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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수현 Sep 05. 2024

북방 이야기 : 절망 3

[소설]북방 이야기

“유가군의 절반이 붕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던 강력한 수장이 지금 무슨 꼴이 되었는지 천하 모든 백성이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북상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설령 구한다고 해도…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늑대에게 범… 아니 고초를 겪은 상황입니다. 설마 금당각의 주인으로 아직도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절대 만무합니다.”


신료들의 반대는 명확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도 한결같았다. 절대로, 늑대에게 범해진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녀를 구해야 했다. 지금도 그 잔혹한 자에게 고초를 겪고 있는 그녀를, 나는 반드시 구해야 했다. 결국… 나는 그들과 타협을 해야 했다. 석씨 일가에서 황후를 맞이했다. 그 박색의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금당각을 내어주고 나서야, 신료들은 교환 조건으로 북진에 동의했다. 나는 결심했다. 반드시 구하리라… 그래서 다시 내가 안고 돌아오리라.


저런 둔한 계집은 황후라는 이름으로 내던지고 돌아보지 않겠다. 오로지, 그녀만을 데리고 곁에 두고 지켜주지 못한 죄를 속죄하며 평생 위로하며 살리라. 그렇게 마음 먹었다. 그래서, 대군이 편성되었다. 그리고 그 군단은 노도와 같이 북으로 향했다. 유가군의 붕괴 이후 상당히 밀려난 국경선을 넘어 나는 그녀가 있는 땅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그곳은 한족에게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지독한 날씨와 험한 지형…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교활한 기습.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때는 우리는 분단되어 각지에서 고립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몇번의 격전… 그 와중에 나는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나는 어느 게르에서 눈을 떴다.


“정신이 드나?”


희미해진 의식을 퍼득 들게 만든 것은, 죽어도 기억속에 잊지 못할 그 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결박된 나를 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난전중에 포로로 잡힌건가? 그가 눈을 뜬 나를 보며 말했다.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 송구하오. 그래도, 제국의 천자를 모심에 소홀함이 없으려고 했는데, 그나마 가장 좋은 곳이 내 게르 밖에 없어서 말이오. 불편하겠지만 좀 참아주시오.”


“네놈… 네놈이 나를… 아! 그녀는? 그녀는 어디 있느냐? 이 자식아, 나의 그녀는 어디 있더냐?”


나는, 내가 포로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보다도 그녀의 안부가 더 궁금해서 소리쳤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아… 그걸 찾으러 왔소? 큭큭큭… 이거 걸작이군. 제국의 천자가 한 여자에게 순정을 받쳐 이리 사지에 와서 포로가 되다니. 눈물겨운 사랑이야. 박수를 쳐주고 싶구만. 뭐, 정치적 이용가치가 높아 해를 입힐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적진에 붙잡혀 와서 자기 신변보다 먼저 계집 걱정부터 하다니. 참 낭만적이로군.”


“네, 이놈!!! 어서 대답해. 그녀는 어디 있느냐?”


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이, 너를 찾는다.”


나는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내가 결박된 게르의 맞은편에… 하지만, 내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내가 전혀 상상도 할수 없는, 예전에 수려하고 당당한 모습과는 다른 비참한 모습으로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포로들의 말처럼… 넝마를 걸친 모습으로 팔과 다리는 결박되어 있었고, 목에는 짐승들이나 찰 법한 목줄을 하고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 그녀가 먹었을 것으로 보이는 오물 같은 음식과 더러운 물이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고, 그녀는 기둥에 매인 짧은 목줄에 허리조차 펴지 못하고 웅크리고 두려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 유화?”


그러나… 그녀는 나의 말에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러면서, 나는 또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을 틀며 드러난 그녀의 배… 부풀어 있었다. 임신이 틀림없었다. 머리속이 하얗게 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임신? 아이를 가져? 지금 저… 늑대 새끼의 아이를? 내가 망연자실하고 있자, 그 자가 그런 나를 비열하게 비웃으며 일어서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걸어오자 그녀는 흠칫했고, 그 자는 임신한 그녀의 목줄을 거칠게 잡아 당겨 자신에게 끌고 왔다.


