는 말이군. 나는 그것을 허락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잠시만요. 그보다는 더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나와 그들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는, 그 늑대를 내려다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들어보니… 그를 어디론가 데려가 조용히 처리하실 생각처럼 들리는 군요. 하지만, 그래서야 의미가 없지요. 욕보인 처녀의 한은 누가 풀어주나요. 그녀가 욕을 보았다면, 그에 상응하는 수치를 이 자에게 안겨주어야 합니다. 그것도 세상 사람들이 다들 보는 곳에서 아주아주 수치스럽게 말입니다.”


“응? 그대가 무슨 좋은 방도가 있는가?”


“네… 어리석은 소녀의 의견이옵니다만, 이건 어떻습니까? 그를 나무에 매달아 놓으십시오.”


“나무에 매달라?”


“네, 그래서 밑에 처녀를 욕보인 죄를 소상히 적어 지나가는 이들이 다들 욕하고 돌을 던지게 하십시오. 늑대들은 제 딴에는 명예를 중시하는 자들… 그들에게 그런 치욕은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시는 것이 그 처녀를 욕보인 것에 대한 응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만. 어떠십니까?”


나는 그녀의 기지에 감탄하며 말했다.


“과연… 나의 정혼녀로다. 그래, 그것이 좋겠군. 다들 들었지? 이 놈을 묶어서 나무에 매달아 놓고 방치하라. 그래서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 것이 이 놈에게 합당한 죄의 대가가 될 것이다.”


나의 말에 그들은 희희낙낙하며 그 어린 늑대를 포박했다. 그리고… 그 늑대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강렬한 눈빛으로…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무신경하게 무시하였고, 나는 그 어린 놈의 눈을 파버리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판결은 내려졌고 그는 그들의 손에 결박되어 나무에 묶였고, 우리는 그를 조롱하는 그들의 모습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것이… 나와 그녀와 그 자의 첫번째 만남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녀의 명쾌한 판결에 감탄하였지만, 그 더러운 늑대의 저주어린 눈빛은 계속 나를 찝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틀리지 않았다. 그 자식은 우리와 일생에 걸친 악연이었고, 그 악연은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아니 우리는,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다시 지독한 악연으로 엮이게 되었다. 그것은… 그 글러먹은 늑대 새끼가 그냥 여염집 처녀를 범한 것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운 엄청난 악연이었다.


“유림 장군이… 전사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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