“유화? 이제 그런 건 여기 없소. 이건 그냥 이름도 없는 내 가축에 불과하지. 적당히 음식 찌꺼기와 오수를 받아 먹고, 영광은 간 곳 없이 자신이 한때 조롱하던 자의 손에 농락당하며, 늑대의 씨를 품을 노예일 뿐이야. 아, 그러고 보니 어쩌다 보니 이번에 내 씨를 받아서 배에 가졌지. 어미는 천한 노예지만 뱃속에 아이는 내 피를 이은 늑대의 위대한 핏줄이지. 그러니, 그런 핏줄을 낳기 위한 괜찮은 씨받이이기도 하군. 어떻소? 황제… 아직도 이것이 그대가 연모하던 그 고귀한 여인이 맞는가?”


“네놈!!! 죽여버릴 것이다. 반드시!!! 죽여 버릴 것이야… 유화, 정신을 차리시오. 내가 구하겠소. 내가 당신을 반드시 구하겠소. 지금은 내 꼴사납게 저자의 농간에 잡힌 신세지만… 반드시 내가 그대를 구할 것이오. 그러니… 희망을 버리지 말고 나를 기다리시오.”


나의 말에,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슬픈 얼굴을 돌릴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그녀는… 틀림없이 나를 보았다. 자그마한 희망을 담은 눈으로… 하지만 저 포악한 자의 눈에 들키는 것이 싫어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나와 그녀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그 자는 그저 그런 나를 조롱하고 싶었는지 갑자기 그녀를 잡아 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뭐… 뭐하는 것이냐?”


“아아… 그냥, 평소에 자주 하는 거. 황제께서 옛 연인의 미망을 버리지 못하니, 조금 일깨워드리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말이지. 한번 거기서 보라고. 이 노예가 얼마나 천한 년인지를 말이야.”


“뭐라고? 서… 설마… 지금 네놈이 임산부를 범할 셈이냐? 그만둬!!! 그건 용서받지 못할…”


“노예에게, 그딴 건 없어. 거기서 똑똑히 보라고. 네 여자였던 것이 보여주는 화냥끼를 말이야. 아마… 지루하진 않을꺼야.”


그리고… 나는 그녀가 그의 품에서 거칠게 당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안돼… 제발…”


무의미한 외침이었다. 그는 끝까지 수치로 얼굴조차 들지 못하는 그녀를 놈은 유린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널부러진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 처참하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무기력하게 그녀가 사라진 뒷모습을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아내여… 미안하오.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로… 미안하오. 그러나, 어둠속에 무기력한 외침은 침묵보다 의미가 없었다.


몇일의 시간이 지났다. 나의 포로 생활도 무기력하게 이어졌다. 의외로… 나에 대한 대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결박되어 있었지만 먹을 것은 나름 좋은 것이 나왔다. 물론 황궁의 만찬에 비하면 사료에 불과하지만, 그녀가 개처럼 핡아먹는 것에 비하면 과분하리 만큼 좋은 식사였다. 그리고… 그는 수시로 나를 조롱하듯 내 앞에서 그녀를 범했고, 나는 가슴 속에 칼이 박히는 기분을 느끼며 그것을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게르 안에 나와 그녀를 남겨두고 어디론가 나갔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그녀가 말했다.


“제국의 주력이… 집결해서 북상하는 모양입니다. 이전에 산개되어 전선을 형성하여 움직이던 방식을 버리고 결전을 통해 폐하를 구하려는 모양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제국을 괴롭혀 온 늑대들의 사냥기동은 효력을 잃죠. 그 대응을 위해 자리를 비운 모양입니다.”


“그대… 이제야 정신이 드는건가? 유화… 나를 알아보겠소?”


“네.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절망스러울 따름입니다. 폐하, 대체… 왜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그야 당연한 것 아니요. 그대를 구하러… 그대를 구해서 데리고 가려고 왔소.”


그러나 나의 격앙된 말에도 그녀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이제…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이미 보셨잖습니까? 저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복수에 불타는 그에게 붙잡혀 자유와 의지를 잃고 노예로 떨어지고, 이제는 그 늑대의 손에 늑대 새끼까지 가진 몸입니다. 지금 와서, 저를 구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으십니까? 그건 제 절망만을 더 크게 만드신 것에 불과합니다. 차라리… 차라리 이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지 않으셨다면 좋으련만… 대체 와서 무엇을 보고자 하신 겁니까? 네?”


그녀의 말에 나는 무기력함과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미쳐버렸다면 좋으련만, 온전한 정신으로 군의 움직임까지 분석하는 그녀… 그녀를 어떻게든 구해야 한다. 이곳은, 그녀에게 있어 견딜 수 없는 지옥이다. 하지만, 늑대들의 손에 포로가 되어 이제는 정치적 거래로 사용된 내 처지는 그야 말로 한심하기 그지 없다. 나는 비통함을 느끼며 흐느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하아… 눈물을 멈추소서. 제왕은 함부로 그런 모습을 천한 자에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아직… 저는 제국의 신료입니다. 황후가 될 수는 없지만, 충신으로서는 남을 수 있습니다. 제가… 폐하를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어떻게? 어?!!”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어디선가 숨겨둔 철사를 꺼내서, 자신의 목과 팔 다리에 결박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되자, 이제 거의 만삭이어 불편한 배를 이끌고 나에게 다가와 묶인 나를 풀어 주었다.


“몸이 가벼워지면 탈출하려고 미리 준비해뒀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기다릴 여유가 없군요. 폐하는 어서 이곳을 탈출해 제국 측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부족장들의 작전 회의로 그가 잠시 자리를 비워 경계가 소홀해진 지금이 유일한 기회입니다. 어서 저를 따라 나오십시오.”


“유화… 그대가 나를 구하는 구려.”


“서두르십시오. 지체하실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게르를 나와서 말을 찾았다. 겨우 한마리가 남겨진 것을 발견하고 나는 말을 올라탔고, 그녀에게 올라타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한마리에 두명이 타면 금새 따라 잡힐 겁니다. 그리고… 설령 말 한마리가 더 있어도, 저는 애초에 무립니다. 이 배를 하고서는 승마는 무립니다.”


“뭐라고? 하… 하지만, 어찌 그대를 여기에 남겨두고선…”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폐하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마저도 부족합니다. 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소란을 피워 저들을 유인해야… 그나마 가능성이 보입니다. 어서 가소서…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안되오. 그러면… 그렇게 되면 그대는 그 잔혹한 자에게 무슨 욕을 볼지 모르는데…”


나의 망설임에, 그녀는 결국 화를 내며 소리쳤다.


“제가 탈출할 기회를 포기하고 폐하를 보내는 겁니다. 제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제발… 가십시오. 이제 곧 발각될 겁니다. 제발… 소녀 목숨을 걸고 청합니다.”


나는 결국 다시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배를 걷어차며 말을 달리게 하고 반대 방향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며 달려갔다. 나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부디… 살아 있어 주오. 내가 반드시 구하러 올 것이오. 반드시… 살아서 못온다면, 죽어서라도!!!”


그렇게… 나는 다시 만난 그녀와 서글픈 이별을 해야 했다. 나는, 그녀의 헌신 덕에 무사히 빠져나와 제국군의 진영에 도달했다. 그녀를 지옥에 남겨둔 채로 비겁하게 홀로… 그래서, 나를 보며 반기는 제국의 신료들과 자신의 권력에만 관심있는 석씨 일가의 사람들을 보며 나는 결전의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폐하, 지금 늑대들이 병력이 집결되어 느슨해진 전선의 틈으로 파고들어 우리의 보급선을 끊었습니다. 결전은 무리입니다. 폐하를 구한다는 목적이 달성되었으니 철군함이 옳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교전 능력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여기서 만에 하나 사고가 나면, 영원성 조차 늑대들의 손에 떨어질 형세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신료들의 말을 강경하게 억누르고 북진을 명했다. 왠일인지 항상 조정에 골치거리던 석씨 일가는 이번만은 나의 의견을 지지하여 결국 결전이 진행되었고, 나는 탈출하며 기억하는 그녀가 억류된 북쪽으로 군을 몰았다. 그리고… 제국은 대참패를 거뒀다. 더 할말이 없을 만큼 엄청난 참패였다. 차라리 전선에 분산되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을… 집결된 부대는 늑대들의 포위에 붕괴되어 후퇴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전력을 소실했다.


다행히도 나는, 다시 한번 제국의 황제가 늑대들의 손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다는 금위군과 석가군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목숨을 보전하였지만, 이제 더 유지할 수 없게 된 영원성에 들어가 농성할 생각조차 못하고… 장성 이남으로 퇴각해야 했다. 비참하기 그지 없는 퇴각행이었다. 늑대들은 제국의 주력이 격파된 틈을 타서 군세를 몰아 남진했고, 그 자식은 결국 영원성마저도 함락시켰다. 유림 장군이 일생을 걸쳐 구축한 제국의 북방 거점이 그들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유가군은 이미 상당히 전력을 복구한 상태여서 저항하려 하였지만, 그 비열한 놈은 다시 한번 그녀를 영원성의 앞에 내놓고 항복을 종용했고… 그녀는 그에게 매질을 당하면서도 저항을 명했지만, 결국 오랜 시간 유씨 일가의 사병이나 다름없던 그 병사들은 그런 그녀의 고통을 보지 못하고, 장기전을 할 여력도 안되었기에… 영원성은 공성전조차 없이 성문이 열리고 늑대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제국의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패배를 자초한 내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석씨 일가의 세도였다.


어이없게도… 그건 내 쪽에서 바래야 할 상황이었다. 패전의 책임을 돌리기 위해, 석씨 일가를 중용하여 내 정책에 반대하는 신료들을 조용히 시키지 않으면 선양에 대한 요구가 나올 지경이었으니깐. 그렇게… 나는 그녀를 구하지 못하고, 제국에 깊은 상처를 내고선 정쟁을 다스리고 피해를 복구하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둔 쿠타이 놈은… 늑대 주제에 감히 자신도 황제라 칭하며, 영원성을 중심으로 한 북방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나는… 철천지 원수지만 그래도 외교적 요식행위로서 파견된 사절들의 보고를 들으며 다시 분노를 억눌러야 했다. 늑대들 치고는 화려하게 진행된 제국 선포와 황위 즉위식… 거기서도 그녀는 여전히 노예였었다고 한다. 그 자의 곁에 묶여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그녀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보지 않았지만, 그날 그 자의 게르에서 보았던 그녀의 다 포기한 얼굴을 떠올리며 절망에 몸부림쳤다.


세월이 흘러 제국은 다시 군사력과 방어선을 조금씩 복구해 갔다. 하지만, 늑대들의 확장도 만만치 않았다. 쿠타이는 항상 소수의 직속 병력만으로 과감한 군사 작전을 통해 제국을 괴롭히고 그들의 영역을 넓혀갔고, 과거의 다른 늑대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교활하게 한족들도 동원하여 그들의 방패막이로 내세웠다. 어이없게도… 영원성이 함락된 이후 제국과 최전방에서 대치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투항한 유가군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 자는 그런 교묘한 방식으로 제국과 나와, 그리고 그녀를 괴롭혔다. 악마 같은 놈… 하늘은 어찌 저런 흉악한 자를 내려 세상을 혼란에 휩쌓이게 만들고 나와 그녀에게 이리 큰 고통을 준단 말인가? 하늘에 원망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그들의 영역은 점점 더 넓어져서 장성에 이르는 영지를 확보하였고, 그것은 의외로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들었다.


“3국 평화조약?”


“네, 그렇습니다. 동여의 사절들이 우리 제국과 늑대들 양쪽에 회담 제의를 해오고 있습니다.”


늑대들의 확장의 기세는 거침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기세는 덕분에 그들의 국경이 예전에 제국하고만 대치하던 상황을 넘어서서, 동방의 제 3국인 동여와 마주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교역국가인 동여는 그런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그것은 잘하면 국력의 차이로 다소 불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 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늑대들과 손을 잡고 우리를 압박할 수도 있고, 반대로 우리의 손을 들어 늑대를 압박하여 그 대가를 챙길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들에게는 손해볼일이 없는 일이기에 그들은 평화 회담이라는 형식으로 3국 협상을 요청했다. 이미, 늑대들은 동여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우리를 압박하려 전방위적인 외교전을 펼치고 있으나, 형세로서는 경제력이 우수한 우리 제국에 호의를 가진 동여의 지도층들이 난색을 표하는 형국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잘하면 이 기회를 통해 반전의 계기를 노릴 수도 있다는 것이 외교 담당자들의 분석인 것이다. 나는, 그 어떤 방법이라도 그 자식… 쿠타이 놈에게 쓴맛을 보여 줄수만 있다면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그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아예 직접 회담에 참석했다. 황제의 직접 참석에 중립 지역에 회담장을 마련한 동여의 사절들은 감격하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늑대들도 서둘러 그들의 칸을 불렀고, 결국 일이 커져서 3국 정상회담의 형식이 된 자리가 마련되었다. 나는… 거기서 다시 그 자를 조우하였다. 그는 나의 증오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회담의 진행을 측근들에게 맡기고 뒤에서 보고만 있었고,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회담은 일단 단기 종전 협상에 3국이 동의하고, 이제 구체적인 실익을 따지는 협상이 진행되기 직전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했다. 이제, 늑대와 제국, 둘중에 동여의 호의를 얻는 쪽이 전쟁의 우위를 확보할 것이다. 전쟁보다 더 팽팽한 긴장감을 가지고 시작될 협상에 대해 나는 사절들에게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런 팽팽한 분위기는 동여 측에서 좀 난감했는지, 그들은 휴식 시간에 조금 의외의 제안을 하였다.


“동여를 찾아주신 두 황제 폐하에게 잠시 휴식 시간에 여흥을 드리고자 합니다. 동여가 가장하는 가기들의 노래와 춤을 보시고, 마음껏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로 대단한 미인들이 회담장에 나와 선정적이고 야릇한 춤을 추며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여의 진행자는 난감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는데, 그것은 회담장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 나와 그 자는 그 어떤 가기도 옆에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아름다운 여인들이지만, 짐에게는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 다른 곳도 아닌 이런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다른 여인과 놀아나는 것은 도리가 아닌 듯 하군.”


그것은… 명백히 그 자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머쓱해진 동여의 재상만이 나에게서 물러나서 대신에 그 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왠지 모르게 조금 비열한 미소를 나에게 드리우며 말했다.


“제국의 황제는 고결하군. 나도 나름 이유가 있다. 나에게는 따로 계집이 있다. 비루한 것이지만 미색은 죽여주지. 자식을 둘이나 낳고도 몸매도 볼만하고 말이야. 동여의 호의에는 감사하지만, 나는 내게 익숙한 것이 편해서 말이지… 이봐, 그 계집을 들여보내라.”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자 마자 그녀가 들어왔다. 마치… 오늘의 자리를 위해 미리 준비한 듯 가장 색정적인 무희들이나 입을 법한 선정적인 옷을 입고, 모습을 드러낸 그녀가 장내에 들어오자, 영문을 모르는 동여는 그녀의 미색에 감탄했고, 제국은 경악했다. 그리고, 나는… 미칠 것 같은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왠지 느긋한 얼굴을 하고선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그녀를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동여에서 이리 우리를 우대하여 주니 나름 보답을 하는 것이 도리겠지. 보시오. 이것이 우리 늑대의 계집이 보여주는 무희라오. 춤을 추어라.”


지금… 이 자식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여기 3국의 정상과 핵심 관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선정적인 춤을 추게 만든다고? 이건… 명백한 나에 대한 도발이다. 그러나, 소리칠수는 없었다. 동여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한때 그녀가 제국의 황후가 될 여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외교적 과실이다. 그래서 제국의 신료들이 다들 경악하면서도 아무말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녀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에 나왔다. 그리고… 춤을 추었다.


그녀의 춤사위에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에 슬픔이 드리우고 관능적인 몸매가 흐드러졌다. 동여의 사람들은 그녀를 보며 넋을 잃고 있지만, 나에게는 그녀의 슬프고 수치스러운 표정만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녀의 그런 서글픈 절망의 춤을 보며 점점 더 노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고, 반대로 나를 조롱하는 듯이 주시하는 그 자식은 흐믓해 했다. 그리고 결국,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고, 나는 그녀의 눈에서 나를 주시하는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호소였다. 차라리 눈을 감아달라는… 결국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 놈!!!”


결국 참지 못한 나는 유일하게 회담장에 무기가 허용된 황제의 자격으로 칼을 빼들고 늑대에게 달려갔고,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면서 당황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 자식은 여전히 느긋하게 자리를 피하지도 않고 있었다. 겨우 몇걸음… 저 놈을 죽이는 것이 가능한 몇걸음이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나… 그것은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내리치려는 칼날을 멈췄다. 내 눈앞에는 팔을 벌려 그를 막아서는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폐하, 이게 무슨 짓입니까!!! 평화를 논하러 온 회담장에서 이런 행동이라니… 동여는 제국에 실망하였습니다.”


동여의 재상들과 신료들이 분노하여 소리쳤고, 제국의 외교 담당자들이 서둘러 변명하려 하였으나… 너무 늦었다. 결국 혼란 속에 쿠타이는 느긋하게 일어서 여전히 칼을 든 나와 나를 막아서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녀를 흘깃 보더니, 그녀의 목줄을 잡아 당겨 끌고 칼을 쥔 내게 뒤를 보이고 돌아섰다.


“동여의 사절들이여. 똑똑히 보시오. 저것이 제국이오. 한낱 계집의 유희에 저리 경거망동하다니… 더는, 회담은 무의미하겠군요. 베이고 싶지 않으니 먼저 일어서겠소이다. 후일의 일은 따로 사절을 보내도록 하지요.”


그리고 그는 끝까지 나를 돌아보지 않았고, 나는 등을 보인 그를 보고 칼을 들고도 어쩌지 못하고 결국 그가 회담장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만 보아야 했다. 그리고 나를 흘깃 돌아보는 그녀의 처연한 눈빛이… 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그녀의 모습이었다. 회담은 파탄이 나버렸다. 동여는 제국에 외교 단절을 선언하고 늑대에게 회담장에서 칸을 위험하게 만든 사과를 하고 대신에 우호를 약속했다. 그것은… 늑대들에게 안정적인 교역로와 식량공급처, 그리고 제 2의 후방 전선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늑대들의 제국은 그것을 토대로 번성했다. 제국은 결사적으로 외교적 실책을 막으려 노력하였으나, 결국… 장성은 그들의 것이 되었고, 제국은 장성 50리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하늘은 정말이지… 선한자의 편이 아닌 모양이다. 또 세월이 흘렀다. 나는 그녀를 구하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늑대들의 위협에서 제국을 지켜내는 것이 고작인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제국의 방위를 위해 많은 젊은이가 희생되어야 했고, 각종 조세가 백성들의 삶을 고단하게 했다.


이 모든 것은 다 저 간악한 놈의 의도대로 였다. 덕분에, 제국을 이탈하여 늑대들의 노예가 되려고 스스로 북으로 향하는 난민들이 발생할 지경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그 시절… 나는 언젠가는… 그저 언젠가는 그녀를 반드시 구해내겠다는 일념으로 싸우고 또 싸우며 제국을 지켜내고 기약하기 어려운 날만을 기다리며 힘겹게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자가… 죽었다고?”


“네… 확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항상 제국을 최우선으로 상대하던 그의 예하 병력과 유가군이 후방으로 물러났습니다. 소문으로 돌던, 북방에서 발생한 역병의 여파가 그에게 미친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는… 그제서야 겨우 하늘이 나에게도 기회를 주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그자의 강력한 지도력으로 그 소수의 병력만으로도 유지되던 늑대들의 제국이다. 하지만… 그가 없다면… 그 철천지 원수인 그 자가 없다면, 더 이상 늑대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그 자를 내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원통하지만, 이제 기회는 왔다. 설욕의 기회가… 그녀를 구할 기회가… 나는 오랜 시간 장성 이남으로 물러나 숨을 죽이고 힘을 길러온 제국군에 명령했다.


“북진하라. 이제 제국의 반격이 시작된다.”


나의 병사들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북으로 향했다. 그런 우리의 기세에 늑대들은 사분오열하며 북쪽으로 물러났고, 많은 부족들이 우리들에게 화친을 청해왔다. 그들에게는 그 자의 뒤를 이은 새로운 칸, 그렇다. 그녀가 낳은 늑대와 한족의 혼혈인 자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나는 일단 그런 자들을 받아들이며 전진했고, 그런 나의 진격에 그 자의 아들도 결국 사절을 보냈다. 나는 그들이 나에게 가져올 강화의 조건에 반드시… 그녀의 송환을 넣으리라 마음 먹었다. 그래서 그들의 사절이 오자, 이제야 그녀를 다시 만나리라 부픈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뜻밖에 소식을 전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순장? 순장했다고? 지금… 그녀를 죽여 그자와 같이 묻었단 말이더냐?”


사실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너무 늦어버렸다. 이제는 정말로 늦어버렸다.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정도로… 돌림병에 죽어가던 그 자는 그 와중에도 그녀에 대한 학대를 멈추지 않고 자신이 죽으면 그녀를 죽여 같이 무덤에 묻으라 명했고, 그의 부하들은 그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결국… 그녀는 죽어서도 그 자에게 해방되지 못하고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분노한 나에게 그들 사절은 그녀가 묻힌 그들의 칸이 무덤의 위치를 알려줬고… 나는 그곳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 너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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